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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어비앤비 Dec 23. 2019

서른 살의 방학, 파리에서 한 달 살기

혼자 그리고 함께 파리에서 보낸 낭만적인 기록

올해 나는 퇴사를 했고 인생의 짧은 방학을 맞이했다. 내 맘대로 떠나고 돌아올 수 있는 기회인 만큼 두 달이라는 긴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다. 흔히 말하는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은 아니었고, 그동안 꾸준히 시간을 내어 떠났던 것처럼 이번에도 자연스럽게 여행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목적지는 어렵지 않게 정할 수 있었다. 가장 좋아하는 도시인 파리에서 한 달, 가장 가보고 싶었던 나라인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한 달씩 여행하기로 했다. 그리고, 파리에서의 한 달 동안에는 내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자 소중한 사람인 엄마와 남자 친구가 오기로 했다. 그렇게 8년 전 관광지를 찾아 바쁘게만 돌아다녔던 파리에서, 이번에는 가장 좋아하는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Midnight In Paris)>의 오프닝 장면처럼 낭만적인 그들의 일상에 머무르기로 했다. 


▲ 프랭탕 백화점(Printemps Haussmann) 루프톱에서 바라 본 파리




혼자 살아보며 여행하는 법

‘자발적으로 외로워지기’ 조금은 어색한 단어의 조합이지만, 나 홀로 하는 여행에서는 꽤 잘 어울리는 말인 것 같다. 엄마와 남자 친구가 오기 전까지 2주 동안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다. 매일 새로운 일정으로 가득 차 있던 그동안의 여행과는 다르게, 오며 가며 지나치는 일상적인 풍경이 생겼고 좋았거나 아쉬웠던 곳은 다시 가볼 수도 있었다. 


▲ 그들에게는 일상이지만, 나에게는 아름다운 파리의 모습들


걷고 싶을 때 걷고 쉬고 싶을 때 쉬며 여유롭게 바라본 파리는 더 아름다웠다. 사진을 찍고 떠나는 관광객들의 모습보다는 공원에서 책을 읽고 카페에서 마주 앉아 대화하는 파리지앵들의 일상을 더 많이 볼 수 있었다. 그 모습이 때로는 에펠탑(Tour Eiffel)이나 루브르 박물관(Musée du Louvre)보다 더 파리답다고 느껴졌다. 엄마와 남자 친구가 오면 꼭 이렇게 파리의 일상적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곳도 데려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파리에서 떠나는 과거로의 시간 여행 

'오래되었지만 더욱 가치가 있는 것들(Oldies-but-goodies)' 내가 파리를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도시 그 자체가 과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잘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보물 찾기를 하듯 다양한 옛 물건들을 구경할 수 있는 곳이 있는데, 매 주말마다 파리 외곽인 14구에서 열리는 방브 벼룩시장(Puces de Vanves)이다. 오래된 가구부터 그릇, 소품, 책과 엽서, 거리의 표지판까지 정말 다양한 옛 물건들이 많아, 빈티지를 좋아하는 여행자라면 한 번쯤은 가볼 만한 곳이다. 그래서 나도 파리에서의 첫 토요일 이른 아침부터 목과 허리가 뻐근할 정도로 흠뻑 빠져 구경을 했다. 


또한, 파리 시내에서 우연히 가게 된 곳 중 갤러리 비비엔느(Galerie Vivienne) 파사주(Passage)도 정말 좋았다. 파사주란 맞닿아 있는 건물 사이 골목에 유리로 된 지붕을 씌워 실내 통로처럼 만들어 놓은 공간이다. 19세기 문화와 예술을 선도하던 부르주아 계층이 지저분한 파리 시내를 피해 쇼핑과 여가를 즐기려고 만든 일종의 상점가라고 한다. 1850년에는 총 150개가 넘는 파사주가 파리에 있었다고 한다. 소위 말해 그 당시의 ‘핫플’이 아니었을까 싶다. 


▲ 파리 시내에 숨겨진 시간 여행지, 갤러리 비비엔느


지금은 파사주가 많지 않지만, 남아 있는 곳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우아하다고 알려진 곳이 바로 갤러리 비비엔느이다. 파리 2구에 위치한 이곳은 루브르 박물관이나 팔레 루아얄(Palais-Royal)에서도 가까운데,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아 비밀스러운 시간 여행지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방브 벼룩시장처럼 물건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레스토랑, 옷 가게, 와인숍, 고서점 등 다양한 상점이 입점해 있다. 특히, 고서점은 이 파사주가 생긴 1820년 대부터 이어져 오는 오래된 곳이라고 한다. 고서점에 들어가 옛날 책과 엽서를 구경하다 보니 그 시절의 이야기들이 재생되는 것 같았다. 만약 파리에 있는 동안 방브 벼룩시장에 가는 것이 어렵다면, 이렇게 파리 시내 곳곳에 남아있는 파사주를 찾아가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에 들어온 것 같았던 놀이공원 박물관

 

파리에서 시간 여행을 하는 방법 중 또 다른 하나는 바로 다양한 테마의 박물관에 가는 것이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촬영지를 찾다가 가게 된 놀이공원 박물관(Musée des Arts Forains)은 파리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이다. 한 프랑스인이 19세기에서 20세기 초 유럽의 놀이기구를 수집해 전시한 이곳은 파리 외곽인 12구에 위치하며, 사전 예약을 통한 가이드 투어만 할 수 있다. 내가 갔을 때는 성수기가 아니어서 프랑스어 투어만 가능했지만 한 번 가보기로 했다. 


놀이공원 박물관 투어가 끝나고 이 투어를 신청한 나를 칭찬했다. 거대한 와인 저장고를 개조해 만든 전시 공간, 파리 만국박람회 오브제부터 다양한 유럽 국가의 회전목마,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경마 게임, 무도회장에서 음악에 맞춰 왈츠를 추는 사람들, 모두의 힘을 모아 빠르게 달리는 자전거 카루젤(Carrousel)까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신기한 물건들과 풍경들이 눈 앞에 펼쳐졌다. 각 나라의 흥부자들만 모인 것 같았던 투어 참가자들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직접 놀이기구를 타보고 음악에 몸을 맡기며 ‘어른이’가 되었다. 예쁜 원피스를 차려입은 영국 언니들 덕분인지, 영화 속 한 장면 같은 이곳에 혼자 왔다는 것이 조금 아쉬웠지만, <미드나잇 인 파리>의 주인공도 홀로 시간 여행을 떠났던 것처럼 혼자만의 시간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 들었다.




파리라서 불편하지만, 파리여서 가능한 것들 

파리에는 불편한 것이 참 많다. 지하철 문이 수동이고, 건물에 엘리베이터가 없거나 아주 작은 경우가 대부분이며, 레스토랑에서 주문이나 계산을 하려면 꽤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그런 불편함도 파리의 모습 중 하나일 것이다. 사실 특별한 에펠탑 뷰 때문에 가고 싶었던 에어비앤비가 있었는데, 엘리베이터가 없는 7층에 위치한 곳이라 고민이었다. 그래도 엄마도 이 뷰를 보면 좋아할 거라 믿으며, 에어비앤비를 예약했다. 


에어비앤비 체크인 날,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둡고 비좁은 원형 계단 앞에서 우리는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각자 차근차근 올라가 보려고 했지만 30kg 정도의 캐리어를 들고는 몇 계단조차 오르기 힘들었다. 결국 엄마는 앞에서 캐리어의 손잡이를, 나는 뒤에서 바퀴를 들고 7층까지 총 3번을 오르락내리락 했다. 엄마는 ‘그놈의 감성’ 때문에 이게 무슨 일이냐고 했지만, 고생한 만큼 뷰가 너무 멋있어서 창문 앞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는 힘겨운 체크인을 마치고 서로 널브러져 있던 그 상황이 웃겨 함께 창밖을 바라보며 빵 터지고 말았다.


▲ 에펠탑이 한눈에 보이는 아치형 창문이 있는 에어비앤비


이곳은 파리의 7구 트로카데로(Trocadéro)에서 도보 3분이라는 위치, 파리 느낌이 물씬 나는 벽난로와 소품들, 엄마가 좋아하는 캡슐 커피와 다양한 조리 도구 등 파리를 여행하기에 좋은 공간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특별한 에펠탑의 모습을 일상에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충분한 곳이었다. 엄마와 새벽 1시에 맥주를 마시며 바라본 반짝이는 화이트 에펠탑과 동틀 무렵 잠시 잠에서 깨어 본 핑크 하늘의 에펠탑은 우리가 머무른 에어비앤비이기 때문에 가능한 순간들이었다. 이후 엄마와 나는 백발의 할머니가 이 건물의 계단을 오르내리는 모습을 보고 엘리베이터가 없는 것도, 낡은 계단도, 2~3개씩 가지고 다녀야 하는 열쇠도 모두 파리의 모습이고 그러한 일상을 함께하는 것도 좋은 경험이고 추억이라는 생각을 했다.


▲ 엄마가 깨우지 않았더라면 보지 못했을 풍경




비 오는 날의 티 타임, 파리지앵의 일상에 머무른 순간

파리의 행정 구역은 16세기 중반 왕궁이었던 루브르 박물관이 있는 1구를 중심으로, 20구까지 달팽이의 집처럼 동그랗게 펼쳐진다. 흔히 파리 숙소 추천 글을 보면 이 ‘구’를 기준으로 숙소 주변의 특징도 나누어지고 가격도 다르게 형성된다. 남자 친구와는 파리에 며칠 있다가 다른 도시로 이동해야 했기 때문에, 숙소를 찾을 때 다른 조건들과 함께 위치를 눈여겨보았다. 


그렇게 찾은 에어비앤비는 파리의 한가운데인 1구에 위치하면서 가격대는 참 착했던 곳이었다. 창 밖으로 튈르히 가든(Jardin des Tuileries)에서 루브르 박물관으로 가는 길이 보일 정도로 위치가 환상적이었다. 덕분에 오페라(Opéra) 지역부터 센 강(la Seine)의 아래쪽까지 걸어 다닐 수 있었고, 힘이 들 땐 잠시 들어와 쉴 수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파리 특유의 회색 지붕이 보이는 큰 사선 창문과 고급스러운 빈티지 가구까지 집 안에서도 파리 감성을 한껏 느낄 수 있었다.


▲ 파리 중심에 있음을 느낄 수 있었던 에어비앤비


이곳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호스트 빅토와르(Victoire)의 할머니와 함께한 티 타임이었다. 빅토와르는 체크인 전 숙소에 도착한 우리에게 바로 아래층에 살고 계신 할머니 댁에 짐을 맡기라고 했고, 할머니는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그리고, 비도 오는데 따뜻한 차 한 잔 내어 주시겠다고 하셔서 진짜 파리지앵의 집에서 티 타임을 갖게 되었다. 


▲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풍기는 할머니의 거실
▲ 할머니가 주신 따뜻한 홍차와 오랜만에 보는 진짜 세계 지도


너무 예쁜 빈티지 주전자 그리고 찻잔에 담긴 따뜻한 홍차와 함께, 할머니와 파리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파리 이외에도 다른 도시를 여행한다는 말에 할머니는 방에서 큰 세계 지도를 가져와서 우리의 다음 여행지에 대해 묻기도 했다. 혼자 파리 중심가를 돌아다닐 때, 진짜 파리지앵이 살고 있는 집은 어떨까 궁금했는데 운이 좋게도 멋지고 사려 깊은 할머니를 만나 조금이나마 그 궁금증을 풀 수 있었다. 잠깐이었지만 파리지앵의 일상에 함께한 시간, 에어비앤비 덕분에 경험할 수 있었던 이런 소소한 에피소드가 또 하나의 추억을 만들어 주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다시 찾은 곳

파리에는 크고 작은 공원과 노천카페가 많다. 한국에서도 햇볕이 좋은 날이면 회사 옥상 테라스나 벤치에 앉아 광합성하는 것을 매우 좋아했기 때문에, 누구든지 쉴 수 있는 초록 의자가 있고 따스한 햇볕과 낮잠을 즐길 수 있는 파리의 공원이 참 좋았다. 또한, 파리에서는 굳이 큰 창이 있는 카페를 찾지 않아도 된다. 대부분의 카페나 레스토랑이 야외 좌석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커피 한 잔에 크루아상(Croissant)이나 팽 오 쇼콜라(Pain au Chocolat) 하나면 따뜻한 햇볕과 파리의 길거리를 함께 즐길 수 있는 노천카페도 공원만큼 좋아했던 공간이다. 그래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파리에 왔을 때, 가장 좋았던 파리의 공원과 노천카페를 다시 찾았다.


▲ 엄마의 프로필 사진으로 부족함이 없는 뤽상부르 공원(좌) / 내가 상상했던 파리의 모습, 낭만주의 박물관 정원 카페(우)


5년 정도 일하고 이렇게 쉬고 있는 나와는 달리, 엄마는 거의 30년 동안 쉼 없이 일하고 있다. 그런 엄마에게는 이번 파리 여행이 오랜만의 긴 휴가였기 때문에 내가 느꼈던 여유로움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파리의 다양한 공원 중 엄마와 함께 간 곳은 파리 6구에 위치한 뤽상부르 공원(Jardin du Luxembourg)이다. 파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원인 이곳에는 뤽상부르 궁이 있고, 분수와 나무 이외에도 예쁜 꽃들이 참 많다. 엄마의 프사를 책임질 꽃과 풍경을 바라보며, 보기보다 편안한 초록 의자에 앉아 멍 때리는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남자 친구와는 내가 상상했던 파리의 낭만적인 일상을 볼 수 있었던 낭만주의 박물관(Musée de la Vie romantique)을 다시 찾았다. 파리 9구에 위치한 이곳은 19세기 낭만주의에 영향을 받은 예술가들의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는 곳으로, 무료 상설 전시도 좋았지만 나무 사이로 햇볕이 부서지는 정원 카페에서의 시간이 정말 좋았던 곳이다. 조금은 쌀쌀해진 날씨 때문인지 혼자 왔을 때만큼 초록 초록하지는 않았지만 파리에서 가장 좋았던 곳에 다시 함께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 나란히 앉아 파리의 거리를 바라 볼 수 있는 노천 카페(좌) / 진한 맛의 쇼콜라 쇼(우)


혼자 파리에 관한 책을 읽으며 사람 구경을 했던 노천카페에도 갔다. 레 되 마고(Les Deux Magots)카페 드 플로르(Café de Flore)는 생제르망(Saint-Germain) 거리에 나란히 위치한 카페이다. 두 곳 모두 헤밍웨이, 카뮈, 피카소와 같은 유명 예술가들이 즐겨 찾았던 카페로, 그 역사가 100년이 훌쩍 넘는다. 남자 친구와는 혼자 갔던 레 되 마고에 갔고, 엄마와는 그 옆의 카페 드 플로르에 갔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처음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레 되 마고에서 모였었는데, 주로 노천에서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카페 드 플로르가 오픈하자 새로운 난방 장치에 반해 바로 아지트를 옮겼다고 한다. 이처럼 추운 겨울에도 천장에 난방 장치를 설치하면서까지 야외 좌석을 사랑하는 파리지앵들인 것 같다. 남자 친구와는 비 오는 날에, 엄마와는 맑은 날에 나란히 앉아 ‘헤밍웨이가 자주 왔던 곳이래’라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고, 따뜻한 쇼콜라 쇼(Chocolat Chaud)도 함께 마셨다. 쇼콜라 쇼는 양이 많고 매우 진한 편이라 두 명이 간다면 쇼콜라쇼 하나와 다른 메뉴 하나를 시키는 것도 좋을 것 같다.


▲ 해 질 무렵의 센 강, 파리의 낭만적인 밤이 만들어 지는 시간


이렇게 오롯이 혼자 보내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보내기도 했던 파리 한 달 살기가 끝이 났다. 그렇게 원했던 에펠탑도 원 없이 보고, 축구도 두 번이나 보고, 대학생 때는 가보지 못한 레스토랑도 마음껏 가보았는데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그래도 이렇게 아쉬운 마음이 들어야 또 가야 할 이유를 만드는 거겠지. 어쨌든 내가 꿈꾸었던 도시 파리에서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많은 것을 누리며, 그들의 낭만적인 일상에 머물고, 당연한 것의 소중함을 깨닫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었음에 감사하다. 




에어비앤비 작가, 민나

Marketing, Branding, and sometimes Traveling. 감성적인 것과 낭만적인 것을 좋아하고 취미는 축구장에 가는 것이며 언제나 하고 싶은 것과 사고 싶은 것이 많은 마케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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