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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어비앤비 Nov 04. 2019

베트남 호이안에서 마주한 따뜻한 눈빛들

추운 겨울, 마음을 덥혀 줄 시간


겨울에서 여름으로 날아가다


여름을 찾아 떠난 여행이었다. ‘따뜻한 남쪽 섬나라’라 불리는 제주에 살고 있지만, 겨울에 제주를 다녀간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의 상상 속 그 ‘따뜻한 남쪽 섬나라'는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실제로 제주에서는 겨우내 혹독한 바람이 쉴 새 없이  불어오는 덕에 영상의 온도에도 불구하고 몸과 마음을 한껏 움츠리게 된다.


우리 집이 위치한 모슬포(제주 서귀포시 대정읍에 위치한 포구의 이름으로, 실제 제주사람들 사이에선 대정읍 지역이 '모슬포'라는 지명으로 통용된다.)는 특히나 바람이 많기로 유명한데, 그 겨울바람이 어찌나 악명 높은지, 예부터 ‘못살포(항구)’라 불리다가 ‘모슬포'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는 설이 있을 정도다. 그런 모슬포의 작은 마을 안에 남편 J와 함께 자리를 잡고, 오래된 집을 손수 고쳐 작은 숙소를 운영한 지도 꽉 채운 4년이 되어간다.


우리는 관광업이 비교적 비수기에 접어드는 겨울철에 주로 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유난히 추운 모슬포의 겨울 날씨의 영향으로 우리가 찾게 되는 여행지는 주로 따뜻한 나라들(인도, 태국 등)이다. 1년 365일 24시간을 꼭 붙어있어도 마냥 좋기만 한 신혼의 시간이 지나고, 함께 맞던 4번째 겨울, 우리는 드디어 각자의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오랜만에 오롯이 혼자가 되어 선택한 여행지는 베트남의 ‘호이안(Hoian)’이었다. 덥거나, 덜 덥거나, 조금 덥거나, 아주 더운 곳. 내가 여행하는 2~3월에는 우리나라 초여름에 해당하는 날씨로 매서운 모슬포 바람에 움츠러든 몸과 마음을 쫙쫙 펴서 말리기에 딱 좋은 날씨일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겨울에서 여름으로 날아갔다.


초여름 날씨에 맞는 가벼운 옷가지 몇 벌, 칫솔, 여행용 공병에 덜어 담은 로션, 노트와 펜, 여권, 그리고 비행기에서 읽을 소설책 한 권. 최대한 가볍게 짐을 꾸렸다. 몇 번의 배낭여행에서 깨달은 가장 중요한 점 한 가지는 바로 ‘짐은 가벼울수록 좋다’는 것이었다. 20살, 기차를 타고 내일로 여행을 다니던 때부터 써오던 꽃무늬 배낭을 메고 베트남 다낭의 공항에 도착했다. 작은 규모의 공항 밖으로 나가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한껏 숨을 들이켜는 것이었다. 뜨뜻미지근한 공기가 코를 타고 폐를 가득 채우자, 비로소 내가 그 추운 겨울에서 따뜻한 여름으로 날아온 것이 실감 났다. 공항 게이트에는 에어비앤비 호스트가 예약해 준 픽업 택시 기사님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40분가량을 달려 호이안의 숙소에 도착했다.

▲ 창 밖으로 보이는 푸릇한 식물들과 햇볕이 따뜻한 나라에 도착한 것을 실감나게 했다.



소박한 밥상과 풍성한 마음


마당 텃밭에 고수가 무럭무럭 자라고, 키가 큰 과일나무들이 있는 집에 도착했다. 바나나와 코코넛 야자나무, 그리고 자몽 나무도 눈에 띄었다. 나는 여행을 할 때, 관광이나 휴양보다는 관찰자가 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니까 낯선 곳, 낯선 사람들의 일상을 관찰하는 것, 멀리서 혹은 가까이서 지켜보다가 때로는 그들의 일상에 살짝 발을 담가보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 여행을 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바로 에어비앤비를 이용하는 것이다. 철저하게 개인적 공간으로 나누어진 호텔이나 리조트, 혹은 여행자들이 모여 교류할 수 있는 게스트하우스, 백패커스 형태의 숙소와는 다르게 에어비앤비는 현지 사람들의 일상을 마주하고, 그 일상에 잠시 들어가 볼 수 있는 뜻밖의 순간을 만들어주기도 한다. 그것이 내가 이 고수와 키 큰 과일나무들이 자라는 작은 집을 선택한 이유였다.


그리고 그러한 뜻밖의 순간은 이 집에 도착하자마자 찾아왔다. 젊은 부부와 그들의 어머니, 그리고 어린아이가 함께 사는 집이었는데, 내가 도착했을 때 집에는 어머니 혼자 있었고, 마침 점심시간이었다. 집 근처에 걸어서 갈만한 마땅한 식당이 없었고, 염치 불고하고 혼자 먹을 상을 차리던 어머니의 점심밥을 얻어먹게 되었다. 쑥과 건새우가 들어간 국, 생선구이, 그리고 텃밭에서 뜯어온 채소와 고수로 차려진 소박한 밥상이었다.

▲ 호스트 어머니와 함께한 소박한 밥상

식사를 마치고는 차와 간식도 내어주시고, 마당에서 자란 열대과일도 따다 주신다. 무언가를 자꾸 주신다. 우리네 엄마들은 뭐든 주지 못해 안달이다. 그리고 그 마음은 국적을 불문한다. 나중에는 텃밭에서 자란 작은 고추를 하나 따다 주며 먹어보라 한다. 한 입 깨물었다가 너무 매워서 정말 기절할 뻔했다. 그런 나를 보며 어머니는 배꼽을 잡고 웃는다. 그 상황이 웃겨서 나도 따라 한참을 웃었다.

▲ 정글처럼 보이지만, 숙소의 마당이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 열매를 따는 호스트 어머니

사실 우리는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가 없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베트남어라고는 급하게 외워간 인사말과 “얼마예요?” 정도뿐이었고, 어머니는 영어나 한국어를 전혀 할 줄 몰랐다. 말이 통하지 않아 꽤나 답답했을 법도 한데, 지난 여행에서 즐거웠던 순간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순간이기도 하다. 손짓, 몸짓, 그리고 눈빛으로 대화하던 순간들. 말이 통하지 않아서 오히려 더 자유로워지는 순간들. 오가는 대화는 없어도 소박한 밥상과 풍성한 마음을 함께 나누던 그 순간.




보트 투어


오후의 해가 45도쯤 기울었을 때, 우리는 보트 투어를 하러 나섰다. 집 바로 가까이에 ‘투본(Thu Bồn)’이라 불리는 꽤 크고 긴 강이 흐르고 있었는데, 그 강을 따라서 둘러보는 투어였다. 호스트 부부인 뚜앙(Tuang)과 스프링(Spring), 배를 저어줄 그들의 친구 몇 명과 함께 꽤 낡아 보이는 작은 나무배에 올랐다. 나무배에 ‘코코넛 햇(Coconut Hat)’이라 불리는 광주리 모양의 작은 배를 달고 나가, 강 위에서 옮겨 타고 휘적휘적 노를 저으며 ‘워터 코코넛'이라 불리는 야자나무 사이를 떠다녔다.

▲ 보트 투어 나가는 우리에게 인사를 해주는 호스트 어머니

우리의 뒤쪽으로는 오후의 햇살이 커다란 야자나무 잎 사이로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한동안 바구니 배를 타고 야자나무 사이를 떠다니다가 우리는 다시 나무배로 옮겨 타고 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까지 나갔다. 한쪽에 자리를 정하고, 배 위에서 낚싯줄을 던져 놓고 한참을 기다렸지만 감감무소식이었다. 원래는 낚시를 해서 잡히는 것들을 구워 먹을 계획이었는데, 아쉽게도 잡히는 것이 없어 호스트 부부가 미리 준비한 새우와 생선을 숯불에 구워 먹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들이 미리 저녁거리를 준비해두었던 것을 보면, 아마도 낚시에는 영 소질이 없는 부부인가 보다.)

▲ 보트 투어에 함께한 뚜엉, 스프링 부부와 친구들

어쨌든 배 위에서 먹는 생선구이와 맥주는 참 맛이 좋았고, 우리는 해가 지기를 기다리며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스프링은 아침에 어린 아들을 유치원에 보낸 후, 오전 동안 집 근처의 쿠킹 스튜디오에서 일을 하고, 오후엔 집에 돌아와 손님을 맞이하고, 종종 이렇게 함께 뱃놀이를 나와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꽤나 바쁜 일상에 지칠 만도 한데 그녀는 연신 싱글벙글했다. 아직까지 해외에 나가본 적이 없다던 그녀는 여러 나라에서 오는 많은 여행자들을 만날 수 있어 참 좋다고 했다.


때론 여행하는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자신도 여행을 떠나온 기분이 든다며 싱긋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서로의 별 것 아닌 일상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해가 넘어가고 사방이 붉게 물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강의 물살에 흔들거리며 앉아있자 이내 어둠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나서야 하늘과 강에 반짝거리는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다리 위 가로등 불빛이 강물에 비쳐 반짝거렸다. 아직도 그녀의 수줍은 웃음이 종종 떠오른다.




명절을 준비하는 베트남의 풍경


내가 호이안에 갔던 때는 베트남의 큰 명절인 ‘뗏(Tết)’을 앞둔 시기였다. ‘뗏'은 우리나라의 설과 마찬가지로 음력 정월 초하루, 새해를 축하하는 명절인데, 앞뒤로 짧게는 2주에서 길게는 한 달까지도 기념하는 아주 큰 명절이라고 한다. 이 시기에 베트남 여행을 한다면 며칠씩 문을 닫는 식당이 많아 곤란할 수 있으니 미리 알아두는 것이 좋다. 그래서 보통 이 시기에는 베트남 여행을 피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반대로 이 시기에 여행을 가면 뜻밖의 순간을 만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명절을 축하하는 가족의 식사자리에 초대를 받는다거나, 명절맞이 동네 노래자랑 구경 같은 순간들 말이다.

▲ 명절맞이 가족 식사에 초대받았다. ‘진짜' 베트남 가정식

어느 날엔 호스트 가족의 점심식사에 초대받았다. 새해를 맞이하기 전에 한 해를 잘 마무리하고, 신에게 감사하는 날이라고 했다. 아침부터 주방에서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요란하더니, 가족들은 아침 일찍부터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해 많은 음식을 준비한 모양이었다. 온갖 정성스러운 베트남 요리들로 상이 차려졌고, 가까이에 사는 뚜엉의 형제 가족들도 함께 모였다. 이 날 호스트 가족이 내어준 음식들은 여느 ‘베트남 가정식 식당’이라 불리는 곳에서 사 먹을 수 있는 것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맛이 좋았다. 이게 바로 ‘진짜 베트남 가정식'인 것이었다.


그 날 저녁에는 명절맞이 동네 노래자랑에 함께 구경을 갔다. 뚜엉의 오토바이를 얻어 타고 도착한 곳은 마을회관 같은 건물의 마당이었는데, 한쪽에서는 베트남 전통 먹거리를 만들고 있었고, 가운데 무대에선 베트남 전통의상을 입은 사람들이 한창 노래를 하고 있었다. 큰 행사도 아니고, 마을의 작은 잔치여서인지 구경 온 다른 외국인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베트남 사람들은 대부분 키가 작았고, 비교적 큰 내 키 덕분에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아야 했는데, 힐긋힐긋 훔쳐보기도 하고, 귀여운 K-pop 소녀팬들이 내 뒤에 다가와 수줍게 “안녕하세요"하고 인사하기도 했다.

▲ 명절맞이 동네 노래자랑에서 친구와 함께 노래 부르는 스프링(오른쪽)

베트남 사람들은 대체로 수줍음이 많은 것 같다. 노래자랑에 나온 사람들 대부분이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부르고 반주가 다 끝나기도 전에 수줍게 인사하고 후다닥 내려갔다. 그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럽던지. 스프링도 친구와 함께 노래자랑에 참여해 무대에 올라왔다. 내 생각엔 모든 참가자들 중에 그녀가 가장 잘 부르는 것 같았는데, 아쉽게도 1등을 하진 못했다. 어린 소녀들 대여섯 명이 전통의상을 입고 올라와 전통춤을 선보이기도 했는데, 우리나라의 부채춤과도 비슷해 보였다. 그 날은 밤이 늦도록 함께 구경하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이 집에서 머무는 마지막 밤이었다.


다음 날 아침엔 어김없이 주방의 달그락 거리는 소리, 아이들 소리, 닭 우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베트남식 커피와 스프링 롤을 아침으로 먹었다. 베트남 커피는 핀(Phin)이라 불리는 자그만 드리퍼에 커피 가루를 넣고 뜨거운 물을 양껏 부은 다음 '똑. 똑.' 하고 수도꼭지를 꼭 잠그지 않았을 때 물방울이 '똑. 똑.' 하고 떨어지는 속도로 내려지는 커피를 기다렸다가 컵에 미리 부어두었던 연유와 섞어서 마신다. 그렇게 나오는 커피는 매우 쓴데, 연유와 함께 마시면 우리나라 다방 커피처럼 부드럽고 달달해진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매일 아침 베트남식 커피를 마셨는데 나는 그 커피의 맛보다는 물을 부은 후 커피가 모두 내려지길 기다리는 그 시간을 참 좋아했다. 이 집에 머무는 동안 나는 특별히 ‘무언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 베트남식 커피를 내려 마시고, 좋아하는 작가의 소설 단편을 읽거나, 가벼운 요가를 하고, 낮잠을 자는 것이 여행 속 나의 작은 일상이었다.


때때로 가족의 식사에 초대받거나, 함께 뱃놀이를 나가거나, 동네 노래자랑에 따라가 구경을 하는 것, 명절이 가까워 조금은 들떠있는 집 안의 공기를 느껴보는 것은 전혀 계획된 것이 아니었으나 나의 여행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주었다. 꼬맹이들에게 세뱃돈으로(세배를 받진 않았지만, 베트남에서도 새해 명절에 어린이들에게 용돈을 주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한국돈 1,000원짜리를 한 장씩 쥐어 주고, 다음에 꼭 다시 만나자 약속하며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호이안 구시가지, 활기차고도 고즈넉한 


차로 고작 10분 정도 달려왔을 뿐인데, 분위기가 이렇게나 달라지다니 깜짝 놀랐다. 차분하고 평화로웠던 공기는 온데간데없고, 한껏 들뜨고 분주한 공기로 가득한 호이안 올드타운 한복판에 도착했다. 길에는 차, 오토바이, 사람들이 바쁘게 오가고 있었다. 호이안은 베트남의 오래된 항구마을로, 15-19세기 동안 동남아시아의 무역항으로서 활발한 역할을 했고, 그에 따라 베트남과 일본, 중국, 그리고 유럽 등 여러 나라의 문화가 복합적인 형태로 나타난 무역항 마을의 모습이 잘 보존되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 호이안 올드타운의 오래된 건물의 빛바랜 기와지붕과 붉은 꽃

실제로 마을 안에는 오래된 목조주택들이 본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 마을에 들어서면 아주 오래된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현재는 관광지로 너무 유명해지는 바람에 마을의 오래된 건물 안에는 관광객들을 상대로 하는 식당이며 카페, 테일러샵, 기념품샵 등이 많이도 들어서 있다.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 그대로인 것들과 변해가는 것들, 그곳이 삶의 터전인 사람들과 오가는 여행자들이 한데 뒤섞여 만드는 특유의 분위기가 우리나라 전주의 한옥마을과 많이 닮아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오래된 건축물, 오래된 마을의 분위기가 그대로 지켜지지 못하고 그저 관광지로만 소비되는 현실이 좀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지금은 다른 의미로 분주한 마을이 되었지만, 관광객들 속에 섞여 걸으며 무역항으로서 짐을 싣고 나르며 여러 나라 사람들이 오고 갔을 예전의 분주한 호이안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 밤이 되면 화려하게 불을 밝히는 올드타운

여행을 떠나오기 전에 호이안에 대해 알아보았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쇼핑을 하고, 야경을 보기 위해 당일치기나 1박 정도의 일정이 적당하다고 하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인지 실제로 오후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밀물처럼 몰려오는 것 같았다.


해가 지고, 강 위에 소원초가 하나 둘 별처럼 떠오르기 시작하는 시간이 되면 올드타운과 강가는 혼돈의 장이 된다. 가족여행으로 한껏 들떠있는 관광객들과 온갖 말들로 호객하는 뱃사공들, 사고파는 사람들의 흥정하는 소리가 뒤섞여 시장통 한가운데에 서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이른 아침이나 낮시간의 투본강은 전혀 다른 세상이 된다. 하루는 강가의 벤치에 자리를 잡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 생각해보면 호이안에서 보낸 며칠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순간은 이 강가에 앉아서 보낸 시간이었다.


가만히 앉아 강물과 함께 천천히 흐르는 풍경을 바라보다가 좋아하는 책을 읽고, 또 강 건너를 바라보았다. 무엇이 그리 좋았을까 생각해본다. 호이안에 다녀가는 모두가 알고 있는 그 요란하고 분주한 풍경이 아닌 조금 느긋하고 조용한 그곳의 풍경을 바라본다는 것이 좋았던 것 같다. 마치 나만 아는 풍경을 하나쯤 갖게 되는 것 같달까. 저녁이 되면 사람들과 그들의 소원을 실어 나르느라 바쁠 작은 목선들이 나란히 줄지어 서있었다.


강 건너에는 오래되어 빛바랜 기왓장을 얹은 노란색 건물들을 배경으로 양산을 쓰고 느릿느릿 걸어가거나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손님이 없는 한가한 시간에 가게 앞 의자에 앉아 쉬고 있거나, 장사를 준비하는 상인들의 모습도 보였다. 누군가의 평범한 일상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특별한 풍경이 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이른 아침 여행지의 작은 골목길을 산책하는 것도 나만 아는 특별한 풍경을 갖게 되는 좋은 방법이 된다. 호이안의 골목은 유난히도 좁은데, 그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이른 아침 집 앞 길을 빗자루로 쓰는 베트남 아저씨의 모습, 등굣길에 마주쳐 “신짜오!”하며 인사해주는 아이, 명절을 맞아 집집마다 문 앞에 놓은 금귤 나무와 같은 너무나 평범하고 너무나 특별한 풍경을 만날 수 있다.

▲ 낮에는 비교적 한산한 올드타운 강가에 앉아 사람들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다.

새로 옮긴 에어비앤비 숙소는 올드타운에서 느린 걸음으로 20분가량 떨어진 조용한 골목에 위치해 있었다. 20대 초반의 젊은 여자 호스트 둘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스프링 가족의 집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는데, 내가 좋아하는 보헤미안 풍의 인테리어와 자유로운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 보헤미안풍 인테리어가 마음에 들었던 두번째 숙소. 마당의 나무벤치에 앉아 쉬던 시간이 그립다.

호스트 미아(Mia)와 빌리(Billy)는 친구 사이로 원래 고향은 베트남 남쪽인데, 호이안을 여행하다 반해서 이곳에 살며 에어비앤비를 운영하게 되었다고 했다. 제주가 좋아 제주에 살면서 작은 숙소를 운영하고 있는 나와 비슷했고, 우리는 통하는 부분이 많아 매일 밤 같이 와인을 마시며 많은 얘기를 나눴다. 함께 기타를 치고 노래도 부르며 며칠 밤을 보내니 우리는 제법 가까워졌다. 한국 드라마를 좋아하는 그녀들은 나를 ‘언니'라고 불렀고, 나에게는 귀여운 베트남 여동생이 둘이나 생겼다. 그녀들이 한국에 오면 꼭 우리 집에 머물기로 했는데 그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한마디 말보다 따뜻한 눈빛

 

구시가지의 복잡함과 소음에 지쳐있던 나에게 호스트 미아가 한 찻집을 추천해줬다. 찻집은 올드타운 안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바쁘고 소음 가득한 거리에서 단 한 발자국 들여놓았을 뿐인데 또다시 빠르게 공기가 바뀌었던 것을 기억한다. 'Reaching Out Tea House'라는 이름의 그 찻집은 청각장애인들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 Reaching Out Tea House.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찻집

찻집에 들어서니 우선 따뜻한 시선으로 인사를 건네고, 손가락으로 인원을 표시하니 편한 자리를 안내해주었다. 주문을 할 때는 종이에 적어서 하고, 필요한 것이 있을 때에도 종이에 적거나 ‘bill’, ‘cool water’, ‘thank you’와 등 글자가 적힌 나무 블록을 이용해서 의사를 표현한다. 찻집 안 곳곳에 자리한 손님들도 조용히 책을 읽거나, 소곤소곤 속삭이듯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찻집. 미아가 왜 내게 이곳을 추천해주었는지 알 수 있었다. 요란한 바깥과는 달리 고요하고 평화로운 세상이 그 작은 찻집 안에 펼쳐지고 있었다.


주문을 할 때나, 부탁할 때에 종이와 함께 자연스레 시선이 오고 가게 되는데, 그 정직하고도 따뜻한 눈빛이 잊히지 않는다. 말 한마디 꺼내지 않아도 주고받는 눈빛만으로 충분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성급히 내뱉은 말들이 허공을 떠다닐 때, 얼마나 위험한 무기가 될 수 있는지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롱차와 스낵세트를 주문해 먹었다. 이곳 주방에서 직접 만든 과자와 지역에서 자란 차, 커피 등을 판매하고 있었다. 고요한 그곳의 분위기가 맘에 들어 한참을 앉아있었다. 계산을 하면서 ‘thank you. 고맙습니다.’라고 적은 쪽지를 수줍게 전하고 다시 시끌벅적 요란하지만 기운찬 세계로 나섰다.

▲ 찻집 곳곳의 사람들도 조용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호이안은 관광과 휴양지로 유명한 곳이지만, 나는 ‘여행자'들에게도 이곳을 추천하고 싶다. 겉보기엔 요란하고, 불을 밝힌 등불로 화려해 보이지만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조용하고 평화로운 강가 마을이 있고, 평범한 베트남 가족의 일상에 함께할 수도 있다. 많은 관광객들로 시끌벅적하지만 그 덕분에 활기차고 들뜬 분위기를 즐길 수도 있고, 때론 그 속에서 아침 골목길 산책 같은 느긋하고 고즈넉한 순간을 만날 수도 있다.


비싼 값을 부르며 바가지 씌우려는 장사꾼들 때문에 기분이 나빠질 때도 있지만, 수줍게 인사를 건네는 따뜻한 사람들 덕분에 그날 하루가 전부 아름다워지기도 한다. 사실 그저 추운 겨울 날씨를 피해 도망치듯 떠난 여행이었는데, 따뜻한 여름의 공기 말고도 그곳에서 얻어온 것들이 참 많다. 차곡차곡 잘 모아두었다가, 견디기 힘든 바람이 불어오는 어느 겨울날에 다시 꺼내서 어루만져야겠다. 마음마저 따뜻해질 것이다.




에어비앤비 작가, 박다비

남편과 제주 조용한 마을의 오래된 집을 손수 고쳐 작은 숙소를 운영 중. 오래된 집을 손수 고치는 과정과 머무는 시간을 담은 책 <오래된 집에 머물다>를 썼다.

인스타그램 @broadleaved_ho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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