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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어비앤비 Dec 06. 2019

하루라도 관광객이지 않을 수 있을까

런던에서 경험한 이방인의 삶

생각해보면 뉴욕도 그랬고 파리도, 밀라노도 그랬다. 나는 언제나 영어를 잘 못 하는 이방인이었다. 기대했던 여행은 격렬히 말하고, 듣고, 만지는 여행이었지만, 실제론 도시의 가장자리에 멀찍이 서서 킁킁 냄새나 맡았을 뿐이었다. 한국으로 돌아가 대충 아는 체할 법한 수준의 겉핥기 지식만 잔뜩 부풀려 돌아갔다. 모마를 갔지만 모마를 모르고, 에펠탑을 봤지만 에펠탑을 몰랐다. 그건 추운 겨울 약속 하나 없이 바글바글한 강남역을 걷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 런던 가면 꼬-옥 봐야한다던 타워브릿지 야경과 꼬-옥먹어야한다던 피시앤칩스

그래서 섞여보고 싶었다. 이번 런던 여행만큼은 좀 섞여 보겠노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관광객이 밟는 전철은 밟지 않겠노라. 타워브리지 야경보다, 피시앤칩스보다 더 로컬한 무엇인가를 발견하겠노라. 수없이 다짐했지만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중간 좌석에서 든 생각은 이번 여행에서조차 난 더할 나위 없는 관광객 코스를 밟은 이방인이었을 뿐이란 것이다.




그래도, 전보다는 나은 이방인


전보다 나아진 이유를 꼽자면 지난날 수동적이었던 마인드를 이번 여행에서 고쳐먹기로 했기 때문이다. 내 기준에 그저 호스트가 외국인인 곳에 사는 것은, 그래서 아침저녁으로 인사 몇 번 나누는 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었다. 한국으로 치자면 입김 펄펄 나는 겨울에 어묵탕 하나를 시켜놓고 소주를 마시면서 떠들 수 있는 찐득함이 그것이었다.


아무래도 난 술이 빠지면 뭔가를 '진짜'로 받아들이기 힘든 인간인가 보다. 그래서 마구잡이로 검색했다. 술과 관련된 어쩌고를. 런던엔 생각보다 많은 술과 관련한 에어비앤비 체험이 있었다. 와인 마시면서 그림 그리기, 양조장 대표랑 수제 맥주 마시기, 현지인과 함께 런던 동부 펍 투어 등등. 문제는 내 초라한 영어 실력이었다. 모두가 웃을 때 나 혼자 웃지 못하는 그 알고 싶지도 않은 순간이 싫었다.

그런 내게 용기를 준 건 걸핏하면 여행을 떠나는 친구의 말이었다.


"한국인들 술 마시면 영어 잘해”

“다들 용기가 없어서 못 하는 거지 용기만 생기면 술술이야"


생각해보니 내가 그 타입이었다. 영어뿐만 아니라 좋아하는 이성이나 어려운 상사 앞에서도 술과 함께라면 용자가 될 수 있었다. 맞다, 나에겐 그 누구보다 든든한 술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술과 함께라면, 영어로 진행되는 트립쯤이야 뭐! 용기를 냈다.


"론리플래닛 객원 에디터와 함께 하는 소규모 브루어리 투어"

"맥주와 런던을 사랑하는 여행 작가 메건(Megan)입니다"

"런던의 작은 브루어리를 돌아다니면서 함께 맥주 마셔요."


‘좋은데?’ 신청 버튼을 눌렀다.




어색한 첫 만남


메건의 에어비앤비 체험을 신청한 그 날은 하필 나 빼고 아무도 브루어리 투어를 신청하지 않은 날이었다. 버몬지 역(Bermondsey Station)에서 내리면 크고 작은 마켓이 열리는 토요일이었고, 오래된 기찻길 밑으로 줄지어선 브루어리들이 방금 전 문을 열고 한산하게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와 메건은 단둘이 그 한산하고도 복작한 거리를 걸었다.

▲ 정말로 어색해 죽는 줄 알았다.

낯선 사람과 친해지는 원초적인 방법은 공통점을 찾아내는 것 아닐까. 술을 좋아하는 싱글 여성, 글 써서 입에 풀칠하는 작가, 런던을 사랑함. 메건과 나 사이엔 이미 공통점이 많았지만, 그걸 알고 있어도 차마 먼저 입을 뗄 용기가 나질 않았다. 술 없이 친해지기가 불가능한 인간임을 몸소 체험하던 멋쩍은 순간이었다. 침묵으로 뻥 뚫린 어색함을 메꿔보려는 듯 메건은 오늘 날씨가 드물게 좋다는 이야기와 런던에 왜 이렇게 브루어리가 많이 생겼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내 형편없는 리스닝 실력을 고려하면 아마 더 많은 이야기를 했었을지도 모른다. 추측성 듣기 평가를 하며 걷다 보니 첫 번째 브루어리에 도착했다.


비앙카 로드 브루(Bianca Road Brew)라는 제법 큰 브루어리였다. 나는 앉았고 메건은 주문을 하러 갔다. 전문가가 있으니 당연히 내가 주문하지 않아도 됐지만 분위기는 마치 현지에 친한 친구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현지에 친구가 있다는 것의 장점은 이 어려운 순간 내가 주문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아닐까. 사실해보면 별거 아닌 음식 주문이지만 주문할 때만큼 긴장되는 순간이 없다. 그만큼 해외에 나가서도 영어를 쓸 일이 많이 없다는 것이겠지. 메건은 두 종류의 페일 에일을 시켰고 우리의 어색함은 페일 에일의 기원에 대해 설명하는 순간까지 이어졌다. 이럴 줄 알고 난 비장의 무기를 챙겼었다.




신라면, 네가 고결한 임무를 수행했음을 알린다

▲ 수제 IPA와 페일 에일, 어느 것이 IPA인지는 그때만 알 수 있었다.

그 비장의 무기는 바로, 신라면이었다.


내가 신라면을 꺼냈을 때 메건은 당황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표정을 지었다. 신라면을 꺼내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격적이었겠지만, 사실 그보다 더 충격적이었던 건 신라면의 모습이었다. 가는 길에 이미 조금씩 부숴 먹은 것 같이 신라면의 꼴은 먹다 남은 양파과자처럼 눅눅해 보였기 때문이다. 솔직히 나도 당황스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면은 신라면이었다. 나는 맥주에 딸려온 냅킨을 조심스럽게 펼친 후 그 위에 약간의 수프를 덜었다. 메건의 표정은 내내 이상하다는 눈치였고 나는 으쓱한 표정이었다.


“메건, 매운 거 좋아해?”


내가 물었고 메건은 매운 것을 좋아하다 못해 사랑한다고 했다. 3년 전에 서울에 방문했을 때 먹은 매운 음식들이 그립다고 했다. 나는 생라면을 부순 작은 조각을 수프에 살짝 찍은 뒤 메건에게 건넸다.


“진짜 좋은 조합이야. 먹어봐.”

“솔직히 말해서 이거 정말로 이상해 보여. 근데 맛있네. 마음에 들어.”


그렇지. 매운 거 싫어하는 사람을 빼고선 이걸 싫어할 사람이 있을 리 없지. 메건은 그다음부터 내 눈치를 살살 봐가며 끊임없이 생라면을 먹었다. 다 먹곤 이걸 어디서 살 수 있냐 물었다. 세인스버리(Sainsbury, 런던의 마트 체인)에서 파는 걸 봤는데 한국에서 가져온 거랑 맛이 똑같은 지는 모르겠다고 했다. 어찌 됐건 뿌듯했다. 내 취향을 누군가 좋아한다. 그것도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외국인이. 내 취향이 꽤나 멋있어지는 순간이었다.

▲ 메건과 나눠 먹은 고결한 신라면과 맥주들

하지만 다음 브루어리에선 신라면을 꺼내놓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이 너무 쳐다보기도 했지만 더 이상 신라면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라면은 아이스 브레이커로서의 고결한 임무를 마쳤고 메건과 나는 맥주 샘플러를 마시며 신나게 프리랜서로서의 짜고 달고 쓴 라이프에 대해 논하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과 친해지는 방법 또 하나는 자신의 지질함에 대해 털어놓는 것 아닌가. 나는 지난날 내가 프리랜서를 하면서 얼마나 돈이 없었고 그게 얼마나 내 숨구멍을 죄어왔는지 이야기했다. 작년엔 운 좋게 연재처가 많았고, 종종 광고 의뢰도 들어와 돈이 아예 끊긴 적이 없었지만, 올해 초에 그 많던 연재처에서 다 잘리고 광고도 안 들어오는 상태에서 예정된 일이 하나도 없었다. 런던 갈 당시에 정말 우연히도 일이 제법 들어와 가까스로 경비를 충당했지만 사실 티켓팅을 할 때만 해도 전재산을 털어 가도 부족할 판국이었다. 회사 다닐 때만 해도 백만 원은 큰돈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 쥐꼬리 같은 돈이라도 매달 들어올 구멍이 없으니 맥주 한잔도 못 사 먹는 수준에 다다른 것이었다.

▲ 두 번째로 간 브루어리인 '브루 바이 넘버스 테이스팅 룸(Brew by Numbers Tasting Room'과 그곳에서 마신 샘플러

이 슬픈 이야기를 하며 신세 한탄을 하니 메건 또한 질세라 자신의 지질함에 대해 토로했다. 10년 가까이 몸담은 론리플래닛에서 제 발로 나왔을 때의 참담한 심정과 진짜 1파운드도 안 생기던 기근에 관한 이야기. 그런데 또 어떻게 살다 보니 론리플래닛에서 객원 에디터로 일하며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칼럼을 쓰는 이야기 등등 우리는 지난 불안의 역사에 대해 길고 긴 이야기를 하며 제법 끈끈해졌다. 이야기는 둘 다 불안이 오면 어쩔 줄 몰라하던 아마추어의 시기를 거쳐 불안이 오면 오는가 보다 하면서 제법 홀연해진 으-른 프리랜서들이 되었단 것에 대해 자화자찬하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돌이켜보니 둘이 많이 취했던 것 같다.


이후론 제법 취기가 올라서 그런지 진짜 별의별 이야기를 다했다. 런던의 비싼 집값과 생각보다 저렴한 물가, 아직까진 런던에 혼술 문화가 많이 발전하지 않은 것에 대한 아쉬움. 여성 혼자 펍에 가면 느끼는 것들과 여전히 남성들의 문화에 가까운 펍 문화에 대한 씁쓸함, 그 와중에 새롭게 시도되고 있는 나 홀로 여행객, 여성을 위한 펍 등 런던에 대한 뒷담화를 하며 그 자리에서 메건과 나의 우주가 경계 없이 펼쳐졌다.

▲  남성 중심의 펍 문화가 아쉬워 여성 대표가 차렸다는 더 히베(THE HIVER) 브루어리, 꿀맥주가 유명한 곳이다.

그리고 그 순간, 내가 런던에 섞인 느낌이 들었다. 마치 런던은 두 팔 벌려 나를 환영하고 있었는데, 그간 내가 모르고 있었던 것처럼 문밖에서 추운 겨울바람을 맞다 이윽고 따뜻하고 말랑한 소파에 쏙 들어간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메건과 헤어지자마자 와장창창 깨졌다.




하지만 여전히 이방인


얼큰하게 취해서 간 마켓, 빽빽하게 앉아있는 사람 중 혼자 온 사람은 오로지 나밖에 없었다. 씩씩하게 소고기 스테이크를 주문해서 방금 난 자리에 앉아 먹었지만 방금 전 메건과 깔깔대며 이야기하던 나는 온 데 간 데 없고 저마다 신나게 떠들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외롭게 스테이크를 씹는 고독한 이방인으로 돌아온 것이다. 문득 저녁에 2차를 갈 것이라고 했던 메건이 부러워졌다. 갑자기 여기서 난 대체 뭘 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에 가족들도 친구들도 보고 싶어 졌다.

▲ 최근 뜨고 있는 런던의 로컬 마켓, 비네가 야드 (Vinegar Yard) 마켓과 마켓에서 먹은 스테이크

‘그래, 역시 이방인일 수밖에 없구나.’


하지만 신기하게도 남은 기간 그녀와 나눈 대화를 실천해보며 이 낯선 도시에 전보다 더 섞여볼 수 있었다. 선데이 브런치는 맛집에 가도 좋지만 그냥 아무 펍에 가서 편히 먹어보라는 조언, 아침은 꼭 굶고, 오후 1시쯤 빈속으로 가라는 팁, 라거나 바이젠 대신 IPA나 페일에일을 고르는 내 선택의 변화, 펍에 혼자 온 여자는 없나 관찰하던 시선 등이 이번 여행의 사소한 것을 바꾸었다. 여전히 이방인지만 메건의 시선이 섞인 내 시선이 놀러 온 관광객만은 아닌 듯하여 기분이 좋았다.

▲ (좌)노을 명소 프림로즈힐(Primrose Hill)에서 마셨던 캠든 페일 에일 / (우)프림로즈힐은 진정한 노을 맛집이었다.

여행은 한 순간순간이 모여 총합이 된다. 적어도 지난날 수동적이기만 했던 순간보다는, 한 번쯤 어묵탕에 소주 한잔만큼이나 진한 속내들을 누군가와 털어놓을 만큼 반짝이는 순간을 만들었다. 그게 지속되지 못할 짧은 추억으로 남을 지라도. 내 여행이 이따금 외로워질 때마다 친구를 찾아, 잠시 폭신한 소파가 되어줄 누군가를 찾아 만나면 될 것이다.

▲ 메건의 추천으로 먹은 선데이 브런치




에어비앤비 작가, 귀찮

그리다가 지치면 글 쓰고 글 쓰다 지치면 그림 그리는, 일관성 있게 일관성 없는 사람. 귀찮다는 말을 달고 사는 게으름뱅이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진 휴양지보다 고생스러운 도시를 좋아하는 모순적인 인간. 2년 전 퇴사 후 <이번 생은 망하지 않았음>을 출간했으며 아직까진 용케 다시 회사에 들어가지 않고 그럭저럭 먹고살고 있는 프리랜서 글쟁이, 그림쟁이.

인스타그램 @lazy.draw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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