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순이가 꿈꾸던 일상을 실현하는 여행
익숙한 공간에서 느끼는 고립감은 사람을 주눅 들게 하지만, 새로운 공간에서의 생경함은 오히려 알 수 없는 에너지를 준다. 꽤나 많은 나라를 혼자 여행하며 얻은 깨달음이다. 그래서인지 현실에서 골치 아픈 일이 생길 때면 늘 어디론가 떠나게 된다. '일상은 상처가 많은 공간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호캉스를 가는 것 같다.'는 김영하 작가의 말처럼, 새로운 공간에서는 고단함 조차 낭만과 추억으로 포장되기 마련이다.
처음 포르투갈(Portugal) 여행을 결정했을 때, 나는 조금 지쳐 있었다. 실제의 세상은 상상보다 훨씬 작다고 했던가, 네덜란드 교환학생 생활은 내가 예상한 것과는 사뭇 달랐다. 매일 춥고 바람이 불었으며, 나를 아껴주는 가족과 친구와 떨어져 있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나를 매섭게 파고들었다. 유럽에서도 온종일 침대에 누워 우울을 곱씹고 있는 내 자신이 마음이 들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유럽으로 떠나기만 하면 기분도 생활도 달라질 것 같았는데,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고 나니 다시 무기력하고 우울했다. 햇살이 따뜻한 곳, 새로 적응할 곳이 필요했다.
그런 점에서 포르투갈은 완벽한 여행지였다. 익숙한 중부 유럽과 분위기, 문화가 다르면서도 날씨는 훨씬 따뜻한 편이었고, 근처의 스페인까지 함께 여행할 수 있었다. 여느 때의 여행과 차이점이라면, 처음으로 에어비앤비를 예약한 것이었다. 호스텔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부대끼며 긴장하기엔 기력이 없었고, 호텔은 너무 외로울 것 같았다. 혼자 여행하는데 처음으로 에어비앤비를 이용하게 돼 조금 걱정되었던 것도 있었다. 그러나 애플리케이션에서 확인할 수 있는 자세한 후기들과 구체적인 집안 사진들을 살펴보고 리스본(Lisboa) 시내 외곽에 위치한 마리아(Maria)의 집을 선택했다.
처음 리스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진 저녁 무렵이었다. 비포장의 울퉁불퉁한 벽돌 바닥 위로 겨우 캐리어를 끌고 집을 찾아 헤맨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혹시 다른 집으로 왔을까 봐, 호스트가 집에 없을까 근처를 뱅뱅 돌다 초인종을 눌렀다. 걱정과 달리, 사진과 똑같이 생긴 호스트가 금세 내려와 캐리어를 2층까지 옮겨주었고, 서투른 영어로 집안을 소개해주었다. 외국인의 가정집에 들어간 게 처음이라 어색했지만, 내가 머무를 방의 환한 민트색 벽지와 쌓여 있는 푹신한 쿠션들, 예쁜 조명을 보자 긴장이 금세 풀렸다. 방에는 작은 발코니가 딸려 있었는데, 양 쪽에 달려 있는 발코니의 나무 문을 열어젖히자 가로등 빛이 방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발코니에서는 문을 닫은 식료품 가게들, 불이 꺼진 주택가들이 보였다. 특별한 관광지에 가지도, 맛집에 간 것도 아닌데 벌써 리스본이 마음에 들었다. 리스본에 있는 내가 좋았다.
다음날 눈을 뜨니 호스트들은 모두 출근한 뒤였고, 호스트들이 키우는 고양이만 의자 위에 올라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집 근처 과일 가게에서 딸기를 사서 거실에서 조금 뒹굴 거리다, 리스본 벨렘 지구에 위치한 유명한 에그타르트 맛집, ‘파스테이스 드 벨렘(Pastéis de Belém)’으로 향했다.
포르투갈을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방문한다는 에그타르트 가게 ‘파스테이스 드 벨렘’은 에그타르트뿐만 아니라 여러 페이스트리 종류도 판매하고, 소문대로 사람들이 쉬지 않고 드나들었다. 나는 내부를 장식하고 있는 예쁜 파란색 타일 쪽을 마주 보고 앉아, 혼자 에스프레소와 에그타르트 두 개를 주문했다. 마침내 나온 음식들을 보며 나도 모르게 ‘이걸 다 먹으면 얼마나 살이 찔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옆 자리에 앉은 서양인 여자 두 명이서 “I’m ready for the calories!(살찔 준비 됐어!)”라고 유쾌하게 외치는 걸 듣게 되자 마음이 놓였다. 그래, 여행에서 먹는 건 살이 안 찌는 법이야.
여행을 할 때 까다로운 편은 아니다. 그러나 맛있는 음식과 커피는 어디에서나 반기지 않을 수 없다. 이 두 가지 기쁨을 한 자리에서 누릴 수 있는 ‘파스테이스 드 벨렘’에는 주말, 성수기 때는 가게 밖까지 줄을 선다고 한다. 나는 상대적으로 비수기인 5월, 게다가 평일에 방문해서 가게 안쪽에서 여유롭게 맛을 즐길 수 있었다. 사람이 많을 때는 포장만 가능하다고 하니 방문하려는 사람들은 평일, 되도록이면 오전에 가면 좋을 듯하다.
여행지에서의 또 다른 재미는 단골 카페를 만드는 것이다. 가게에 들어설 때부터 진동하는 커피의 향과 커피를 한 모금 마셨을 때 느껴지는 편안함, 그리고 알 수 없는 개운함이 세계 어디서든 커피를 찾게 하는 매력인 것 같다. 그래서 리스본에 머무는 동안 유명한 관광지도 다녔지만, 내가 찾아다녔던 것은 맛있는 커피였다.
유럽 특유의 밍밍한 라테에 질린 내가 찾은 카페는 ‘파브리카 에스프레소 바(Fábrica Coffee Roasters)’였다. 헤스타우라도레 광장(Monumento aos Restauradores) 맞은편에 있는 아담한 ‘파브리카 에스프레소 바'에서는 라테와 플랫화이트가 유명한데, 유럽에서는 보기 드문 아이스커피까지 판매한다. 커피가 맛있는 카페에는 원두도 판매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카페에서는 신선한 원두를 갈아서, 혹은 홀 빈으로 구매할 수 있어 더욱 기대가 되었다.
다른 유럽 국가와 비슷하게, 포르투갈에서도 카페라는 공간은 1유로 짜리 에스프레소를 순식간에 마시고 나오는 곳이다. 카페를 갈 때 읽을 책, 할 일을 들고 가 두어 시간 동안 천천히 커피를 마시는 전형적인 한국인인 나는 공간을 음미할 곳이 필요했다. '파브리카 에스프레소 바'에서는 와이파이가 되지 않았지만 대화하는 사람들, 책 읽는 사람들을 구경할 수 있었고, 나는 이전 여행에서 산 피카소 책을 읽고 일기를 쓰며 시간을 보냈다. 내가 꿈꾸던 일상을 리스본에서 찾은 기분이 들었다.
리스본에서 맛본 커피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포르투갈식 레몬 커피인 ‘마자그란(Mazagran)’이다. 원래는 레몬 커피라는 것이 있는지도 몰랐다. 중심가인 로시우 광장(Praça do Rossio)을 구경하다 지쳐 이름 모를 식당 겸 카페에 자리를 잡았을 때, 옆 테이블 할아버지가 블랙커피에 레몬 슬라이스가 든 음료를 마시는 것을 보고 따라서 주문했다.
한국 카페에서 레몬 아메리카노를 판매했다면 절대로 사 먹지 않았겠지만, 포르투갈 사람들이 마시는 커피를 맛보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맛보자, 탄산의 맛이 느껴져 절반도 마시지 못하고 자리를 뜨고 말았다. 알고 보니 레몬 커피 ‘마자그란’은 아이스커피, 레몬, 설탕, 탄산수의 조합이었고, 포르투갈에서만 마시는 듯했다. 아이스커피는 커피대로, 설탕, 탄산수, 레몬은 그것대로 먹으면 참 좋을 텐데, 이해할 수 없지만 포르투갈식 커피를 맛본 데에 만족하기로 했다.
에그타르트를 먹고, 따사로운 햇볕을 맞으며 산책을 했다. 제로니무스 수도원(Mosteiro dos Jerónimos)을 지나쳐 이어진 길을 쭉 따라 걸으니 작은 공원과 예쁜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당시 나는 생활공간인 네덜란드를 포함해 중서부 유럽은 거의 다 여행했는데, 그럼에도 포르투갈은 건물, 도로 양식이나 문화가 사뭇 달라 보는 재미가 있었다. 분홍색 페인트칠을 한 맥도날드, 고르게 닦이지 않은 도로, 확연히 더 강했던 햇살… 오월에도 춥고 바람이 부는 로테르담(Rotterdam)에서 지내다 리스본 공원에 한량처럼 앉아 있으니 행복감이 햇볕과 함께 밀려들어왔다. 포르투갈에 온 실감이 났다.
하루 종일 공원에 앉아 있다, 거리를 쏘다니다 에어비앤비로 돌아와 살짝 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이미 캄캄한 새벽이었는데, 뒤척거리다 발코니 밖으로 보이는 거리가 예뻐 보여 무작정 밖으로 나갔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목적지 없이 집 근처를 걷다가, 전날 관광객이 붐벼 타지 못한 28번 트램이 떠올랐다. 28번 트램은 세뇨라 두 몬테 전망대(Miradouro da Senhora do Monte), 리스본 대성당(Sé de Lisboa) 등 주요 관광지를 지나치는 트램이다.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많아 낮에는 줄을 오래 서거나 서서 탑승할 확률이 높다. 때마침 새벽에 나왔으니, 아무도 없는 트램의 첫 차를 타보고 싶었다.
새벽 다섯 시 반, 28번 트램이 출발하는 출발지인 마르팀 모니즈(Martim Moniz) 역까지 이십 분가량 걸어가는 길은 생각보다 외롭지 않았다. 후드 집업 하나 걸치고 벽돌 길을 밟으며 콜드플레이(Coldplay)의 ‘Everglow’, ‘Scientist’, ‘Fix You’를 연달아 들었다. 우울과 잡념으로 잠들 수 없는 새벽, 노란빛의 가로등이 비추는 이국적인 거리를 걷는 기분은 꽤나 좋았다. 관광객들로 가득 차 있던 골목과 식당들은 텅 비어 있었다. 한밤중의 설렘과 기대는 첫 차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얼마간의 기다림을 거쳐 마침내 탑승한 노란색의 아기자기한 트램에는 탑승객 한 명과 나밖에 없었다. 언덕과 골목으로 이어진 레일 위를 달리는 트램은 심하게 덜컹거렸고, 창문가에서 바라본 리스본은 아름다웠다. 사람들이 깨어나기 전, 해가 비추기 직전의 시내는 차분하면서 활기찼다. 트램에 탑승한 후 십오 분 정도 지나자 서서히 동이 트기 시작했다. 주황빛, 노란빛이 섞인 태양빛이 불규칙하게 배열된 리스본 시내의 바닥을 비추었고, 아직 켜져 있는 가로등의 노란빛과 겹쳐 거리가 밝은 빛으로 가득 찼다. 승객이 거의 없는 버스나 트램이 스쳐 지나가기도 했다. 리스본 구석구석의 그래피티와 그림들이 보였다. 이제 막 뜨는 햇볕은 관광객은 아무도 없는 시간, 리스본 시민들은 추레한 차림의 어린 동양인 여자를 흘긋흘긋 보며, 옆구리에 신문을 끼고 출근을 했다.
새벽 다섯 시쯤 에어비앤비에서 출발했는데, 트램 역까지 걸어가 첫 차를 타고, 종착역에서 다시 에어비앤비로 돌아오니 시간은 어느덧 일곱 시가 넘어 있었다. 다시 조금씩 분주해지는 마을 분위기에 문을 열기 시작하는 카페들, 나는 갑자기 피로가 쏟아졌다. 정신없이 에어비앤비로 돌아와, 쏟아지는 햇살을 맞으며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잠을 잤다.
다시 잠에서 깼을 때는 대낮이었다. 오월임에도 강렬한 햇빛, 가득한 사람들로 공기마저 붕붕 뜨는 듯한 하는 리스본 시내를 보자 새벽에 트램을 타고 주요 관광지를 쏘다닌 게 꿈만 같았다. 밝은 리스본과는 확연히 다른 어딘가를 다녀온 기분이었다. 에어비앤비 앞을 조금 걷다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마셨다. 맛있는 커피, 좋은 날씨, 아름다운 풍경. 대단한 유적지에 가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행복감이 마침내 손에 닿는 듯했다.
커피를 좋아하지만 술에는 문외한인 나는 사실 포르투갈로 여행을 가면서 포트와인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교환학생 생활을 하면서 칠레와 프랑스산 와인을 가끔 마셔보긴 했지만, 정작 포르투갈이 와인으로 유명한 지는 몰랐고, 포르투갈에서 와인을 마셔볼 생각도 못했다. 다행히 에어비앤비 호스트 마리아가 첫날 건네 준 한 무더기의 팸플릿에 포트와인에 대한 설명이 있어서, 포트와인을 맛보지 못하고 포르투갈을 떠나는 불상사를 막을 수 있었다.
에어비앤비 숙소를 나서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식료품점으로 가, 영어를 한 마디도 못하는 주인 할머니에게 손짓 발짓으로 설명해 겨우 작은 포트와인 두 병을 구매했다. 발코니가 있는 민트색 방에서 달달하고 시원한 포트와인을 마시자 더할 나위 없는 만족감이 밀려들었다. 예정에 없었던 작은 발견이라서 더 큰 기쁨으로 다가오는 듯했다.
사실 에어비앤비를 이용해 여행하는 것이 처음인 것처럼, 내 성격대로 여유롭게 여행해보는 것 또한 처음이었다. 호텔이나 호스텔처럼 너무 적막하거나, 혹은 너무 부산스러워 얼른 그 공간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을 들게 하는 숙소만 이용했어서 그런지, 나의 여행은 항상 일정을 빡빡하게 세워 두고 리스트대로 부지런히 움직이는 방식이었다.
많은 것을 경험할 수 있고,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지만, 때로는 여유로운 나의 성격대로 돌아다니고 싶은 마음에 내심 지치기도 했었다. 리스본에서는 에어비앤비를 예약한 덕분에 지칠 때는 휴식을 음미하고, 또 언제든지 호스트의 눈치를 보지 않고 방에 드나들 수 있어 좋았다. 자기 자신에 집중하고, 본인의 페이스에 맞춰 여행을 즐기고 싶은 사람이라면 꼭 한 번쯤 에어비앤비를 이용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대부분의 유럽 국가를 여행해 본 경험상, 포르투갈 리스본은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프랑스 파리처럼 유명한 관광지가 많은 곳은 아니지만 여행 같은 일상, 일상 같은 여행을 누리기엔 더없이 좋은 여행지였다. 맛있는 빵과 커피, 관광객에게 친절한 현지인들은 이벤트 없는 여행도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한국에 비해 어찌 보면 현대화가 덜 된 듯한 시내 전경들은 한 폭의 엽서 같아, 정신없이 돌아다니다 보면 어느새 일상의 작은 생채기들을 잊게 된다.
포르투갈 여행은 마냥 들뜨고 신나진 않았다. 그럼에도 트램을 탈 때, 카페에 갈 때와 같이 작은 순간에서 설렘을 느낄 수 있었다. 날씨처럼 따뜻한 설렘을 선물 받은 리스본, 그 설렘을 함께 한 리스본의 에어비앤비는 따뜻한 한낮처럼, 고요한 새벽처럼 각각의 기분으로 언제까지나 나의 마음속에 남을 것이다. 나와 같이 힐링이 필요한 사람, 혼자만의 여행을 불규칙적으로 즐기고 싶은 다른 여행자들도 리스본의 낮과 밤에 작은 위로를 받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모든 종류의 불합리함에 대해 고민하는 평범한 대학생. 여행하는 것, 기록하는 것, 읽는 것을 좋아합니다. 자신을 귀히 여기며 사는 삶이 목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