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어비앤비 Dec 02. 2019

미션 <방콕이 흥미로운 점 5가지> 찾기

나만의 페이스로 느리게 자유의 도시, 방콕 탐험하기



사다리 타기로 결정한 여행지, 방콕


7월 초, 사다리를 탔다. 선택지 3가지 중 내가 고른 2번의 끝에는 대만이 쓰여있었다. 근데 막상 대만에 가려하니 1번 방콕과 3번 발리가 자꾸 눈에 밟혔다. 대만을 제외하고 다시 사다리를 타봤다. 방콕이 나왔다. 2번 대만에게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방콕행 항공편 특가를 잡고 나니 곧 잊었다. 나는 방콕에 갈 것이다. 


태국에서는 태국어를 공용어로 쓰며 독자적인 문자를 사용한다. 태국 기후는 1년 내내 덥다. 태국은 입헌군주제 국가로 왕족이 존재한다. 태국음식은 세계 3대 미식 중 하나라고 한다. 이것이 내가 태국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이다. 인터넷에는 많은 사람이 몸소 부딪히고 겪고 공유하며 가공된 유용한 정보들이 많지만, 굳이 찾아보진 않았다. 아는 것이 없어 익숙하지 않을 때 미지의 땅을 돌아다니듯 탐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관심 없는 유명한 관광명소를 굳이 찾아가지 않는 게으른 여행을 하기 위해서였다. 대신 방콕의 흥미로운 점 5가지를 찾아보겠다는 나만의 미션을 세웠다.


에어비앤비는 ‘누군가의 집’만 빌릴 수 있는 플랫폼이라 생각했었는데, 알고보니 호스텔이나 호텔, 심지어 통나무집이나 보트같이 특색 있는 공간도 빌릴 수 있었다. 최초의 계획은 에어비앤비에 올라와있는 현지인의 집에서 지내는 것이었으나, 에어비앤비에서 수많은 숙소 사진들을 둘러보니 다양한 형태(호스텔과 호텔도!) 가 있었다. 마음은 현지인의 집보다 호스텔과 호텔 사이에 있었다. 전통 가옥 같은 2층 건물에 커튼을 칠 수 있는 2층 침대에 여러 명이서 앉을 수 있는 공용 공간의 큰 나무 테이블은 호스텔에 대한 내 로망에 불을 붙였다. 한편 친환경적인 인테리어와 장식품, 나무 아래의 푸른 수영장, 욕조 사진은 호캉스를 꿈꾸게 만들기 충분했다. 눈을 감으니 호스텔에서 ‘다른 여행자들과 함께 숙소 앞 빈백에 앉아 강을 바라보며 맥주를 마시는 나’의 모습과 호텔에서 ‘늦잠을 자고 수영장 물에 누워 하늘과 나무를 바라보는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결론은 단 하나뿐이다. 두 군데 모두 예약하는 것이다. 에어비앤비에서 찾은 호스텔에서는 인싸가 되어 친구를 많이 사귀고, 호텔에서는 잘 먹고 잘 쉬겠다는 마음으로 출발일을 손꼽아 기다렸다.





1. 늘 밝은 인사를 건네는 태국인 이웃사촌


결론부터 밝히자면 호스텔에서 친구는 못 사귀었다. 어이없게도 4일 동안 이 호스텔 손님이 나뿐이었기 때문이다. 전 세계의 배낭여행객들은 모두 카오산 로드(Khaosan Road, ถนนข้าวสาร)에 있는 호스텔에서 만날 수 있다고—저렴한 숙박비용과 유흥의 즐거움은 여행자들을 하나로 만들었다— 들었는데, 이 호스텔에는 그 어떤 여행객도 볼 수 없었다. 호스트 겸 호스텔 주인에게 다른 사람은 없냐고 물어보니 내가 유일한 투숙객이라고 했다. 친구들을 많이 사귀는 나의 야심 찬 계획은 장렬하게 실패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하지 않았는가? 외국인 친구들은 못 만났지만 태국인들은 만날 수 있었다. 마치 이웃사촌 같은 그런 태국인 말이다.


호스텔은 골목길과 강이 교차하는 지점에 있었다. 외출하려면 무조건 골목길을 지나가야 했는데, 그 골목길에 한 중년 부부가 살고 있었다. 방콕에서의 첫날 그 길을 지나면서 여기저기 걸려있는 빨래, 주차돼있는 오토바이, 열린 문 틈으로 보이는 부엌 등을 신기하게 구경하다 보니 나를 쳐다보고 있는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타인의 일상을 너무 뚫어져라 쳐다봐서 화가 나셨나 해서, 내가 아는 몇 안 되는 태국어 중 제일 적절해 보이는 말을 합장과 함께 건넸다. “사와디카(สวัสดีค่ะ)” 나의 어눌한 인사에 아주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사와디카(สวัสดีค่ะ)”라고 답해주셨다. 이때를 시작으로 아주머니를 볼 때마다 오랫동안 알아온 반가운 이웃인양 인사를 주고받았다. 외출하다 마주쳐도 인사하고 숙소 앞 빈백에 앉아 혼자 맥주를 마시다가도 인사했다. 매번 내 어색한 태국어 인사에 반가운 인사로 화답해주셨다. 


▲ 숙소 앞 빈백에 앉아있다가 옆집 아주머니와 인사를 나눈 곳
▲ 호스텔의 식당 겸 공용공간


길거리 음식에 한창 빠져 빙수를 사 온 날, 에어비앤비 숙소에 못 보던 여자애가 한 명 있었다. 에어비앤비 호스트와 대화를 나누던 중 나를 보자마자 반갑게 인사를 하면서 내가 먹는 게 뭐냐고 물어봤다. 빙수라고 하니까 안에는 뭐가 있냐고 물어봤다. 

“그게 바로 내가 너한테 물어보고 싶었던 거야!”

여자아이는 호탕하게 웃으면서 호스트에게 태국어로 뭐라 물어보더니 대답했다. “나도 모르겠네! 나는 베트남 태국 혼혈이거든!” 셋이 깔깔대며 웃어댔다. 자신도 알고 싶었던 건지 나를 돕고 싶었던 건지 나와 같이 머리 맞대고 구글에 검색해 이 빙수에 코코넛 과육과 물밤이 들어간다는 걸 알게 됐다. 다음 날 체크아웃하고 새로운 숙소로 이동하려고 택시를 기다리는데 그 친구가 나타나 내게 인사를 하며 말을 걸더니 같이 택시를 기다려줬다. 이 친구가 사실 여기서 일하는 현지인이라는 건 그때 알게 됐다. 


▲ 문제의 그 빙수. 우리나라와 다르게 토핑이 밑에 깔리고 위에 얼음이 올라간다

 

태국도 사람 사는 곳이니 모두가 친절한 건 아니었지만, 내 허접스러운 태국어 인사를 받아주는 사람들이 많았다. 카오산로드 근처에 어묵 국수를 파는 아주머니, 한밤에 왕궁 근처를 걸어가다 만난 경찰관 아저씨, 가판대에 누워있는 고양이와 놀아주는 작은 구멍가게의 아저씨,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거리 행인도, 한결같이 얼굴에 웃음꽃을 피운 채 내 인사를 받아줬다. 여행하는 동안 친구는 못 사귀었지만, 정겨운 태국인 이웃들을 만난 것만으로도 하루하루를 기분 좋게 보낼 수 있었다.


▲ 신문가판대에 올라온 고양이와 놀아주는 아저씨. 인사하면서 사진 촬영을 허락받는 내게 웃으며 흔쾌히 허락해주셨다.





2. 맛있는 음식 또 발견! 노상음식점 천국


많은 동남아 국가처럼 방콕에는 길거리 식당이 많았다. 언제나 사람들이 많은 차이나타운이나 카오산로드(Khaosan Road, ถนนข้าวสาร)는 말할 것도 없고,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길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을 정도다. 방콕의 노상음식점은 우리나라의 포장마차와 비슷하나 천막이 없이 뻥 뚫려있고, 술과 안주보다는 식사를 하러 가는 느낌이 강한 것 같다. 자리가 부족해 모르는 사람들과 합석하거나 테이블을 제공하지 않아 근처 땅바닥에 앉아 먹는 게 일반적이라 그런지 여러모로 자유로운 느낌을 받았다.


▲ 호스텔 근처에 있던 노상 음식점. 이른 시간인데도 사람이 많았다.


방콕에서 처음으로 먹은 음식은 어느 노상음식점에서 파는 똠얌꿍(Tom Yum Kung, ต้มยำกุ้ง)이었다. 도착하니 이미 만석이라 기다릴지 떠날지 고민하던 차에 직원이 나에게 저기 앉으라는 듯이 한 테이블을 가리켰다. 손가락으로 메뉴판을 가리키며 음식 주문을 마치고 호기심에 가득 차 눈, 코, 그리고 귀를 열고 주변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아주 작은 식당이라 바로 앞에서 요리하는 것이 보였는데, 이것이 진정한 오픈 키친 같았다. 한편 일부 직원은 음식이 완성될 때마다 비닐봉지에 포장을 하며 대기하는 오토바이 부대들에게 음식을 전할 준비를 했다. 비브라늄으로 만든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한 개도 터지지 않고 안전하게 포장되어 전달되는 게 신기했다. 더운 나라에서는 집에서 요리하는 걸 선호하지 않기 때문에 외식 문화가 발달한다더니, 태국도 그런가보다. 그랩 음식 배달 서비스도 그런 맥락에서 태국에 론칭된 게 아닌가 싶다.


▲ 맵지만 맛있었던 똠얌꿍

옆자리에서 식사를 하던 일본인들이 똠얌꿍(Tom Yum Kung, ต้มยำกุ้ง)이 엄청 맵지만 맛있다고 했다. 한국인으로서 이 똠얌꿍(Tom Yum Kung, ต้มยำกุ้ง)의 매운맛을 이겨내 봐야겠다 다짐하는 사이, 밥과 함께 음식이 나왔다. 고맙다고 인사하고 입에 국물을 넣고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한그릇 뚝딱 비웠다. 해산물의 시원한 맛, 매운맛과 신맛이 섞여 해장이 되는 듯했다. 아삭아삭한 죽순과 부드러운 버섯에 겉은 바삭하면서 속은 탱글탱글한 민물새우까지, 고급 식당의 음식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맛있었다. 길거리에서는 족발 덮밥(Kao Ka Moo, ข้าวขาหมู), 어묵 국수(Egg Noodle with Clear Soup, บะหมี่น้ำลูกชิ้นน้ำใส), 팟타이(Pad Thai, ผัดไทย) 등의 본식뿐만 아니라 후식도 즐길 수 있다. 즉석에서 갈아주는 수박 스무디(Watermelon Smoothie, แตงโมปั่น), 달콤한 연유를 뿌린 토스트(Toasted Bread with Condensed Milk, ขนมปังปิ้งเนยนม), 원하는 재료를 골라 담을 수 있는 태국식 빙수(Namkhaeng Sai, น้ำแข็งไส) 등 디저트도 다양하고 맛있다. 씰롬(Silom, สีลม) 지역을 돌아다니던 어느 날에는 학교에서 우르르 몰려나오는 아이들과 군것질거리를 파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줄을 서서 메추리알 프라이를 사 먹는 모습에 어렸을 적 친구들과 자주 간 분식집이 생각이 나 웃음이 났다.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다.


▲ 모 방송에 나왔던 족발덮밥. 이렇게 해서 60밧 (약 2500원)





3. 공감각적 즐거움이 피어나게 하는 태국음식 만들기 체험


태국에서 꼭 해보고 싶은 일, 두 번째는 요리 배우기였다. 많은 한국인들이 참여하고 추천하는 프로그램 중 하나는 태국의 시장을 둘러보며 구매한 재료로 태국전통음식을 만들어보는 것이라 한다. 이 여행을 계획하기도 전부터 태국전통음식 만들기를 해보고 싶었는데, 때마침 에어비앤비 숙소를 예약할 때 이 에어비앤비 체험을 발견했다. 에어비앤비 앱을 통해 체험 위치, 가격, 메뉴 등을 확인해가며 원하는 조건에 맞는 곳으로 바로 예약했다. 후기를 읽어보니 처음 보는 과일들과 식재료에 대해 설명을 들을 수 있어서 태국음식을 즐기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약속 장소에서 참석자들이 다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각자 방콕에 온 이유에 대해 이야기했다. 내 옆에 있던 미국 서부에서 온 여자아이는 자신을 요리사라고 소개하며 태국을 포함한 동남아 국가의 음식에 관심이 생겨 여행 왔다고 했다. 뒤이어 다른 미국인이 자기는 동부 출신이고 배낭여행 중이라고 했다. 어떤 호주 남자애는 방콕이 경유지라 스탑오버로 머무는 중이라고 했다. 호스트가 어떤 한국인 커플들에게 왜 왔는지 물어보니 신혼여행으로 왔다고 해 모두의 축하를 받았다. 다른 국적에 다른 목적이지만 요리를 배우겠다는 단 하나의 공통점만으로 우리는 하나가 됐다. 호스트와 함께 근처 끌롱 토에이 재래시장(Khlong Toei Market, ตลาดคลองเตย)으로 향했다. 호스트의 말에 따르면 이곳은 24시간 운영하는 시장인데, 그 규모가 엄청 커서 물건에 따라 구획이 나뉘어있고 마트에 비해 가격이 저렴하다고 한다. 호스트는 우리가 먹을 과일들을 사면서 여러 가지 이국적인 과일들을 소개해줬다. 


▲ 재래시장 안에 있는 과일 구역. 저렴하게 과일을 즐기고 싶으면 꼭 이곳에서 사 먹으라고 호스트가 강조했다


자기소개가 끝난 뒤 우리 그룹에는 정적이 돌았다. 모두 나처럼 낯을 가리는 건지 소극적인 자세로 수업에 임했다. 중간중간 농담할 때만 조용히 웃을 뿐 말은 별로 없었다. 대화를 꽤 나누게 된 계기는 생각지도 못한 곳에 있었다. 누군가 자리를 배정해준 것도 아닌데 어쩌다 보니 한국인들 - 영어권 사람들로 나뉘어 앉아 대기하고 있었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테이블 위 과일을 먹고 있는데 캘리포니아에서 온 엘이 우리 테이블을 가리키며 박장대소하기 시작했다. 이유인즉슨, 영어권 친구들 테이블 과일은 아직도 많이 남아있는데 우리 한국인은 이미 과일을 다 먹어서 껍질만 덩그러니 남아 있어서였다. 뒤이어 나타난 호스트도 우리의 얘기를 듣고 웃음이 터져 한참을 같이 웃었다. 우리가 민망해하며 ‘한국에선 흔치 않은 과일인데다 맛있어서 자꾸 먹게 됐다’고 하니 다들 수긍해줬다. 조금 민망했지만 이렇게 웃은 덕에 모두들 긴장이 풀렸는지 이후 편안한 분위기에서 요리도 배우고 스몰 톡도 나눌 수 있었다.


오늘의 코스는 똠카가이(Tom Kha Gai, ต้มข่าไก่), 팟타이(Pad Thai, ผัดไทย), 마사만커리(Massaman Curry,  มัสมั่น)에 망고 스티키 라이스(Mango Sticky Rice, ข้าวเหนียวมะม่วง)로 네 가지 메인 요리와 한 가지 디저트로 구성됐다. 호스트는 테이블 한가운데 있는 재료들을 하나하나 설명해주면서 ‘태국음식은 쓴맛 빼고 모든 맛이 다 들어간다’고 덧붙여줬다. 신맛을 내는 라임과 타마린드, 매운맛을 위한 태국 고추, 단맛의 팜슈가, 마지막으로 짠맛의 피시 소스. 신기한 건 요리하는 동안 소금을 쓴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네 가지 맛이 조화롭게 더해져야 하는데 소금까지 넣으면 짠맛이 강해질 것이다. 피시 소스는 짜면서 감칠맛까지 더할 수 있으니 자연스레 소금을 덜 쓰는 게 아닐까? 하여튼 다시 재료 소개로 돌아와서 얘기를 이어가자면, 말로만 들어본 재료들을 직접 손질하고 향을 맡아보고 맛볼 수 있었다. 이렇게 배우기 전까지 레몬그라스는 레몬보다는 파같이 생겼고, 타마린드는 갈색 콩 껍질처럼 생겼는데 신맛이 난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쓸 데는 없지만 유용한 지식을 알 수 있어서인지 쿠킹클래스에서 가장 재밌는 시간이었다.


▲ 팟타이 재료들이 담긴 쟁반. 새로운 음식을 만들 때마다 쟁반에 손질한 재료를 담았다


▲ 첫 번째 메뉴 똠까가이. 닭이 들어간 수프인데 많이 맵지는 않다
▲ 왼쪽부터 팟타이, 마사만 커리, 망고 스티키 라이스

 

호스트는 태국음식을 묘사할 때 유독 하모니라는 표현을 많이 썼다. 식재료의 조화, 색의 조화, 여러 가지 맛의 조화는 태국음식의 특징이라고 했다. 그 말에 며칠 전에 먹은 똠양꿍 볶음국수(Tom Yum Fried Noodle, เส้นเล็กผัดต้มยำ)와 버터플라이 피 플라워 티(Butterfly Pea Flower Tea, 직역하면 나비 완두콩 꽃 차)가 생각났다. 태국음식 안에 든 여러 가지 요소들의 조화는 우리에게 공감각적 즐거움을 준다. 볶음 국수의 생김새는 팟타이 같으나 계란이 없고 보랏빛 샬럿과 크게 썬 고추가 있었다. 나름 고급 음식점인지 보라색의 이름 모를 꽃이 같이 있어 내 음식 색이 쨍쨍하고 화려했다. 포크로 한 입 먹으니 똠얌꿍(Tom Yum Kung, ต้มยำกุ้ง)처럼 매콤 새콤한 데 달달한 맛도 느껴지고, 고수의 향이 코를 자극하니 앉은자리에서 바로 다 먹었다. 버터플라이 피 티는 보랏빛을 띠는 아이스티인데 시원하고 새콤 달달하니 더위가 가시는 듯했다. 한 번 보고, 한 번 맡고, 한 번 맛보고. 호스트의 말대로 다양한 식재료와 다채로운 색과 여러 가지 맛이 잘 어우러졌다. 음식 하나로 우리의 시각, 후각, 미각을 전부 만족시켜주는 태국음식이다.


▲ 예쁘게 담아진 똠얌꿍 볶음 국수와 버터플라이 피 플라워 티.





4. 도심 한복판에서 만나는 그린뷰, 어반 포레스트


에어비앤비에서 첫 번째 호스텔을 예약하다 발견한 한 호텔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랑수안 로드(Langsuan Road, ซอยหลังสวน)에 위치해서 그런지 밤에는 주변이 조용하고 근처에 라차담리 역(Ratchadamri Station, สถานีราชดำริ)도 있어 편해 보였다. 위치뿐만 아니라 따뜻한 느낌을 주는 원목가구와 킹 사이즈 베드 모두 너무 마음에 들었지만, 그중에서도 으뜸은 바로 객실에서 볼 수 있는 뷰였다. 내 방은 건물 코너에 있어서 사면 중 두 면이 통유리였는데, 이 유리창 너머로 울창한 나무들이 보여 침대에 앉아 바라만 보아도 마음이 정화된다. 호텔의 시티뷰나 오션뷰에 버금가는 이 ‘그린뷰’에 반해 바로 예약했다.


▲ 시티뷰도 오션뷰도 아닌 나무뷰


방콕에 온 지 4일째 되던 날 숙소 이동을 했다. 시끄러운 주말의 카오산 로드(Khaosan Road, ถนนข้าวสาร)과 달리 랑수안 로드(Langsuan Road, ซอยหลังสวน)는 보다 정돈된 느낌으로 높은 건물도 많았다. 호텔 베란다에 있는 의자에 앉아 생각해보니 방콕 여기저기에 식물들이 많았다. 실내, 실외 구분 없이 어디를 가도 보이는 식물들을 보고 있자면 방콕이 거대한 정원처럼 보인다. 언젠가 들은 ‘어반 포레스트’라는 말이 이제야 뭔지 알 거 같았다. 자연을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이곳에서만큼은 나도 식물과 꽃 사진을 찍어대게 되었다. 이국적인 꽃들과 큼지막한 잎은 아무리 봐도 익숙해지지 않아 지루할 일이 없다.


일요일에는 통로역(Thong Lo Station, สถานีทองหล่อ)에 있는 카페에 갈 겸 산책을 갔다. 살을 태울 듯이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스스로를 고문하듯 걷고 또 걸었다. 엄청나게 큰 마트 앞에 있는 프랑지파니 나무들이 쉬고 가라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나무 밑 그늘에 쉬고 있는 사람들과 동참해 앉아있으니 조금 살 것 같았다. 프랑지파니 나무들 뒤로 작은 분수를 둘러싼 작은 묘목들과 키가 엄청 큰 나무들이 상쾌한 기분을 주었다. 내 머릿속 도시는 바쁘게 돌아가는 회색빛 콘크리트 정글인데, 방콕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자연과 뒤섞여 생기 넘치는 방콕은 사람들의 걸음을 늦춰준다.


▲ 프랑지파니 나무 밑에서 휴식하는 사람들





5. 태국 왕을 만나고 싶다면? 영화관에 갈 것


늦은 밤 혼술을 하고 택시로 귀가하는 것이 분명 나의 계획이었는데 이상하다. 운전사가 오케이 하면서 내리라고 한 곳은 카오산 로드(Khaosan Road, ถนนข้าวสาร)치고는 너무나 어둡고 고요했다. 운전사에게 다시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돌아보니 택시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휴대폰으로 내 위치를 확인하니 방콕 왕궁(Grand Palace, พระบรมมหาราชวัง)과 왓포 사원(Wat Pho, วัดโพธิ์) 사이. 숙소까지는 걸어서 24분. 보슬비까지 내려 평소 같았으면 택시를 다시 찾아 탔을 법도 한데, 그날은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다. 비록 안은 못 보지만 이렇게라도 사원과 왕궁을 구경해보고 싶었다. 쉽사리 끝이 보이지 않는 사원 벽을 따라 걷다 보니 멀리서 사람들이 보였다. 엄청나게 긴 노란색 천을 벽에 이리저리 대며 얘기를 나누는 스님과 한 여자였다. 덥고 늦은 시간에도 종종 웃으면서 일(?)하고 있는 모습이 인상 깊으면서도 왜 한밤중에 천으로 벽을 장식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한 잔만 더 마셨더라면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물어봤을 텐데 말이다!


▲ 이상한 곳에 내려져서 운이 안 좋았다 생각했으나 이 모습을 보고 횡재한 기분이 들었다.


다음 날 평소와 같이 어슬렁어슬렁 걷다가 지나가게 된 미얀마 대사관 덕분에 그 이유를 알게 됐다. '국왕 라마 10세의 탄생일에 대한 대체 휴일로 7월 29일 월요일 대사관은 문을 열지 않습니다.’ 그제야 태국에서는 노란색이 왕을 상징한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어젯밤 그 사람들은 국왕의 생일을 위한 장식을 준비했던 것이었다. 쇼핑몰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느 쇼핑몰을 가나 국왕의 사진과 ‘Long Live The King’이라는 문구를 볼 수 있었다. 심지어 시암 파라곤(Siam Paragon, สยามพารากอน) 앞에서는 현왕의 초상화들을 전시하고, 전통춤 공연과 돼지머리가 올라간 고사상까지 선보였다. 요리할 때 절구를 이용하고, 매운 음식도 즐겨먹고, 고사상에 돼지머리까지 올리는 등 한국과 비슷한 문화를 볼 때마다 같은 아시아인으로서 동질감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여기저기서 왕을 찬양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매우 낯설었다. 태국이 가깝게 느껴지다가도 멀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 돼지머리를 놓고 기도를 하며 의식을 치르고 있다
▲ 태국 전 국왕인 라마 9세와 현 국왕 라마 10세


귀국 전날 마지막으로 태국에서 해보고 싶었던 일을 위해 시암 파라곤 쇼핑몰(Siam Paragon, สยามพารากอน)로 갔다. 이날의 미션은 바로 태국의 영화관 체험이었다. 해외의 영화관도 한국과 같이 평범하게 팝콘과 콜라를 팔지만, 개중에는 소소하게 색다른 경험을 주는 곳도 있다. 우리나라 극장의 치맥 메뉴나, 미국 LA에 있는 여러 가지 테마의 영화관이나, 상영관 안에 화장실이 구비되어 있는 싱가포르 극장같이 말이다. 영화에 보너스로 나라마다 다른 문화를 볼 수 있으니 안 가볼 이유는 없다.


이 극장의 상영관들이 다양했는데 어떤 차이가 있는지 몰라서 헤매고 있으니, 직원이 나타나서 도와줬다. 일반 2D, 4D, 아이맥스에, 뮤지컬 극장 같이 1, 2층으로 나눠진 상영관, 제공되는 음식과 음료를 먹으며 누워서 영화를 볼 수 있는 프리미엄 상영관까지 있다. 옵션에 따라 가격은 220밧부터 3500밧(프리미엄 상영관 가격인데 무조건 2인 구매)으로 한화로 약 9,000~140,000원 정도이다. 


▲ 영화 티켓(좌)과 상영중인 영화와 각 상영관을 보여주는 전광판(우)


직원이 나에게 프리미엄 상영관을 추천해줬으나 시간대를 핑계로 뮤지컬 극장같이 1, 2층으로 나눠진 상영관에서 보게 됐다. 극장에서 파는 음식은 가지고 들어가도 된다는 확답을 듣고 음료수를 사 들고 자리에 앉았다. 한 15~20분 정도 광고를 보여주더니 화면에 태국어와 영어로 '자리에서 일어나 왕에게 예를 표하라'라는 문구가 쓰여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일어나는 소리에 나도 덩달아 일어났다. 빠르게 지나가는 국왕 라마 10세의 어렸을 적부터 현재까지의 모습을 다 보고 나서야 영화 상영이 시작됐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마저 국왕의 사진을 보며 예를 표해야 한다니 이색적이면서도 이상한 경험이었다. 태국 사람들이 왕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일어서는지 의무감에 일어서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됐든 간에 태국인에게 국왕이란 삶의 일부이다.





나는 나만의 느린 페이스로 나만의 길을 간다


▲ 욕조에서 보이는 창 밖

  

눈을 뜨자마자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니 아침 9시,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다. 무의식도 오늘이 마지막날이라는 걸 알았나 보다. 침대에서 일어나 커튼을 걷으니 우거진 나무들이 보인다. 욕조에 물을 채우는 동안 간단히 아침을 해결하고 욕조 옆 미닫이 문을 열어놓으면, 나만의 소소한 휴식시간 세팅 완료다. 푸른 나무들을 바라보며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니 신선놀음이 뭐 별 거 있나 싶다. 리셉션 직원에게 고맙다고 인사하며 체크아웃을 마쳤다. 사람들 틈에 끼어서 점심 먹고, 현지인이 마트에서 무얼 먹고 사는지 구경도 하고, 지나가다 보인 편의점에서 직원이 직접 만들어주는 커피도 마셔보고, 벤차시리 공원(Benchasiri Park, สวนเบญจสิริ)에서 사람들이 운동하는 모습을 구경하다 보니 어느새 떠날 시간이다. 일주일은 참 길면서도 짧았다. 


▲ 통로(Thong Lo) 어느 카페에서 마신 커피. 저녁 비행기라 여유롭게 보낼 수 있었다


내가 어느 도시에 있든 여행할 때 반드시 지키는 한 가지는 바로 걸어보는 것이다. 대중교통이나 택시보다 목적지에 늦게 도착하지만 느린 템포로 느낄 수 있는 그 도시의 분위기를 놓칠 수 없기 때문이다. 가끔은 길을 잘못 드는 것조차 재미있는 실수로 다가온다. 자연 속 어드벤처를 즐기는 사람들처럼 나는 도시 속 탐험을 즐긴다. 이번에도 나만의 페이스로 느리게 돌아다니며 도시를 탐험했다. 사원은 어떻게 생겼고, 왕궁은 어떤 역사가 스며있는지, 어디에 맛집이 있는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이곳 사람들이 친절하고, 노상음식점이 많으며, 얼마나 많은 요소들이 더해져 태국음식이 되는지, 도시 어디에서도 식물을 볼 수 있듯 어디서든 태국왕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소소하지만 몰랐던 점들을 알게 되고 그 내용을 작은 노트에 적을 때마다 심장이 흥분으로 두근거렸다. 개인적 경험의 영역을 넓혀나가는 즐거움은 미래 어느 점에 있을 또 다른 여행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게 만든다.





에어비앤비 작가, 윤재원

어쩌다 보니 이 나라 저 나라에서 살다가 지금은 정착 중인 자택경비원 겸 백수 5개월 차

여행 다니면서 사진 찍고, 낙서하고, 쓸데없는 생각하는 걸 좋아합니다.


인스타그램_@yoonj1i



매거진의 이전글 밥해먹기 위해 떠난 폴란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