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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어비앤비 Nov 22. 2019

낯선 이의 집으로 출근합니다

포르투갈과 크로아티아의 에어비앤비에 살면서 일하기

지난해 봄, 더 이상 회사에 다니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고 퇴사를 한 후 치앙마이로 한 달 살기를 떠났다. 새로운 미래를 고민하기 위한 여행이었기에 일부러 아무런 계획 없이 떠났으나, 계속해서 일해오던 관성은 도통 무시하기 힘든 것이어서 무슨 일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한 이유로 치앙마이에 있는 동안 한 달 살기에 관한 정보를 하루도 빠짐없이 블로그에 기록했다. 덕분에 한 여행 애플리케이션의 치앙마이 가이드 콘텐츠 제작 의뢰를 받게 되었고, 그 일을 계기로 지금까지 여행작가로 일하고 있다.


여행지를 취재하고 그에 관한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꼬박 일 년이 지났다. 한 해 동안 다녀온 출장지만 세어봐도 포르투갈, 크로아티아, 중국, 대만, 터키 총 5개국. 그중 포르투갈에서는 한 달, 크로아티아와 터키에서는 약 2주를 지냈고, 출장 전후로 영국, 프랑스, 조지아 등을 여행하며 원고를 썼으니 일 년 중 거의 4분의 1을 해외에서 보내며 디지털 노마드로 일한 셈이다.


‘여행을 즐길 권리’만 있던 여행자에서 그곳에서 보고 경험한 것을 ‘전달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 여행작가로 정체성이 바뀌며 일어난 변화가 몇 가지 있다. 그중 하나는 숙소 선정에 있어 더욱 까다로워졌다는 점. 낮에는 취재를 위해 돌아다니고 밤에는 노트북 앞에 앉아 일해야 했기 때문에 예전보다 숙소에 있어야 시간이 길어졌고, 장기간 머물러야 하니 집처럼 편안한 장소가 필요했다. 자연스레 사회생활을 시작하기 전 한창 여행다닐 때 자주 이용했던 에어비앤비가 떠올랐다. 나는 그때부터 낯선 여행지 속 타인의 집을 빌려 그곳으로 출근하기 시작했다.




타인의 취향을 수집하다 


포르투갈 한 달 살기를 하는 동안 머물렀던 리스본 에어비앤비의 호스트 리카르도(Ricardo)는 사진작가였고,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숙소는 마치 갤러리에 온 듯 수많은 예술 작품으로 가득했고,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화분도 집안 곳곳에 놓여 있었다. 그의 집에 머물며 나는 침실에 멋진 작품이 걸려있고, 창틀에 화분이 놓여있는 사소한 변화가 일상의 기분에 꽤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집에 열흘 가까이 머물며 익숙해졌음에도, 그것들을 볼 때마다 어쩐지 환기되는 느낌이었다.

 ▲ 예술적 감성이 충만했던 리스본의 에어비앤비. 소품 하나하나에서 호스트 리카르도의 취향을 엿볼 수 있었다.

그로부터 두 달 후, 또다시 크로아티아로 출장을 떠났다. 자그레브에 도착한 다음 날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시장에서 꽃을 사 화병에 꽂아둔 것이었다.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보이는 맞은편 책상 위의 샛노란 미모사는 매일 아침을 상쾌하게 만들어주었다. 일하다 눈을 돌릴 때면 미모사는 늘 그 자리에서 환한 빛을 내며 잠시나마 스트레스를 덜어 주었다. 리카르도의 집에 머문 경험으로 인해 나는 낯선 여행지의 시장을 방문해 직접 마음에 드는 꽃을 골라 기분을 전환할 줄 아는, 꽤 근사한 취향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힙한 분위기의 카페 혹은 감각적인 편집숍 같은 곳에서도 운영하는 사람들의 취향을 엿볼 수 있지만, 한 개인의 가장 내밀하고 솔직한 취향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은 단연 ‘집’ 아닐까. 내 방만 보아도 그렇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왼편의 벽에는 두 달 전 아바나(Havana)의 벼룩시장에서 산, 쿠바 신문 위에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Buena Vista Social Club)’의 유일한 여성 멤버인 오마라 포르투온도(Omara Portuondo)가 그려진 작품이 걸려있다.

▲ 자그레브에 머무는 동안 비타민이 되어 주었던 책상 위 미모사

책상 앞에는 올초 런던에 잠시 머물 때 물 위에 떠있는 서점인 ‘워드 온 더 워터(Word on the water)’에 들러 구입한, 소설가 알베르 까뮈(Albert Camus)의 모습이 담긴 그림이 있고, 그 옆에는 포르투갈 한 달 살기를 하며 찍었던 사진으로 직접 제작한 엽서가 있다. 이외에도 여행지에서 산 소소한 기념품들로 방안이 가득 차 있다. 나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더라도 이 방에 들어서는 순간 여행을 좋아하고 또 자주 떠나며, 관광보다는 서점 투어나 거리 산책을 즐기고, 타고난 재능의 예술가를 동경하는 나의 취향을 단번에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이렇듯 ‘집’이라는 공간은 그곳에 사는 사람의 취향으로 큐레이션 한 아주 사적인 갤러리나 다름없다.


여행 중 누군가의 집에 머물게 된다면, 그리고 그 집이 마음에 든다면, 미술관에 방문한 듯 집안을 유심히 관찰해보자. 창문에 달려있는 커튼의 색감, 거실에 놓여있는 테이블의 형태, 한 구석에 놓여있는 턴테이블과 그 옆에 꽂힌 세월이 느껴지는 LP, 부엌에 있는 찻잔과 접시의 문양까지. 그 모든 것을 작품처럼 바라보는 순간, 누군가의 근사한 취향이 당신에게 체화될 것이다.




따뜻한 정을 나눈 가족이 생기다


작년 겨울 머물렀던 포르투 에어비앤비의 호스트는 중년 여성 앨리스(Elis)였다. 처음 인사를 나누면서 앨리스는 남편이 하늘나라로 떠난 후 우울한 마음을 극복하기 위해 호스팅을 시작했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니 너는 지금 나를 도와주고 있는 거고, 와줘서 고맙다는 말과 함께. 2012년부터 10년 가까이 에어비앤비를 이용해왔지만, 호스트와 같이 지내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도착 전 걱정을 많이 했었다. 하지만 앨리스의 첫인사는 그 걱정을 무색하게 할 만큼 고마웠고 따뜻했다.


앨리스는 새벽 네 시에 출근하면서도 매일 조식을 차려놓고 나갔다. 토스트, 시리얼, 주스, 요거트, 과일까지 푸짐한 상차림이었다. 입이 짧은 편인 나는 토스트만 먹고 남은 음식은 냉장고에 넣어두곤 했는데, 어느 날 일터에서 돌아온 앨리스는 아침을 왜 이렇게 조금 먹냐며 걱정이 한가득 담긴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앨리스가 나를 단지 게스트로서가 아니라 가족처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낯을 가리는 성격인 나도 그녀의 진심에 마음을 빠르게 열 수 있었다. 어느 날은 일교차 심한 포르투의 겨울 날씨 탓에 감기에 걸린 앨리스에게 중국 마트에서 사둔 한국식 꿀 레몬차를 타주기도 했다. 우리는 점점 그렇게 가족이 되어가고 있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인종도 언어도 다른 타인의 집에서 이런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했다.

▲ 여행자들이 한데 모였던 특별한 크리스마스였다.

일주일 정도 지났을 즈음, 앨리스는 가족과 함께하는 크리스마스 파티에 나를 초대했다. 평소 한식을 좋아해 자주 만들어 먹는다며, 비빔밥도 해주겠다고 했다. 나는 “한식은 제가 준비해야죠!”라고 말하며 초대에 응했다. 크리스마스이브 당일, 라면으로 끼니를 때워가며 아껴둔 한식 재료와 마트에서 장 봐온 삼겹살, 그리고 소주로 한 상을 차렸다. 앨리스, 그의 부모님과 아들, 그리고 숙소에 머무는 여행자들이 모여 포르투갈식 전통 음식과 삼겹살을 앞에 두고 포르투갈어, 영어, 한국어를 섞어 가며 대화를 주고받던 크리스마스 파티는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다.

▲  앨리스가 크리스마스 파티 때 차려준 음식들

포르투를 떠나는 나를 껴안고 아쉬움에 눈물 흘리던 앨리스의 얼굴과 따뜻했던 품을 여전히 기억한다. 그녀의 존재 덕분에, 포르투갈은 내게 ‘꼭 다시 가야 할 나라’가 되었다. 늘 언젠가 다시 그곳에 가게 될 날을 꿈꾼다. 그때 내가 느끼는 기분은 아마도, 시골에 계신 할머니를 찾아뵙는 마음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경하고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일하다 


대학생 때는 여행 중 택시를 탄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무조건 걷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20대 후반이 된 지금, 여행지가 정해지면 그곳의 대중교통 체계와 교통카드 사는 법부터 알아보던 나는 이제 현지 택시 어플부터 다운로드한다. 택시를 타는 게 당연해진 건 이제 스스로 돈을 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직업적인 이유도 있다. 최대한 많은 곳을 돌아다니고 그중 좋았던 곳을 소개하는 것이 나의 일이니까.

▲ 황홀할 정도의 근무환경을 선사했던 스플리트의 에어비앤비

특히 지난 일 년 동안 정말 다양한 택시기사를 만났다. 처음 만나면 그들은 대부분 인사치레로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왔는지, 무슨 일을 하는 지를 묻는다. ‘코리아’에서 왔다고 하면 ‘노쓰(North)’에서 왔는지 ‘싸우쓰(South)’에서 왔는지를 심드렁하게 다시 묻고, 출장으로 왔다고 하면 “무슨 일을 하는데?”라며 조금 더 흥미를 가지고 묻다가, 여행작가라고 하면 “우와, 나 여행작가 처음 봐. 정말 좋겠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자유롭게 일하는 거잖아!” 류의, 호들갑 섞인 답변이 돌아오면서 질문 세례가 쏟아진다. 세상에 쉬운 일은 하나도 없고 아무리 좋아 보이는 직업이라고 하더라도 고충은 있기에, 그들의 반응에 “응! 엄청 좋아!”라는 대답을 해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지난 일 년을 돌이켜보면 참 즐겁게 일했다. 즐겁게 일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택시기사들이 말했던 대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자유롭게 일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그 ‘여기저기’에는 사막 같던 회사 생활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생경한 풍경들이 있었다.


크로아티아 출장 때 방문했던 스플리트와 두브로브니크는 아드리아해(Adriatic Sea)를 마주하고 있는 도시였다. 스플리트의 에어비앤비는 들어서자마자 커다란 창문 여섯 개가 있고, 그 창 너머로 에메랄드빛의 아드리아해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곳이었다. 머무는 동안 바람이 많이 불고 비도 오면서 관광보다 숙소에 있어야 하는 시간이 더 많았지만, 하나도 아쉽지 않았다. 여행마다 늘 챙겨 다니는 블루투스 스피커로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 놓고, 아드리아해의 풍경을 바라보며 일하던 순간에는 여느 여행보다 더 큰 호사를 누리는 기분이 들었다.

▲ 두브로브니크의 선셋을 벗 삼아 일하던 날

리카르도 집의 테라스에 앉아 바삭한 식감과 달달한 맛이 매력적인 포르투갈식 에그타르트 나타(Nata)를 한입씩 베어 물며 일할 때도, 두브로브니크의 에어비앤비에서 매일 저녁 아드리아해의 환상적인 노을을 바라보며 일할 때도 그랬다. 그럴 때마다 ‘이런 풍경을 앞에 두고 일해야 한다니.’라는 생각 대신, ‘이런 풍경 앞에서 일할 수 있다니!’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렇게 출장지에서 만난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들은 일에 대한 마음가짐까지 변화시켜 주었다.


이제는 여유가 있는 날이면 항상 나가서 일하곤 한다. 집에서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 카페로 일부러 여정을 떠나기도 하고, 어느 날은 서울숲의 벤치에 앉아 일하기도 한다. 업무의 내용이나 강도 같은 것들뿐만 아니라 일을 하는 공간 자체도 중요한 일의 요소라는 사실을, 지난 여러 번의 출장을 통해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끝나지 않은 여행

▲ 포르투갈에서 찍었던 사진으로 제작한 엽서들

최근 터키 출장을 마치고 나서 귀국하기 전에는 며칠간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를 여행했다. 동행한 언니는 우리가 머물렀던 에어비앤비 숙소를 두고 “여기는 샤워부스 문만 제대로 닫히면 진짜 완벽할 텐데.”라고 평했다. 그 말에 나는 “모든 게 다 마음에 드는 완벽한 숙소는 없더라고요.”라고 대답했다. 세상에서 가장 편한 공간인 내 집에서도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 하나쯤은 있기 마련인데, 잠시 빌려 쓰는 타인의 집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낡은 열쇠를 이용해 현관문을 열거나 가스레인지를 켜는 방법이 생소해 당황스러울 수도 있고, 사소하게는 화장실 휴지 걸이의 위치가 불편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낯섦을 통해 오히려 누군가의 근사한 취향을 수집할 수 있고,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지구 반대편의 타인과 가족 같은 정을 나누는 경험을 할 수 있으며, 생경한 풍경을 앞에 두고 일할 기회를 선사하기도 한다. 이런 매력들이 약간의 빈틈을 충분히 메워준다는 사실을 이젠 너무나도 잘 알기에, 나는 앞으로도 종종 타인의 집으로 출근할 계획이다.





에어비앤비 작가, 이정미


24개국 59개 도시 여행. 퇴사 후 여행작가 겸 프리랜스 에디터로 일하고 있다. 일하며 여행하고, 여행하며 일하는 삶을 다룬 에세이 <제가 어떻게 살았냐면요>를 출간했다.

인스타그램 @dyomdyom

블로그 www.projectone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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