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산반도 앞 에어비앤비에서 게으르게 보낸 시간
‘내 고향은 폐항. 내 고향은 가난해서 보여줄 건 노을밖에 없네.’
영화 <변산>을 본 사람들이라면 이 문장을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이곳의 노을을 바라보고 싶어질 것이다. 서해의 낙조는 변산이 자랑하는 여덟 가지 풍경에도 포함되어 있다. 해가 지는 것은 전국 어디에서나 일어나는 일이지만, 한순간, 한 장면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해는 어느 곳에서나 지지만 모든 곳에서 해지는 풍경을 보고 싶어하진 않는다. 하지만 서해에서, 특히 부안에선 그 풍경을 마주하고 싶어 진다. 매일 뜨고 지는 해지만, 비로소 만날 수 있게 된다. 일출을 보러 동해로 떠날 때, 낙조를 보러 서해로 떠나는 여행. 부안은 조용히 떠나고, 조용히 머물고 싶을 때 찾게 되는 곳이다.
- 이 숙소는 안도현 선생님께서 때때로 머물다 가시는 방입니다. 오로지 혼자 글을 쓰거나 책에 전념할 수 있는 작은 공간이에요.
- 한적한 바닷가 절벽 위에 있기 때문에 조용합니다. 문득 바람이 불면 작은 창문으로 댓잎소리가 들리고, 밀물에는 파도소리가 방을 가득 채웁니다.
- 책상에는 저희가 골라 놓은 시집과 나무 라디오 외에도 ‘문장 노트’가 있습니다. 이 방을 다녀가시는 분들의 마음에 들어온 문장들이 적혀 있어요.
- 나무 선반에는 커피를 직접 내려 드실 핸드 드립 키트를 준비했습니다.
어느 여름, 취재를 위해 부안을 찾았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띈 숙소의 방 소개 글은 이랬다. ‘안도현 시인의 방’이란 부제가 붙어있는 방. 실제로 안 시인과 친분이 있는 이곳 주인장이 시인이 머물며 창작을 할 수 있게 돕고 있는 공간이자 손님을 받고 있는 숙소다. 이 지역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었다는 야생화가 펜션의 이름이 되었다. 스테이 ‘변산바람 꽃’.
변산반도와 부안보다 이 방이 궁금했다. 이곳에 머물면, 하루쯤 나도 시인이 될 수 있을까. 그 방에서 자고 일어나면, 나도 시인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까, 시인이 머무는 공간은 과연 어떨까… 호기심과 들뜬 마음으로 부안 터미널에, 다시 부안 시내에서 작당마을로 향했다. 터미널에서 탄 버스를 타고 40분쯤 흘렀을까, 숙소가 있는 '작당마을'이 안내방송으로 흘러나왔다. 오직 나 혼자, 이곳에서 내렸다.
낮은 언덕을 따라가니 사진으로 봤던 나무집이 보인다. 마치 영화 세트장처럼 보이는 이곳. 때론 완벽한 익명성의 호텔을 선호하지만, 가끔은 작고 개성적인 숙소가 눈에 들어온다. 규모가 작고, 사적인 취향을 반영하는 공간이 있는 곳. 체크 인 시간에 맞춰 키를 전달받고 방문을 열었다.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 보이는 작은 방. 하지만 이 작은 방 안에서도 할 것이 많다. 방 안에 놓인 책을 읽고, 직접 원두를 갈아 내 손으로 커피를 내린다. 부안의 내소사, 채석강 같은 관광지는 다음 날로 미뤄두고 긴 하루를 온전히 방에서 보낸다.
어쩌면 우리 각자의 집, 방보다도 작은 공간이지만 이 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정서가 있다. 창을 바라보며 놓인 책상 위에는 시집과 책, 작은 노트가 마련되어 있다. 특히 노트에는 지난해 어느 날부터 이 방에서 시간을 보낸 이들이 습작, 읽은 책의 한 구절, 부치지 못하는 편지 등을 적어 두었다. 혼자 떠났지만, 내가 오기 전 이곳에 머물던 이의 소리를 듣는 경험- 이것 또한 이 방의 선물이기도 하다.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
새가 지저귀는 소리,
나뭇잎과 바람이 대화하는 소리…
조용하지만 …소란스러운.”
노트 속 이 문장에 유독 눈이 머문다. 조용히 소란스럽게 나에게 말을 건네는 방. 나도 모르게 나에게 계속 대화를 걸게 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지금 가장 그리운 이가 누구인지, 인생의 버킷리스트는 무엇인지. 지금은 안부를 물을 수 없는 이가 된 사람도 전부 그리워져 부치지 못할 편지도 한 통 쓰고 싶어 진다. 유독 이 자리에서 생각이 났던 지인에게는 주소를 물어 편지 한 통을 적었다. 그렇게, 창과 책상, 스탠드와 공간의 분위기가 일상의 속도를 조금 늦춘다.
누군가의 문장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글을 쓴 이를 혼자 상상해보기도 하고, 글로 만난 이의 안녕을 바라게 되는 곳. 분명 부안에 이 숙소보다 편의시설이 더욱 좋고 편리한 곳도 있겠지만, 이곳만큼 사람의 마음을 건드리고, 무언가 글을 쓰고 싶어 지는 장소를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소란스러워지는 마음을 다잡고, 또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그런 힘을 준다고 할까.
이 방에는 원두를 가는 기계가 놓여있다. 또 드립 커피용 주전자, 전기 주전자.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커피 그림책이란 부제가 있는 책 《ABOUT COFFEE》. 그림을 보며, 그림 속 주인공처럼 원두를 직접 갈아서, 나만의 속도와 방식으로 한잔의 커피를 끓여내고 싶어 진다.
물을 끌이고, 원두를 갈고, 그 향을 느끼며 여과지를 드리퍼에 넣고, 끓인 물을 천천히 부어 원두가 부풀어 오르는 것을 바라본다. 작은 방에 퍼지는 커피 향기가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기계로 금방 뽑아내는 아메리카노 한 잔보다, 드립 커피 한 잔이 진정한 커피 한 잔의 여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원두를 갈고, 여과지를 담고, 물을 끓여 천천히 원을 그리며 커피를 내리는 과정-이 진정 커피가 전해주는 여유인 것만 같다.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이 방에 종종 머물다 간다는 시인을 생각한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안도현 , <너에게 묻는다>
단 세 줄의 이 시가 마음에 오래 남아서 겨울에 연탄이 있는 골목을 지날 때, 그 연탄을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숙소가 맘에 들어 여행을 시작할 때는, 되도록 일찍 들어가 오랜 시간 숙소에 머문다. 읽고, 듣고, 마시고… 이곳에서는 시집도 더욱 잘 읽힌다. 참 좋아해서 여러 권을 선물하기도 했던 시집 《지금 여기가 맨 앞》 도 반갑게 책상 위에 놓여있었다. 한 권의 책은, 자신의 마음 상태에 따라서 좋았던 문장이 다르다. 분명 같은 책을 읽었는데, 그 안에 이런 내용이 있었는지, 때론 기억하지 못한다. 2014년의 시집을 2019년, 다시 읽게 되었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지?’ 잠을 청하다 갑자기 비가 오나, 싶어서 문을 잠시 열었다. 비는 오지 않았고 땅도 깨끗하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낮에 봤던 그 바다에 물이 채워지는 소리였다. 내가 묵었던 날은 자정이 가장 물이 많을 때였고, 오전 6시가 가장 물이 적을 때였다. 밤사이 물이 들어서고 빠지다니! 놀라고 또 놀랐다. 바닷물 찰랑거리는 소리가 저녁 잠자리의 배경음악이 되다니! 밀물과 썰물- 그저 단어로만 알고 있던 두 글자를 이곳 부안에서 내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달의 변화와 함께 물때가 매일 다른 것도 이곳에 직접 와서야 눈으로 확인한다. 이 지역에선 어디든 물 때 시간표가 있다. 이곳에 머물면 매일 물이 차고 빠지는 이 신기함, 물의 부지런함에 감동하고 ‘조수간만의 차’가 무엇인지 확연히 알게 된다. 단 하루만의 여행이라도 휴식을 원한다면, 시집과 함께하고 뒹구는 여행을 꿈꾼다면, 자연의 부지런함을 배워보고 싶다면 그 어떤 곳보다 부안을 권한다. 하룻밤 사이 물이 들고 난 바다를 바라보면 우리 모두 시인의 눈과 마음으로 세상을 마주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을 잘 알며 사랑하는 이들을 만나면 왠지 미소가 지어진다. 여행을 떠날 때, 어떤 이의 한 마디 말과 풍경에 대한 묘사가 우릴 그리로 데려갈 때가 있지 않은가.
“겨울에, 채석강에서 맞는 눈도 정말 멋져요. 아, 가을 내소사도 단풍나무가 많아서 좋은데..”
당시 한 우체국 취재를 위해 부안에 갔던 나는, 격포 우체국에서 일하는 이들에게 부안의 좋고 멋진 것을 구체적으로 듣게 되었다. 어쩌면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 애정이 듬뿍 있는 이들을 통해 우린 또 여행을 계획한다.
서해안에는 3대 해수욕장이라고 꼽히는 곳이 있다. 바로 대천 해수욕장, 만리포 해수욕장, 그리고 격포 해수욕장이다. 특히 이곳에선 해수욕장 왼쪽의 채석강도 만날 수 있으니 서해안의 어느 해변보다 으뜸이다. 채석강은 화강암과 편마암이 수만 권의 책을 쌓아 놓은 듯이 보이는 수직 암벽이다. 썰물 때면 드넓은 암반이 드러나 직접 걸어서 가까이 갈 수 있다. 이때에는 해식동굴까지도 들어갈 수 있다. 만조일 때 이곳을 찾는다면 그저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없으니, 채석강에 갈 땐 꼭 물 때 시간을 확인하자. 해식동굴 안에서 바깥으로 해지는 낙조를 바라보는 것도 채석강이 주는 큰 선물 중 하나로 꼽는다. 예전에는 채석강 앞에 쭉 포장마차가 있어서, 채석강을 바라보며 술 한잔하는 낭만이 있었지만, 지금은 다리가 놓이고 포장마차들도 모두 사라졌다고 한다.
나는 부안에서 바다가 언제나 물이 가득한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 언제나 내가 생각하고 정의하는 것이 다를 수 있다는 것, 바다의 낯선 풍경도 마주하고 돌아왔다. 이렇듯, 당연한 일상에 환기가 필요할 때, 분주한 여름보단 고요히, 조용히 남은 여름을 보내고 싶은 이들에게 특별히 추천하고 싶다.
특정 계절이 아닌 마음의 계절이 메말라 있을 때, 조용히 고요히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싶을 때, 많이 채워져 있어 비우고 싶을 때, 부지런해지고 싶을 때 눈과 귀에 시가 보이고, 들릴 때. 타인과 말하기보다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싶은 것이 많아졌을 때 이곳을 찾아가면 좋을 것이다.
좋아하는 시집이 있다면, 혹은 읽어보고 싶었던 시집을 일부러 이곳에서 읽어보자. 게으른 여행은 많이 움직이지 않는다. 방 안에서 시집으로 시인을 만나고, 또 그 이야기 속 어딘가로 나를 데려가 보자.
라디오 작가로 사회생활을 시작해 현재 여행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2020년 출간될 여행서를 작업 중이며, 각기 다른 이들의 사연을 듣고, 그에 맞는 여행지를 선정해주는 <여행작가 이지나의 여행처방>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단행본 《엄마 딸 여행》, 《서울재발견》 등 다수, 독립출판물 《대학원 일기》, 《성당일기》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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