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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어비앤비 Oct 10. 2019

대만을 히치하이킹하다

자연에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한 우리의 여행

2016년 한국을 강타한 지진의 여파로, 작년 겨울 방학에 근무하는 학교에서 기숙사 내진공사로 3주간 휴교를 결정했다. 갑작스럽게 만들어진 휴가에 당황한 우리는 이 시간을 어떻게 써야 좋을지 머리를 굴렸다. 하루를 꼬박 날아서 가야 하는 시댁인 이란은 3주만 가기엔 너무 멀고, 남편이 비자를 발급받기 좋으면서도 설 연휴가 낀 이 기간에 너무 부담이 되지 않는 나라를 찾아야만 했다.

▲ 이란 한국인 부부인 우리

우리 부부는 이란인인 다큐멘터리 제작자 남편과 한국인인 애니메이션 제작자 부인으로, 부산국제영화제를 인연으로 친구가 되었다가, 함께 한국과 이란을 여행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부부가 되었다. 자연을 좋아하다 보니 아끼게 되었고, 생활양식에서 환경을 배려하는 방식을 따르기 위해 노력하는 요즈음이지만 처음부터 이렇지는 않았다. 우리 두 사람 다 20대에는 해외여행을 너무나 동경하여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여행에 대한 동경으로 배낭을 메고 다니면서 여권에 찍힌 스탬프를 세며 사진을 찍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어떻게 떠나야 할까?


나의 장기 배낭여행들은 직장인의 신분이 되면서, 짧은 연휴가 생길 때마다 여건이 되는대로 길게는 일주일, 짧게는 3일 동안 스쿠버 다이빙에 투자하거나, 맛집과 휴양지를 찾는 여행이 조금씩 자리를 메우기 시작했다. 남편은 반대로 온전히 자연에 가까워진 사람이 되었는데, 현지에 적응하여 유목민들과 함께 차를 마시고 하늘을 이불 삼아 백만 개의 별이 뜬 호텔을 찾아다니는 여행자가 되었다.


신혼여행으로 지낸 태국에서 한 달 살기를 하면서 우리가 관광객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그 장소의 환경과 문화를 파괴하는지 가까이서 보고 말았다. 내가 사랑하는 산호를 보러 가기 위해 간 섬에서 더 많은 사람들을 실어 나르기 위해 산호를 뿌리 채 뽑아내고 있는 것을 본 이후, 나는 한동안 여행을 갈 수 없었다. 개인의 행복이 그 어느때보다도 더 자유와 힘을 받는 요즈음이지만, 이미 눈앞에서 외국인들이 자유를 만끽하는 아름다운 백사장 옆 리조트 바로 뒤에 있는 슬럼가들을 보고 난 이후 여행에 대한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후 여행을 쉬며 어떤 방식의 여행이 가장 자연스러운지에 대한 고민에 빠져있었다.


그럼에도 직장인인 나에게 3주의 연휴는 너무나 달콤한 유혹이었고, 우리는 이번에는 후회하지 않도록 몇 가지 철학을 세우고 여행을 시작하기로 하였다. 최대한 남편의 여행의 방식에 가까워지고 싶었다.


“최소한을 남기고, 최대한을 배우고, 자연과 동화되며 사람들과 공유하고 돌아오자.”


몇 개의 나라가 리스트에 오르고, 대만이 그 안에서 확고히 자리를 잡게 되었다. 우리는 티켓을 예매하고, 대만의 역사와 환경에 대해 몇 가지 책을 읽고, 영화로 먹고사는 부부답게 대만을 맛볼 수 있는 몇 편의 다큐멘터리, 그리고 대만의 천재 감독 이안(Lee Ang)의 작품들을 연도별로 차례대로 훑으며 조금씩 매력적인 이 섬나라에 물들기 시작했다.




실례합니다. 함께 가도 될까요?


사람들이 친절하기로 소문난 대만은 안정된 치안과 더불어 히치하이킹 여행자들에게는 초심자 코스 같은 곳이었다. 평소 환경과 공유의 문화에 관심이 많은 우리 부부는 돈이 없어도 여행이 가능하다는 믿음과 함께 환경과 문화에 폐를 끼치지 않는 여행 방식을 시도해보기로 했다. 따라서 이번 3주 동안의 여행은 온전히 히치하이킹과 도보, 최소한의 대중교통으로 구성하고, 숙소도 캠핑과 공유 숙소로 만들어가기로 결심하고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 히치하이커 데뷔

대만은 기다란 고구마처럼 생겼다. 중앙에 커다란 산맥을 기점으로 서쪽은 공업과 산업이 발달한 도시들이, 동쪽에는 중국의 대만 원주민들의 문화와 천혜의 자연을 만날 수 있는 매력적인 나라다. 이 나라는 큰 도로가 서쪽과 동쪽게 각각 길게 하나씩 놓여 있어 남과 북이라는 표기 만으로도 쉽게 길을 찾을 수 있다. 그렇게 우리는 길 위에 섰다. 배낭을 바닥에 내려놓고 두근거니는 마음으로 타이난(Tainan)을 적은 종이를 들고 서서 신호대기중인 차들을 보고 미소를 짓자, 거짓말처럼 버스 한 대가 바로 멈추어 섰다. 단지 다섯 대의 차가 지나갔을 뿐이었다.

▲ 밥 위에 반찬을 얹어먹는 전형적 대만식 식사

인상 좋은 기사님은 가오슝(Kaohsiung)으로 가는 미니 버스 운전기사였다. 빈 버스로 내려가면서 심심했는데 잘 되었다고 말씀해주셔서 기뻤다. 나의 짧은 중국어가 구글 번역기와 함께 딱 그에 맞는 짧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아이고 중국어 공부를 더 해왔어야 하는데! 늘 그렇지만 언어는 그 나라를 열어주는 첫 번째 도구이다.


기사님은 우리를 타이난의 숙소 인근 도로변에 내려주셨고, 덕분에 빠르게 원하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너무나 순조로웠던 첫 히치하이킹이었다. 호스트 린(Rin)의 집까지 20분가량 걸어가면서 깨끗한 도시의 풍경과 전통적인 분위기에 매료되었다. 우리는 숙소에 들어가기 전 근처 공원에 앉아 대만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차예딴(Chayedan)을 먹었다.


대만은 길거리 식당과 편의점이 상당히 훌륭하다. 사실 포장된 음식 중에서도 맛있는 것이 많지만, 쓰레기를 만들고 싶지 않은 우리에게 길거리 음식들은 훌륭한 끼니가 되주었다. 특히 차예딴을 비롯해 대만 전역에서 판매하는 간장과 차에 절인 찐 계란은 맛도 일품이지만, 그릇만 가져가면 쓰레기가 계란 껍질 외에는 전혀 발행하지 않았다. 한국에도 편의점에서 맥반석 달걀을 플라스틱 포장 없이 팔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젓가락과 작은 도시락통을 하나 가지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대만의 수많은 길거리 음식을 먹을 때 쓰레기 제로에 동참할 수 있었다. 대만은 한국만큼 정수기도 흔한데, 차를 즐겨 마시는 문화가 있어 냉수와 녹차를 위한 70도의 물과 뜨거운 물까지 다양하게 준비되어있다. 물통과 약간의 차 잎만 있어도 음료는 늘 공짜다. 아주 작은 귀찮음이 있지만 그를 뛰어넘는 만족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공원에서 한가로이 책을 읽고 남편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해가 완전히 기울어 대만 서쪽 바다로 넘어가고 있었다. 잠시 넋 놓고 타는 노을을 바라보는 순간, 길을 가던 사람들이 모두 동시에 하늘을 바라보고 있음을 느꼈다. 이 도시에는 아름다운 풍경에 말없이 시선을 던지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사실이 너무나 감사하고 행복했다. 해가 완전히 저물고 눈이 마주친 사람들은 미소로 서로 인사하며 헤어졌고, 우리도 퇴근한 우리의 호스트 린(Ryn)을 만날 수 있었다.

▲ 첫 번째 호스트 린



우리의 여행은 어디로 가는가?


다음날 아침, 린이 내려준 맛있는 커피를 마시며 하루를 시작했다. 린은 타이난의 진짜 맛집을 데려다주겠다며 무려 우리를 위해 휴가를 내고 함께했다. 그녀가 안내한 곳은 타이난에서 꽤 유명한 어죽 집. 농어가 잔뜩 든 생선죽에 기다란 튀김인 유티아오(Youtiao)와 함께 먹으니, 진하고 비린맛이 전혀 없는 어죽과 너무나 잘 어울렸다. 과연 휴가를 내서 올만한 식당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타이난은 대만의 주방이라고 불릴 정도로 미식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역사가 깊은 도시답게 신구의 조화도 매력적이다.

▲ 댓잎에 싸인 내 사랑 쫑즈

식사 후 애초에 무계획이 계획이었던 우리는 하염없이 걸어 다니며 여기저기를 헤매고 다녔다. 우연히 만난 시장을 한참 구경하다 보니 온 가족이 쫑즈(Zongzi)를 만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댓잎으로 싼 이 주먹밥을 만드는 그들을 한참 바라보다 두 개를 사서 가게 구석에 앉아 따뜻한 차와 먹으니 행복해졌다.


걸음을 옮겨 타이난에서 유명한 관광지인 션농지에(Shennong Street)에 도착했다. 아기자기한 카페들이 귀엽긴 했지만, 미묘하게 인위적인 것이 마치 인사동 같은 기분이었다. 발걸음을 안핑(Anping)으로 옮겨 20km 정도를 걸었다. 골목마다 화분이 가득 전시된 집들과 생활감 넘치는 작은 가게들을 구경하며 가다 보니 별로 힘이 들지는 않았지만, 막상 도착한 안핑은 역시나 관광지 느낌이 많이 났다.


나는 무엇을 보고 싶어 여기에 온 것일까? 정돈된 도시들의 풍경은 이미 익숙해졌고, 세계가 점점 더 서로 닮아가면서 특별히 새로울 것이 없어지는 기분인데도 늘 여행을 가고 싶은 나의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잠시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 숙소로 돌아와 차를 마시며 린과 이야기를 나누니 그녀 또한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제는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여행을 다니는 것에 가깝다는 그녀도 점점 여행의 즐거움을 잃어가고 있지만, 시간이 생기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다시 길 


우리는 여행지 안에서 점점 관광지를 제외하기 시작했다. 오히려 사람들이 추천하는 명소를 피해 다니며 히치하이킹을 이어갔다. 히치하이킹들의 초심자 코스로 유명한 대만답게 정말 차 3대를 넘기기 전 차가 멈춰 서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고속도로나 톨게이트 아닌 도시 안에서도 이따금씩 사람들은 차를 세워주셨다.


대부분 영어가 통하지 않아 덕분에 나의 중국어는 조금씩 늘어갔다. 말이 늘어갈수록 사람들과의 대화가 짙어졌다. 히치하이킹을 하는데 가장 마음이 어려웠던 점은 운전자가 자신의 목적지를 넘거나 행선지를 바꾸어 우리가 가고 싶어 하는 곳까지 데려다주는 것이었다. 우리는 최대한 빨리 눈치를 채고 그들의 여행에 동행하는 선에서 내리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어디까지 성공했는지 영원히 알 수 없을 것 같다. 친절한 대만 사람들은 여행자들인 우리에게 뭐라도 하나 더 쥐어주고 싶어 과일 봉지나 만두를 건네 주곤 했다. 한국에서 준비해 간 작은 선물들을 그때마다 풀면서, 은공에 보탤 수 있어 다행이었다. 길 위에서의 인연은 점점 더 소중해져 갔다.

▲ 길 위의 남편

대만은 국립공원이 상당히 잘 관리되고 있는 편인데, 그중에서도 인상 깊었던 것은 상점을 완전히 통제한 철새도래지였다. 저어새가 방문한다는 철새 도래지에는 흔한 음료수 자판기 한대는커녕 개인이 가져온 음식을 먹는 것 또한 금지되어있다. 상업적인 이득보다 환경에 대한 보호가 좀 더 발전적인 형태라는 것을 알고 있는 이곳이 조금 부러워졌다. 문득 순천만에 있는 철새 도래지에 몰려든 카페의 빛 공해로 인해 새들이 스트레스를 받고, 천문대에서도 별을 더 이상 관찰할 수 없다는 천문대 선생님의 말이 귀에 머무는 기분이었다.


치구(Qigu) 저어새 보호구역은 본래 양어장이 주 수입원이었던 소외된 농어촌 지역의 사람들이 공업지로 개발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그곳이 저어새 서식지임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온전히 자연보호구역이 되었고, 주민들의 지지와 협조로 자연 속에 사람들이 머물다가는 멋진 곳이 되었따. 타이난에서 치구를 돌아 다시 남쪽으로 가는 길에서는 정말 여러 대의 차를 얻어 타고 오며, 아기와 함께 여행하는 가족부터 경찰까지 참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핑동(Pingtung)으로 가는 중 시간이 지체되어 하루를 가오슝(Kaohsiung)에서 묵게 되었다. 이럴 때 캠핑할 곳을 마땅히 찾지 못한다면, 그다음 우리가 선호하는 선택지는 에어비앤비의 개인실이다. 우리는 항상 현지인이 살면서 한 켠을 공유하는 개인실 형태만 고집하는데, 덕분에 에어비앤비 호스트들과 친구과 되었고 아직까지 연락을 주고받는다.


이 경험 덕분에 우리도 집의 남는 방 하나를 에어비앤비로 내놓았고, 이따금씩 찾아오는 게스트들 덕분에 집안에서 여행하는 기분을 맛보고 있다. 가장 개인적인 공간인 집을 서로 공유하면서 현지인들을 만날 수 있는 에어비앤비는 여행이 관광이 아니라 삶이라는 모토에 가장 가까운 숙박업이라고 생각된다. 평점과 신분까지 확인된 상태에서 서로 만나니 안전이 좀 더 보장된 기분도 있다.

▲ 지밍 할아버지와 우리 부부

이번에 우리가 선택한 에어비앤비는 퇴역 군인 지밍(Jhi-Ming)의 집이었다. 대만은 현재 중국과의 독립을 목표로, 국가의 정체성을 중국에 기반을 두었는지, 대만에 두었는지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이 산재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중국에서 온 군인 출신의 집주인이 궁금했다. 숙소에 무척 늦게 도착해서 약간 길을 헤매고 있었는데 어둠 속에서 작은 담뱃불이 보였고, 배웅을 나와주신 지밍 할아버지 덕분에 무사히 들어갈 수 있었다.


목욕을 하고 조금 개운해진 몸으로 늦은 시간이었지만 대만에서는 빠질 수 없는 야시장을 보러 나섰다. 집에서 약 15분 정도를 걸어서 갈 수 있는 루이펑 야시장(Ruifeng Night Market)을 지도에서 찾아냈다. 선선한 밤거리를 한참 걸으니 어디서 이 사람들이 다 나타났다 싶을 만큼 북적이는 시장에 들어섰다. 대만의 야시장에서는 맛있는 먹거리와 다양한 야바위 게임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정말 흥미롭다. 내기를 좋아하고 뽑기를 즐기는 문화는 절에서도 만날 수 있다. 반달 모양의 나무토막을 던져 길운을 점하고, 내가 가진 마음의 질문에 답을 얻는다는 사람들의 생각이 이렇게 야시장에 모여 길운을 점치는 게임문화까지 이어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따끈하고 바삭한 천사 지파이

타이베이의 야시장은 주로 외국인이 가득하다면, 가오슝의 야시장은 주로 현지인들이 대부분이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음료 중 하나인 파파야 우유를 텀블러에 받고 냠냠 맛있게 먹으며 나오니 작은 포장마차에서 끝없는 줄이 늘어선 것을 발견하고 나도 모르게 그 대열에 합류했다. 약 15분을 기다린 끝에 지파이(Jipai)를 하나 사서 나올 수 있었는데 이게 그 동네에서 매우 유명한 천사 지파이라고 한다. 한입 먹을 때마다 바삭하고 육즙이 배어 나오는 게 진짜 맥주를 부르는 맛이로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조금씩 으스스하고 영 몸이 좋지 않은 것 같아 집으로 급히 돌아왔다.

▲ 지밍 할아버지의 에어비앤비

집에 오니 지밍 할아버지의 에어비앤비가 좀 더 자세히 보였다. 깨끗하게 정돈된 집안에는 은은한 향의 냄새와 함께 관세음보살과 관우를 모시는 당이 있었다. 대만에는 정말 많은 신이 있다. 아침 일찍 정화수를 떠서 놓고 신주 쌀을 담는 지밍 할아버지를 보며, 어쩐지 이 문화가 참 소중하고 경건하다는 기분이 들어 같이 기도를 하곤 했다. 테이블에는 항상 해바라기 씨와 약간의 과자가 놓여 있고, 지밍 할아버지가 차를 내리시는 순간 어떻게 알고 오시는 건지 이웃 아저씨가 놀러 오셨다. 마치 이란의 시부모님 댁과 같은 모습이었다.


차는 항상 사모바르(Samovar) 위에서 끓고 있고, 옆집 아주머니가 과자를 들고 찾아오시면 또 그 옆에서 과일을 가지고 모여 카펫 위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옹기종기 모이게 된다. 한국도 예전엔 저런 모습이 있었는데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옆집에서 옆집의 이웃이 막역하게 찾아와 함께 녹차를 기울이며, 다함께 산더미같이 쌓인 해바라기 씨를 까먹었다. 할아버지의 짧은 영어와 더 짧은 나의 중국어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밤이 깊어갔다.


항상 새벽같이 일어나는 남편이 어디 갔나 싶었는데 할아버지의 집 앞에 일요 벼룩시장이 열렸다고 했다. 부랴부랴 씻고 따라 나가 보니, 정말 집 코앞부터 잡동사니들이 좌판으로 가득 들어서 있었다. 이미 사라져가는 낡은 폴더 폰부터, 오래된 화폐와 장난감들, 카세트테이프와 장식품, 찻잔 등 온갖 역사가 여기에 다 모여 있는 기분이었다. 태엽을 감을 수 있는 작은 오르골이 너무나 예뻐 잠시 탐을 내었으나, 배낭여행 중에 지고 다니는 것은 너무나 힘들 것 같아 마음에만 담아두었다. 10년째 쓰고 있는 손목시계 줄을 솜씨 좋은 어르신께 수리받은 후 아침을 먹기 위해 식당을 찾았다.


주문할 때는 모르면 물어봐야 한다. 줄 서있는 손님 중 영어를 할 수 있는 분을 찾아내어 이곳의 유명한 것은 갓 튀긴 유티아오(Youtiao)와 부추가 든 고기만두라는 것을 알아냈다. 육즙이 흘러내리는 만두와 고소한 맛이 일품인 대만의 또우쟝(Doujiang), 그리고 먹으면 먹을수록 바삭하면서 부드럽고 밍밍한 맛에 중독되는 무 케이크인 로보까오(Luobogao) 등을 먹고 참 즐거웠다. 하지만 조금씩 미열이 올라오나 싶더니 세상이 빙글빙글 돌면서 목구멍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집에 돌아오니 지밍 할아버지는 오늘은 새 손님이 없다고, 늦게 가도 되니까 좀 더 쉬고 가라며 소금물이 담긴 끓인 물로 가글을 하라고 알려주셨다. 걱정이 한가득인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니 돌아가신 우리 외할아버지가 생각났다. 한숨 자고 나면 나아질 거라고 할아버지께서 주신 뜨거운 물주머니를 안고 한 시간 자고 나니 정말 한결 몸이 좋아졌다. 예전의 여행객들이 묵었던 숙소들의 형태는 아마 이런 곳이 아니었을까 생각되었다.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순간이다. 이런 인연과 생활을 공유하면서 우리는 도시의 삶에서 잃어버렸던 유대감을 조금씩 되찾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야생이 살아 숨 쉬는 남동부


가오슝에서 동부로 가는 길에 샹류 국립공원(Shuangliu National Forest)으로 들리기 위해 처음으로 남북이 아닌 동서 도로에서 편의점 탑차를 얻어 탔다. 중간중간 기사님이 들러야 하는 물류센터도 함께 들리면서, 이 많은 플라스틱 음료수들이 어떤 경로로 전달되는지 조금은 알 수 있었다. 히치하이킹을 할 때는 주로 저런 물류 차량과 트럭들이 호의적이다. 이 기사님께서는 무려 반대쪽 차선에서 차를 돌려서 우리를 태우러 오셨었다.

▲ 편의점에 음료를 납품하는 트럭을 히치하이킹한 후 받은 차, 저 물통은 여행 끝까지 참 잘 썼다.

산맥을 따라 국립공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시간이 많이 늦어 공원 관계자분들이 입장이 어렵다고 하셨지만 도보로 배낭을 메고 온 우리가 딱했는지, 관리소 입구 나무 정자 안에서 캠핑을 해도 좋다고 허락해주셨다. 그날 밤 정말 많은 비가 내렸는데 안전한 지붕이 있어서 꿀잠을 잘 수 있었다. 아침 일찍 텐트에 찾아온 도마뱀과 벗 삼아 차와 만두를 먹고 원숭이들이 인사해주는 숲에서 한참 개운한 공기를 느끼며 폭포를 보고 내려왔다. 공원 관리소 소장님께서 사무실 안에서 맛있는 커피를 내려주시고 과일을 한 아름 안겨주셨다. 따뜻한 마음을 품고 우리는 동부로 향했다.

▲ 국립공원 산장지기 아저씨와 함께

매일매일 산을 즐기며 행복함은 더욱 커졌다. 타이동에서는 고향집에 올라간다고 자기 집이 비니 마음껏 머물다 가라며 열쇠를 내어준 여행자 숙소의 주인 에밀리(Emily)가 있어 해변가의 집에서 여유 있게 며칠을 보내고, 처음으로 히치하이킹을 하는 스페인 커플을 만나 담소를 나눌 수 있었다. 동부로 오니 중국계가 주를 이루던 대만 사람들의 모습이 바뀌어 토착민들이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덕분에 원주민 자매의 차를 얻어 타기도 하였는데 자기 부족의 문화와 환경을 소개해주며 큰 자부심을 품고 있음이 느껴졌다. 하지만 동시에 숲과 밀접한 부락의 삶과 도시의 삶 안에서 점점 도시화되어가는 젊은이들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다. 어떤 삶이 더 풍요로운 삶인지는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중동의 이란이 아니라 타이완의 이란


히치하이킹을 할 때마다, 짧은 자기소개 끝에 우리는 항상 한국인 이란인 부부라는 소개를 하곤 했는데 누가 봐도 서아시아 얼굴인 남편인데도 사람들은 깜짝 놀라며 대만의 이란에서 왔느냐고 묻고는 했다. 거기가 아니라 중동의 이란이라고 답하면서도 대체 대만의 이란은 어떤 동네인지 너무나 궁금해졌다.


대만의 이란을 만날 수 있는 이 기회는 설날에 생겼다. 설 연휴에 온 가족이 모이는 자리에 영어 선생님이자 이란 지역 원주민인 마이클(Micheal)이 온갖 외국 친구들을 다 초대해준 덕분에, 우리도 그 자리에 끼어 행복한 설을 보낼 수 있었다. 8개국의 친구들과 국적을 넘어서 보드게임을 즐기기도 하고, 논밭에 흘러 온 쓰레기들을 주우며 마을을 청소하기도 했다. 호텔 주방장 출신이라는 마이클의 아버지가 차려주신 엄청나게 맛있는 음식들과 보낸 설 연휴의 매일 저녁에는 온 나라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 그중에서도 백미는 이스라엘 친구가 이스라엘 전통 악기인 우드(Oud)로 연주한 멜로디에 이란인 남편이 노래하는 시간이었다. 여행 초반에 이제는 무엇을 위해서 여행을 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하루하루가 너무나 충만하고 자연에 가까워질수록 우리는 더 많은 것을 배워가고 있었다.

▲ 우유니 사막만큼 아름다운 이란의 논밭 풍경

이란은 대만의 텃밭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비옥한 토지를 갖춘 농업도시였다. 덕분에 우리는 우유니 사막 못지않게 멋있는 반영을 매일 아침 만날 수 있었다. 물을 댄 논의 풍경이 이렇게 아름다운지 난생처음 알았다. 하얗고 우아한 백로가 논을 거닐고 뭉게구름 뒤에는 무지개가 떠 올랐다. 아침마다 새소리를 듣고, 밤에는 풀벌레와 개구리 소리를 들으면서 하루하루 다시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너무나 친절하고 소중한 대만의 인연들 덕분에, 히치하이킹으로 한 대만 전국일주는 3주 만에 무사히 끝났다.




그리고 우리는

▲ 우리의 대만 여행 경로

아이러니하게도, 대만의 마지막 날 밤 갑작스러운 지진으로 공포에 잠긴 채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렇게 선물과도 같던 휴가가 지진으로 끝나 아쉬웠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대만이 너무나도 그립다. 그때의 여행 덕분에 항상 컵과 식기를 휴대하는 습관이 생겼고, 자신의 곁을 내어주는 사람들 옆에서 그들의 삶의 방식을 배울 수 있었다. 풍요로운 자연과 그들만의 문화를 지키려는 그 삶 속에 돌아가고 싶다. 여행은 어느새 삶이 되고, 그 덕분에 한국에 돌아온 이후에도 새소리와 풀벌레 소리, 그리고 불타는 노을을 이따금씩 바라보며 우리 안에 아직 남아 있는 여행을 추억한다.





에어비앤비 작가, 주영 소헤일리

애니메이션과 다큐멘터리로 소통하는 영상 제작자이자 프로듀서. 세계의 다양한 곳들을 떠돌아 다녔는데, 특히 호주 전역을 초상화를 그려주는 버스킹으로 1년간 여행했다. 현재는 남편과 함께 친환경적인 여행을 하기 위해 노력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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