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매일 당신의 두 뺨에 내려앉는다, 드레스덴
긴 여행의 삼분의 일 지점을 넘어섰다. 집을 떠나 온 지 육십 여일이 지났으니 이제 여행자의 일상이라 명하는 이 날들에 적응했구나 싶다가도 큰 배낭을 짊어지는 날은 언제나 그 무게만큼의 호흡을 가다듬는다. 남편과 함께 180일간의 세계여행 중이다. 호기롭게 60L짜리 배낭을 뒤로, 20L짜리 배낭을 앞으로 둘러메고 지구본을 따라 걷는 중인데, 살면서 필요한 것이 그리 많지 않음을 새삼 깨닫는다. 배낭 하나에 충분히 담길 이 생이 가볍기도, 무겁기도 한 날들.
독일 뉘른베르크를 떠나 드레스덴에 도착했다. 정보가 그리 많지 않은 도시. 주변 여행자들에게 얻어 들은 바로는 독일의 피렌체라 불릴 만큼 말랑한 감수성을 가졌다는 것과 전쟁의 상처를 예술로 승화시킨 작고 어여쁜 도시라는 것이 전부였던 곳. 그래 그래서 이 곳이어야 했다.
삶의 처음인 것들을 매일 경험하는 여행자의 시간을 살다 보면 이름난 도시, 멋들어지게 황홀한 도시가 주는 강렬함이 버겁게 다가올 때가 있다. 너무 좋은 것들이 쓰나미처럼 한꺼번에 밀려들어와 느끼고 감상할 겨를이 없는, 감정의 과부하를 경험하는 순간. 마음을 들여다보고 생각을 매만질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낀다. 크고 거대한 유명 도시를 ‘관광’하는 것이 내가 찾던 ‘여행’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그 무렵 만난 이 작고 말랑한 도시 드레스덴. 여행자의 휴일 같은 이 곳을 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버스 터미널에 내려서서 큰 숨을 들이쉰다. 긴 여행 중에 가장 설레는 시간은 처음 마주한 도시 그 특유의 공기를 만나는 바로 이 순간이다. 도시는 저마다 품은 온도, 습도, 냄새와 같은 독특함이 있는데 이 감각적인 것들은 언제나 새로운 기대 가운데 나를 가져다 둔다.
배낭을 짊어지고 이제 제법 익숙해진 유럽의 트램을 타고 일주일간 우리가 머물 집을 찾아가는 길. 새삼 우리가 여행자임을 실감한다. 출근 퇴근, 혹은 평범한 일상의 순간을 사는 사람들 틈에 제 몸 만한 배낭을 짊어진 동양인 커플. 그들의 하루에 허락 없이 들어와 이방인으로 모든 시선을 받아내는 시간.
안녕, 난 여행자의 시간을 살고 있어
트램을 타고 지나가는 풍경 너머로 드레스덴 도시의 느낌이 왈칵 다가왔다. 노선은 구시가지를 지나 우리 숙소가 위치 한 신시가지를 향해 가는데 2차 세계대전의 아픔을 간직한 도시라 칭하는 이유를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파란 하늘 아래 새까맣게 그을려진 건물들, 슬픈 역사에 아름다운 오늘이 덧입혀졌다는 도시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드레스덴 궁금한 도시가 되었어.
드레스덴에서 머무를 숙소는 에어비앤비다. 우리 같은 장기 여행자에게는 매우 중요한 숙소 선정. 무조건 우리 집 같은 편안함을 주는 곳이어야 한다. 며칠 집을 비우고 돌아와도 모든 것들이 거기 그대로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우리들의 공간 같은. 주방의 식기류와 조미료는 최상의 상태로 조리를 기다리고 있으며 욕실은 잘 개어진 보송한 수건과 바삭하게 마른 바닥을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거실은 오후 햇살을 온몸으로 흡수할 만큼 커다란 창문이 놓여 있으며 침실은 바깥 소음과는 철저하게 독립되어야 하는 우리 집. 그리고 무엇보다 머무는 동안 이 집의 주인은 ‘우리’ 여야만 하는 독채의 공간이면 충분하다. 그래야 맘 놓고 몸 놓고 편히 쉬면서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며 기나긴 여행을 무탈하게 지속할 수 있다. 너무 비싸지만 않다면 우리는 어느 나라를 가든 호스텔보다는 에어비앤비를 선호한다. 현지인의 손 때, 생활 습관, 그들의 삶 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전 세계인의 방을 경험한다는 것은 매우 황홀한 일이니까.
숙소를 찾아가는데 동네 느낌이 꽤 좋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늦어지는 내 발걸음에 남편은 저만치 앞서 걸어가다 한 템포 기다려준다. 부부가 발맞춰 함께 걸어간다는 것의 의미를 여행하며 깊이 깨닫고 있다. 기다려주고 참아주고 기꺼이 견디는 것이야말로 함께 걷는 것임을.
골목 곳곳에 프리마켓이 열리고 있다. 작은 가게는 저마다 주인의 취향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반짝거린다. 독일이 이렇게 아기자기한 나라였던가. 드레스덴 구시가지를 지나오며 받은 숙연하고 아련한 느낌이 신시가지에 들어서자 사뭇 다른 기운을 풍겨내며 새롭게 다가온다. 세상을 향한 호기심 넘치는 다섯 살 아이 마냥 깡총 거리며 거리를 밟는다. 현지인의 일상이 녹아있는 뒷골목을 헤매는 시간은 등 뒤에 짊어진 배낭 무게를 잊을 만큼 좋다.
우리 숙소는 신시가지에 위치한 예술가의 집이다. 적당히 독립적인 위치에 적당히 현지인들이 터를 잡고 있는 골목길 끝. 최근 주변 지역에 축제가 많아 본인은 일주일간 휴가를 다녀올 예정이라 집이 비었다며 친절한 메시지로 안내해 준 호스트 아렌. 유럽의 건물은 오래되어 고층일지라도 엘리베이터가 없는 곳이 많은데, 다행히 드레스덴의 숙소는 엘리베이터가 있다. 고마워요. 나 이 도시, 이 동네가 많이 좋아질 것 같네요.
짐을 풀고 우선 끼니 해결의 숙제를 해결해보자. 우리가 에어비앤비 숙소를 선호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주방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 언제나 새로운 도시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머무는 동네의 시장과 마트의 정보를 얻는다. 우리의 여행은 시장과 마트를 산책하고 현지인들이 사는 뒷골목 구석구석을 거닐다 맘에 드는 식재료를 골라 그날 기분에 맞는 음식을 해 먹는 것이 8할이다. 낯선 도시를 익숙한 동네로 만드는 우리만의 방법이자, 도시 저마다의 매력을 가장 잘 기억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많은 나라를 지나왔고 또 앞으로도 지나갈 테지만, 어떤 건축물이나 유명한 박물관의 감흥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내겐 프라하 숙소 앞 과일가게 할머니의 웃음과 매일 저녁 산책하다 마주친 멜버른 지하철 역 노점상 아저씨의 인사, 모로코 메르주가 알리 아저씨의 포옹이 더 깊고 아련하게 남아있다.
배낭을 던져두고 며칠 돌리지 못한 빨래 한 바구니를 들고 집을 나선다. 구시가지는 관광지가 대부분 몰려있고 신시가지는 사람 사는 동네가 모여 있기에 이 곳은 관광하기에는 조금 불편하지만 여행하는 우리에겐 딱 좋다. 관광객의 분주한 걸음보다 현지인의 느긋하고 나른한 걸음걸이가 더 매력적인 거리.
동네 어귀 코인 빨래방에서 1.5유로에 한통 가득 빨래를 넣어둔다. 주어진 45분 동안 마트를 가야지. 일주일 동안 드레스덴에 머물며 무엇을 해 먹을까 고민하는 행복한 시간이다. 독일 몇 개의 도시를 지나 보니 이 나라 마트 물가는 꽤 합리적이고 식재료도 매우 훌륭하다.
오늘 점심 메뉴는 파스타. 여행 동안 기대 이상으로 한식을 많이 해먹은 우리는 치즈와 유제품, 고기의 질이 좋고 저렴한 독일에서 꾸덕꾸덕한 파스타를 만들어 먹기로 했다. 요리를 좋아하는 남편은 여행 내내 각 나라 마트의 다양한 재료를 골라 주인의 개성이 가득한 주방을 사용하는 게 재미있다며 꽤 맘에 드는 경험이라 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루에 두 번 이상은 꼭 들리게 되는 동네의 마트. 일주일을 머물면 마트 캐셔 언니와 친구가 되지 않을 수 없지.
빨래를 찾아 돌아오는 길, 동네의 한낮 풍경에 어우러지고 싶다 생각하며 얼른 밥 먹고 나와 놀기로 한다. 호스트 아렌의 집은 마치 내 상상 속 유럽식 주방을 꼭 닮아있다. 적당히 해가 잘 드는 창이 큰길을 향해 나있고, 나무로 짜인 선반이며 도마에 적당한 손때가 묻어 있다. 제 각각의 모양을 가진 개성 넘치는 그릇들이 정갈하지 않게 놓여있으며 각종 향신료가 나란히 줄 맞춰 늘어진 햇살 머금은 주방. 예술가 호스트의 취향이 곳곳에 고스란히 남아있어 그녀가 어떤 성격의 사람인지 쉬이 떠올려진다.
요리하는 남편의 뒷모습을 보면 종종 뭉클하다. 기꺼이 음식을 만드는 수고와 정성을 가득 담은 손길이 그저 고맙다. 긴 여행에서 지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남편이 매일 차려주는 끼니 덕분이다. 고단하고 무기력하고 힘이 들 때 한 숟가락의 밥이 주는 힘을 나는 너무 잘 안다. 고맙습니다. 영혼을 살리는 닭고기 수프를 나는 매일 맛보는군요.
언제 먹어도 그 어느 레스토랑보다 맛있는 남편의 요리로 든든한 점심을 먹고 집을 나선다. 무거운 가방도 지도도 필요 없다. 발길 닿는 대로 걷다 맘에 드는 곳이 보이면 멈춰 서고 또다시 걷다가 원하는 때에 집으로 돌아오면 된다.
바람도 햇살도 딱 적당한 드레스덴의 오후. 평생 어디 있는지 알지도 못했던 나라, 이 도시의 골목을 걷고 있자니 내 생이 꽤나 맘에 든다.
행복이 별건가.
어제의 고민이, 지난주의 괴로움이 무엇이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우린 살면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걱정과 후회로 낭비하며 살고 있나.
거리를 걷다 보니 아무래도 동네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다. 아마 이 주변에 뭔가 유명한 곳이 있는지, 맛집이 있는지 사람들의 왕래가 너무 잦아 도대체 뭐가 있나 찾아본다. 역시. Kunsthofpassage (쿤스트호프파사쥬). 조금 낙후된 동네 한 골목을 젊은 예술인들이 벽화와 설치 미술로 꾸며 예술가의 거리로 만들어 둔 곳이 여기 근처라고. 우연히 발견한 이런 이벤트 같은 시간이야말로 여행의 보석 같은 순간이다. 낯선 도시에서 예상 가능하지 않은 일들을 만나 그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것, 나 자신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다.
어느 순간부터 여행지에서 필수로 해야 할 것, 가야 할 곳들의 정보를 취하지 않았다. 온라인에 넘치는 정보들을 모두 숙제하듯 해치우고 타인의 경험을 쫓아다니는 나를 발견하고부터 정보 수집은 멈추었다. 그리고 조금 더 나만의 시선으로, 우리만의 시간으로 세상 구석구석들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모든 여행지의 시간이 곱고 아름다웠고 바쁠 것도, 꼭 해야 할 일도 없어진 진짜 ‘살아보는 여행’의 시간을 얻게 되었다.
천천히 걷고 멈춰 서고 머물고 기록하다 맘에 드는 카페에 들어섰다. 그저 아이스크림을 건네는 카페 가게 언니가 너무 예뻤기에. 나는 늘 곱고 예쁜 것에는 눈길이 가고 마음이 머물지. 몇 시간 동네를 걷던 다리를 좀 쉬게 하자 싶었는데 길 건너 공원을 빠져나온 사람들이 끊임없이 카페 앞에 줄을 서 아이스크림을 주문한다.
카페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기다리는 아주머니께 살짝 물었다.
“여기 아이스크림이 그렇게 맛있어요? 유명한 곳인가 봐요?”
그녀는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아이스크림을 받아 들며 외쳤다.
“오마이 갓, 천국의 맛이지요. 아마 독일에서 가장 맛있는 집이라 자신해요. 꼭 바닐라와 딸기를 같이 주문해요. 행복이 어떤 맛인지 알게 될 거예요!”
호탕한 웃음을 남기고 떠난 아주머니의 추천으로 우리도 아이스크림과 커피를 주문하고. 가만히 머무는 여행자의 시간을 누린다. 행복을 먹는 기분, 네 알 것 같아요 그 마음. 카페에 앉아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나의 지금을 그리고 이 햇살의 냄새를 느끼는 지금, 제가 행복을 먹고 있네요.
이렇게 긴 시간을 돌아다니다 보면 여행이 남기는 감동의 순간들이 있는데 그게 너무 평범한 찰나들이라 꽤 놀라곤 한다. 지나가다 문득 고개 들어 본 하늘 이라든가 해가 뉘엿 넘어가는 무렵의 퇴근길 풍경 이라든가 카페에 앉아 늦은 오후의 햇살을 맞이하는 일과 같은. 일상의 배경이라 여겨지는 것들이 나를 멈춰 세우는데 그게 너무나 사랑스럽다.
평범하지만 발길이 머무는,
마음을 붙들어 두는 여행지의 순간을 온전히 누리는 이 시간이 내겐 기적 같다.
떠나지 않았으면 알 수 없었을,
떠나 와서야 깨닫게 되는 일상의 감동들.
하루가 저무는 늦 오후 풍경을 등에 업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남편과 두 손 꼭 잡고 걸으며 지금의 이 마음과 이 행복을 놓치지 말자 다짐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시간이 오늘 같을 수는 없겠지만, 이 햇살과 바람 하나에 행복하다 읊조리던 시간은 절대 잊지 말자고.
당초 여행 계획에는 없던 나라 독일에 머물고 있다. 왜인지 내게 차갑고 건조하고 냉정한 이미지로 기억되어있던 나라, 알아들을 수 없는 거친 발음의 언어가 어쩐지 낯설고 어색해 마음이 기울지 않았으나 얼마나 차갑고 냉정한 곳인지 직접 내 눈으로 보고 싶은 마음에 베를린 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분단의 역사를 가진 동질성도 한몫했고 상상 속 나라에 대한 일말의 기대도 있었기에.
차가운 독일을 상상하며 첫 나라 베를린에 내려섰으나, 나의 고정관념은 완전히 깨졌다. 단아하고 배려심 많은 도시 베를린 곳곳은 매우 사랑스러웠고, 위트 있고 예의 바른 베를리너는 마주칠 때마다 달콤했다. 거리와 골목, 식당과 대중교통 그 어디에서도 베를리너는 절대 무례하거나 무심하지 않았다. 타민족을 대하는 예의와 친절이 일상에 그대로 녹아있는 도시. 어색하리라 여겼던 독일의 첫인상은 만 하루 만에 모조리 무너졌다.
베를린에 이어 뉘른베르크, 밤베르크 도시를 지나오며 오해와 왜곡으로 가득했던 내 생각을 거듭 사과했다. 미안해 독일, 나는 열흘이 넘도록 독일의 그 단아한 따스함에 온전히 녹아들었다. 이미 풍만한 만족감을 가득 안고 독일의 마지막 도시 드레스덴에 입성하자마자 다시 한번 이 나라의 매력에 폭 안긴다.
나를 온전히 들여다보고 우리를 도란거리게 만든 이 도시의 여유. 어느 틈엔가 서서히 행복이 우리 여행의 일상에 스며들었다.
"어디서든 최선을 다해 행복해라.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시간임을 기억하고."
여행을 떠나는 내게 지인이 해주었던 말이 종일 귓가에 맴돌던 하루.
그래, 알 수 없는 내일은 내일로 미뤄두고 오늘은 여기서 최선을 다해 행복하자. 게으른 여행자의 하루가 마음을 차고 넘치게 하는 드레스덴의 첫날.
오늘도 고마웠어, 내일도 잘 부탁해.
지난해 10년간 직장생활을 접고 185일간 부부세계일주를 마치고 돌아왔다. 여행 에세이 <내게 기꺼울 행복> 을 출간해 '작가'라는 호칭에 적응중이며, 글을 쓰고 삶을 쓰고 마음을 쓰며 사는 철없는 감성주의 프리랜서 글쟁이.
인스타그램 @lovelyanna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