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올리언스의 재즈, 워싱턴 DC의 미술관, 그리고 시카고의 초록빛 공원
“잘 쉬었어요?”
주말을 마치고 동료들과 다시 만나는 월요일 아침이면 “굿모닝?”과 함께 꼭 묻게 되는 말이다.
한 주간 열심히 달리고 주말은 내게 숨을 쉬는 시간. 나는 요즘 소위들 말하는 좋은 여행플래너는 아닌 게 분명하다. 각종 맛집이나 포토존으로 유명한 관광명소를 SNS상에 #(해시태그)로 올려두거나, 혹은 그런 해시태그를 찾아 돌아다니는 부지런한 여행자와는 거리가 멀다는 소리다. ‘바쁜 사회생활이나 삶에 찌들고 지친 건가?’ 싶기도 하지만 되돌아보면 파릇했던 20대 때 열심히 세계 곳곳을 돌아다닌 여행이나 대학 MT 때도 난 부지런히 목록을 적어가며 준비하던 발 빠른 여행자는 아니었던 기억이 난다. 원래 내 여행 스타일 자체가 빡빡한 일정을 채워나가기보다는 쉬엄쉬엄 숨을 쉬어가는 여행을 선호해왔다.
예상대로라면 올해 2019년 하반기 즈음으로 계획했던 2주간의 미국 출장이 2018년도 가을로 앞당겨져 일정이 변경되었다. 작년 지독하게도 덥디 더웠던 여름에 몰아쳤던 바쁜 일정들로 휴가도 그 해 하반기로 미루려던 참에 “이렇게 된 거 가을 미국 출장 전, 후로 1~2주 개인 휴가를 더 붙여서 미국 여행이나 하고 와야겠다.” 그렇게 나의 게으른 여행 계획은 하나씩 플래너에 끄적여지기 시작했다.
입사 직후 다녀왔던 워싱턴 DC 첫 출장에서는 군기가 바짝 들어 여유롭게 짬을 내지 못하고 빠듯하게 다녀온 기억이 있다. 그 덕분에 그 유명한 스미소니언 박물관(Smithsonian museum)이나, 국립미술관 (National Gallery of Art) 모두 무료입장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곳 하나 제대로 둘러보지도 못 한 채 돌아와야 했고, 늘 미련이 남아있었다.
이번엔 출장 전 일주일 정도 미리 워싱턴 DC에 도착해 한 주간은 오롯이 DC 구경에만 집중하고 싶었다. 많고 많은 박물관들을 다 섭렵하진 못 하더라도 국립미술관이라도 제대로 관람해보겠다는 마음이다. 그리고 한 군데 더, DC로 입성하기 전에 내가 좋아하는 재즈의 도시. 블랙 가스펠의 본고장 미국 남부의 ‘뉴올리언스’를 들르기로 마음먹은 것도 출발 며칠 전 정해진 일이기도 하다. 내 출장이 그리 잡혔듯, 그리고 지금껏 내 인생이 그리 흘러왔듯, 이번 미국 여행도 그렇게 계획하지 않은 대로 흘러갔다.
평소 재즈음악을 즐겨 듣는다. 소싯적엔 흑인 블랙가스펠에 한창 꽂혀 헤리티지 가스펠 스쿨에서 수업도 듣고 공연도 참여했던지라 내게 재즈의 본고장 ‘뉴올리언스’는 마치 성지순례와 같은 곳이었다. 미국 현지인들도 자주 가는 여행지가 아니기 때문에 미국 내 항공편이 많지 않았고 특히 날씨 영향을 많이 받는 지역이라 뉴올리언스로 가는 첫날부터 순탄치는 않았다. 내가 뉴올리언스로 향하는 날도 폭풍우가 몰아쳐 8시간이나 항공편이 지연되는 바람에 한밤 중에 도착해 미리 예약해둔 에어비앤비를 찾는 건 난항이었다.
다행히 안전하게 잘 도착했으나 다음 날 해가 뜬 뉴올리언스의 아침 풍경을 둘러본 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뉴올리언스는 미국 내 '길거리 음주가 허용되는' 몇 안 되는 도시 중 하나라서 밤, 낮 가릴 것 없이 취객들이 길거리를 배회하고 다닌다는 걸 몰랐다. 뉴올리언스에서 에어비앤비를 이용하고자 한다면 인적이 드문 곳이 아닌, 다운타운에 가까운 곳을 추천한다.
내가 예약했던 에어비앤비에 머문 동안은 다행히도 예약자가 나 혼자여서 집 하나를 통째로 빌린 듯 편히 이용할 수 있었고, 매년 화려하게 열리는 뉴올리언스 정통 가면무도회 축제 '마디 그라(Mardi Gras)' 때마다 집주인이 직접 만들어 사용했던 화려한 가면들이 집 안 곳곳에 놓여있었다. 내가 여행한 기간은 가을이라 마디그라 축제(매년 2~3월 경)를 직접 경험할 수는 없었지만 에어비앤비의 최대 장점 중 하나라면, 현지 주민들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이런 간접 경험이 아닐까?
SNS를 통해 평소 팔로우하고 있던 뉴올리언스 현지의 한 작은 현지 교회를 찾아가 주일 예배를 드렸다. 흑인 성가대원들의 평균 연령이 60~70세는 되는 듯 보였다. 한 손에는 탬버린도 끼고 마치 예배를 넘어서 파워풀한 라이브 공연을 현장에서 보는 듯한 감동으로 중간중간 울컥하기도 했다.
예배 중에 사진 및 영상 촬영은 허용되지 않았으나 나처럼 예배 30분 전쯤 미리 도착해 예배당에 들어가 보면 성가대의 연습장면을 관람할 수 있으니 뉴올리언스를 여행할 계획이 있다면 꼭 현지에서 주일 예배를 경험해 보길 추천한다. 흑인 소울이 온몸으로 느껴지는 진정한 블랙가스펠 성가대의 실황을 들을 수 있을뿐더러, 예배당을 찾은 관광객들을 위해 우리가 잘 아는 익숙한 가스펠 찬양을 한 두 곡 정도 특별 서비스로 들어볼 수도 있으니 말이다.
재즈의 성지라 불리는 ‘프리저베이션 홀(Preservation Hall)'에서 재즈 공연을 보지 않고 왔다면 뉴올리언스에 다녀왔다고 말하지 않기! 모든 연령대의 관객을 수용하는 이 작은 라이브 공연장은 갓난아기의 울음소리 조차도 현장에서 재즈 공연으로 승화시키는 진가를 보여준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작은 규모의 라이브 재즈 홀은 20~30명이 겨우 들어갈 법한 작은 규모의 소극장이다. 바닥에 앉든, 장의자에 앉든 옹기종기 모여 앉아 전율이 느껴지는 재즈 공연을 코 앞에서 ‘온몸으로’ 들을 수 있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뉴올리언스의 여행이 즐거울 수밖에 없다. 길거리나 일반 카페 어디서든 누군가는 악기를 연주하고 있고, 누군가는 눈을 지그시 감고 경청하는 모습이 자연스럽다.
작은 카페에 들어갔다. 뉴올리언스의 정통 디저트 중 하나인 달달한 도넛인 베넷(Beignet) 한 접시와 따뜻한 라테 한잔 마시러 들른 이 카페에는 중절모를 눌러쓴 어느 노신사가 기타를 연주하고 계셨다. 할아버지의 기타 연주가 카페의 음악을 대신하고 있었는데 누구든 자유롭게 할아버지께 신청곡을 요청할 수도 있었고, 나갈 때는 1달러 내지는 동전 몇 개를 감사의 뜻으로 내고 가는 손님들도 있었다. 멀찌감치 앉아 노신사의 기타 연주를 듣던 중에 어떤 손님이 음악을 다 듣고 나서며 할아버지께 감사의 뜻으로 50달러인지, 100달러쯤 되는 지폐를 두고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자 그는 음악을 멈추더니 “나는 그저 연주하는 게 즐겁습니다. 누구든 기분 좋게 내 음악 들으면서 잘 쉬고 간다면 난 그걸로 충분합니다. 이 돈은 내게 너무 과해요.” 정중하게 그 돈을 손님에게 돌려주시는 모습은 내게 신선했다.
할아버지의 음악은 세련되진 않았지만 장르를 불문하고 다채로웠다. 80-90년대 팝송도 재즈도. 혼자 카페에 앉아 달달한 도넛과 진한 커피를 마시면서 할아버지가 라이브로 들려주신 토니 브랙스톤(Toni Braxton)의 낯익은 팝송을 듣고 있자니 마음이 말랑해지며 나도 모르게 울컥해지는 순간을 여러 차례 느꼈다. 뜨거운 여름에 더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내가 중고등학교 때 고민 많고 멜랑콜리하던 마음의 사춘기 시절 한 줄기 위로였던 그런 음악을 이 순간 먼 미국 땅에서 듣고 있는 그 순간이 그저 행복했다.
그래서 마음이 울컥했는지도 모르겠다. 음악을 다 듣고 나오며 할아버지께 좋은 음악 연주해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남기고 나오면서 내가 갖고 있던 지폐 중 가장 숫자가 크게 적힌 지폐 한 장을 슬쩍 두고 나왔다. 뉴올리언스에서 내가 누린 가장 평온했던 순간을 감히 한 장의 지폐로 값어치를 따질 수 없을 정도였다.
뉴올리언스에서의 마지막 하루가 남았다. 책을 몇 권 가지고 나가 이어폰을 꽂고 미시시피 강변 벤치에 앉아 날이 저물 때까지 온종일 누워 책을 읽고 음악을 듣는 것으로 뉴올리언스의 여행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배가 고프다 싶으면 미리 챙겨간 샌드위치 하나를 꺼내 먹고, 다시 벤치에 누워 햇볕을 쬐면서 책도 보고 음악을 들으며 시간을 보냈다. 흔히 요즘 하는 말로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아 보이지만 나는 제대로 자연을 숨 쉬며 휴식을 만끽했다. 쉼이었다.
뉴올리언스를 떠나 출장지이기도 한 미국의 수도, 대도시 워싱턴 DC에 입성했다. 어차피 2주간의 출장기간 동안에는 회사에서 제공하는 호텔에서 머물 예정이기 때문에 한 주간 여행 목적으로 머무는 동안에는 외곽도시 버지니아의 한적한 주택지역에 위치한 에어비앤비에서 1주일간 머물기로 했다. 여행 때마다 그 지역특성이나 여행의 목적에 따라 어떤 집에 머물지 고심하게 된다. 이번 DC에서는 출장 전에 한 주간을 오롯이 잘 쉴 수 있는 조용한 곳을 원했다. 여행지에서 아침식사를 챙겨 먹는 건 내게 아주 큰 즐거움이기 때문에 간단한 요리를 해 먹을 수 있는 부엌이 있어야 하고, 지난번에 가보지 못했던 시내의 미술관과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자주 가볼 생각이라 대중교통편 접근성이 좋은 곳으로 택했다.
그렇게 찾은 곳이 이 집, 호호 할머니 댁이었다. 인근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오랜 기간 가르치신 후 은퇴하셨다는 프랜(Fran) 할머니. 어릴 적 내가 즐겨보던 애니메이션 ‘호호 할머니’를 닮은 정겹고 푸근한 인상의 할머니였다.
워싱턴 DC에 머무는 동안 미술관을 여기저기 둘러볼 계획이라고 말씀드렸더니 할머니는 주방에 걸려있던 액자를 꺼내 보여주셨다. 남편 되시는 분이 돌아가신 후 적적한 마음에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며 보여주신 할머니의 그림들은 수준급이었고 집안 곳곳에 할머니의 그림 작품이 놓여 있었다. 덕분에 워싱턴 DC의 국립미술관 외에도, 할머니가 추천해주시는 작고 아담한 현지 미술관과 갤러리들을 곳곳에 보러 다녔다.
내게 구글맵이 있으니 미술관과 갤러리 이름만 알려주시면 쉽게 검색해 찾아갈 수 있다고 해도, 할머니는 아침식사를 먹으며 미술관의 위치를 냅킨에 정성껏 그려가며 소개해주셨다. “원, 이 전철역에 내려서 좌측을 보면 두 번째 건물에서 뒤를 돌아 빨간 벽돌 건물이 보일 거야. 쭉 걸어가다 보면 여기 이 건물이 보여…(중략)” 냅킨에 약도를 그려가며 설명해주실 때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그림이었지만, 나중에 찾아가 보면 구글맵만큼이나 놀랍게도 정확한 프랜 할머니표 손글씨 약도였다. 예전에 아쉬웠던 만큼이나 국립미술관에도 일주일 내내 거의 매일같이 메트로 전철을 타고 찾아가 미술작품을 관람하는 걸로 일정을 시작하곤 했다.
정해진 특정 시간도, 일정도 없는 자유로운 여행이었다. 아침을 집에서 간단히 챙겨 먹고 작은 우산 하나와 카디건 하나 챙겨 나와 곳곳의 미술관을 둘러보고 종일 걸었다. 그렇게 걷다가 목이 마르면 물 하나를 사서 마시거나 커피를 마시고 배가 출출하면 현지 식당에 들어가 배를 채웠다. 그렇게 잘 걸어 다니고 숙소에 돌아와 하루를 정리하며 음악을 듣는다. 디씨 외곽 한적한 주택지에 위치한 프랜 할머니의 집은 밤이 되면 지나다니는 차도 없고 곤충소리가 들릴 만큼 고요했다. 그래서인지 서울에서는 불면증으로 하루하루 선잠을 자던 나는 마치 어린아이가 통잠을 자듯 꿈 한번 꾸지 않고 매일 아침마다 개운한 꿀잠을 자고 일어날 수 있었다.
출장 전까지 머문 동안 충분한 쉼을 얻고 곧바로 이어진 2주간의 업무 출장에 집중할 수 있어 감사했다. 몇 개월 전에도 한국인 여행객이 업무 출장으로 할머니 댁에서 에어비앤비로 머문 적 있다는 얘기에 얼마나 더 많은 한국 여행자들이 같은 공간에 머물지 모르지만 내가 갖고 있던 몇 권의 국문 소설책을 할머니 댁 거실 책장에 꽂아두고 왔다. 내가 얻은 휴식과 평안함을 그분들도 누릴 수 있기를 소원하는 마음으로.
앞으로 미국 동부지역을 언제 또 오게 될지도 모르고, 무엇보다도 꼭 보고 싶은 몇 가지가 있어 화려한 도시 시카고에 단 2~3일이라도 들르기로 일정을 변경했다. 어느 도시보다 설레었다. 작년 여름 2018년 7월 코엑스에서 열린 ‘PLAS (조형아트서울) 2018’ 전시회에 업무차 들른 일이 있다. 신선하고 재미있는 작품들이 많았지만 그중 내 눈을 사로잡은 낯익은 조형물이 하나 있었다. 시카고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프랑스 작가 조르주 쇠라(Georges Seurat)의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Sunday Afternoon on the Island of La Grande Jatte)’ 작품이었다.
점을 촘촘히 찍어 전체 그림을 점묘법으로 그려낸 이 작품의 일부를 하얀 캔버스가 아닌 3D 실제 형상으로 재현해낸 작품이었다. 세라믹 구슬 하나하나를 둥글게 빚어 마치 캔버스에 점묘법으로 찍어내듯 3D형식으로 고스란히 되살려두었다. 전시회 현장에서 만난 차형록 작가는 이 작품을 수년에 걸쳐서라도 오른쪽 작품 원본처럼 전체 그림을 3D로 재현해 내는 것이 최종 목표라고 했다. 세라믹 구슬 하나하나를 붙여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낸 이 작품을 보며 예술가의 고뇌와 인내심에 존경심이 느껴졌다.
차형록 작가의 열의를 끄집어낸 쇠라의 원본을 직접 보고 싶을 만큼 궁금증을 자아내는 작품이었다. 시카고 미술관,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주말을 끼고 단 3일간 짧은 시간이라도 시카고를 들르기로 했다. 시카고 미술관을 하루 일정으로 관람하겠다는 내 계획 자체가 얼마나 스스로 무지했던 건지. 미국의 3대 미술관 중 하나인만큼 봐야 할 유명 작품들이 워낙 많고 방대하기로 유명한 이 곳은 하루 종일 미술관에만 있어도 턱 없이 부족한 일정이었다.
워낙 웅장하고 화려한 시카고의 스카이라인을 '아름답다'라고 표현하기에는 나의 표현법에 한계가 있다. 화려한 빛으로 물든 듯한 시카고의 야경은 여행했던 다른 어떤 도시와 비교가 안 될 정도였으니까. 다만 내 눈에 들어오고 내 마음속 깊이 기억에 남는 시카고의 풍경은 이런 빛의 화려함이 아니었다. 시카고 미술관에서 나와 조금 걷다 보면 도시 중심부에 작은 공원이 하나 있었다. 그 공원 안을 조금만 더 걸어 들어가면 공원 안에 또 다른 작은 공원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애견 공원 (Pet Park), 반려견이 마음껏 뛰놀 수 있게 만들어둔 공원 속의 미니 공원이었다. 화려한 네온사인과 야경 빛으로 물든 도심 속에서 만난 초록빛이었다.
다소 삭막해 보이고 낯선 도심 한가운데서 맛볼 수 있는 자연 속의 평안함과 설렘. 서울이라는 대도시에서 자라왔기 때문에 나도 대도시의 화려함에 익숙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내가 익숙함과 쉼을 느끼는 순간들은 도시 틈틈이 숨겨져 있는 초록빛 자연 속이었던 모양이다. 다른 도시들보다 머문 시간이 짧아서였을까. 머물렀던 다른 도시들보다 이 초록빛 속에서 느낀 설렘이 크게 와 닿았다. 내가 잠시 멈춰서 숨 쉬고 머물다간 시카고 그곳에서 함께 숨 쉬던 이들도 내가 느꼈던 것과 똑같은 여유로움과 평안함, 설렘을 고스란히 함께 느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작년 가을 그렇게 미국의 몇 개 도시를 여행하고 서울로 돌아와서 가장 먼저 찾아본 게 있다. 한국의 국립미술관이 궁금해졌다. 미국에서 머물렀던 도시들마다 내가 방문한 미국 국립미술관들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국립’이라는 타이틀이 붙는 공공기관은 왠지 모를 고리타분한 분위기와 회색 빛깔이 왜 자꾸 떠오르는 건지 모르겠다. 미국 여행 전에는 보통 서울의 작은 갤러리나 사립 미술관을 주로 찾았었는데, 국내 국립미술관은 어떤 방식으로 미술전시가 되어 있는지 알고 싶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서울관, 덕수관, 과천관, 청주관까지 총 4 개관이 운영되며, 다채로운 전시와 소장품전이 진행되는지도 이제와 서야 알게 되었다. 조금 더 관심을 갖고 자주 방문하려는 마음에 국립미술관에 연간회원권을 구입할 계획이었다. 그러던 참에, 누가 인생은 타이밍이라고 했는지! 연초에 맞춰 국립미술관의 다양한 자문을 해줄 60여 명의 고객자문단을 모집 중이었다. 미국 여행 중 내가 만났던 다양한 도시의 미국 국립미술관 방문 경험들을 녹여내 2019년 초부터 올 한 해 동안 국립현대미술관의 고객자문단으로 열심히 활동 중이다.
내가 그동안 관심 갖지 못했던 국립현대미술관과 그 소장품들을 다양한 각도로 들여다볼 기회가 주어져 감사하고, 목소리를 내는 만큼 발 빠르게 조언과 지적을 받아들여 개선해가며 변화되어 가는 과정도 참 신선하다. 마음껏 숨 쉬고 휴식을 취할 수 있었던 시간도 감사했는데, 그 덕분에 평소 관심 갖고 있던 미술분야에 한 걸음 더 다가갈 기회가 주어져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하다.
내게 “잘 쉬었냐”라고 묻는다면 “숨을 얼마나 잘 쉬었느냐”는 물음으로 들린다. “네, 숨 잘 쉬고 왔어요. 숨이 채워졌어요. 다시 일어나 달릴 수 있을 만큼.” 내겐, 이것이 여행이다. 숨을 충분히 잘 쉬고 오는 일. 작년 이맘때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던 그 무렵, 내가 숨 쉬며 머물렀던 미국의 도시 한 곳 한 곳이 바로 내게 그런 여행지였고, 그 여행기록들로 가득한 페이스북 알림은 ‘작년의 오늘’ 내가 올려둔 여행사진들로 내게 계속 상기시켜주고 있다. 올해도 아직 긴 휴가를 다녀오지 않았다. 어디로 가서 또다시 재충전을 하며 마음껏 숨을 쉬고 올지, 예상하지 못할 어떤 새로운 일들을 만나게 될지.
예정에 없이 한 해 앞당겨 다녀온 미국 여행이나, 그 여행길에 숨 쉬며 만나고 경험한 시간들을 떠올려보면 우리네 인생은 예상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다. 내가 미국 여행길에 오르기 전 내 가장 친한 친구가 내게 보내줬던 빨간 머리 앤의 이런 멋진 구절이 내 2018년 여행을 한마디로 요약하는 듯싶다.
“엘리자가 말했어요! 세상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 정말 멋져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나는걸요.”
문원. 이름만 들어서는 여성인지 남성인지 알 수 없는, 짧고 간단한 본인의 이름을 애정 한다. 어릴 때는 단순히 외우기 쉬운 한자 ‘원(元)’이 좋았지만 살아낼수록 한 글자에 담긴 무게가 느껴지는 이름이라 더 감사하고 있다. 잘 살아내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감사함으로 채워져 가는 건 분명하다. 앞으로도 그럴 거라 믿기 때문에 내게 주어진 시간에 소홀할 수 없기도 하다. 뛰어나지 않은 덕분에 주어진 모든 것에 충실하게 살아내고 있으며, 현재는 외국 정부기관에서 이름값을 하려 감사히 살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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