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어비앤비 Jan 16. 2020

2019 고흥 오디세이

고인돌에서 우주까지


한적마을을 찾아서


독고라는 친구가 있다. 문신하는 놈이다. 어느 날 갑자기 서울을 뜨겠다고 했다. 남쪽 바닷가에 ‘한적마을’이라는 곳이 있는데 풍광이 아주 죽인다며 혀를 내둘렀다. 나는 정말 이름이 한적마을이냐고 되물었다. 독고는 으스대며 그렇다고, 이름처럼 아주 한적한 곳인데, 그곳에 이미 아는 형님이 내려가서 정착해 계시다고 했다. “나도 한 일 년 가서 쉬다 오려고.”


나는 터를 잡을 때 지명을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지금 이태원 해방촌에 살게 된 이유도 이름이 팔 할이다. ‘해방촌'은 말 그대로 내게 해방공간이다. 대한민국에서 비건, 퀴어, 외국인 등 소수자들에게 가장 열려있는 동네라고 자부한다. 원래는 해방 직후 난민들이 정착해 살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원어민 선생들이 많다. 이주민 정착지의 전통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해방촌이라는 이름이 바로 옆 경리단(국군 재정관리단) 길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조성한다.


해방촌이 아무리 좋아도 가끔은 그곳으로부터도 해방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던 차에 한적마을이라는 이름을 들었다. 바로 네이버 지도에 검색해봤다. ‘한적마을회관’ 밖에 안 나왔다. 지도상에 아무것도 없었다. 한적해 보였다. 산과 바다로 둘러 쌓여 있었다. “너 갈 때 나도 좀 같이 가자.” 독고는 좋다 했다. 그게 벌써 반년 전이었다.


그러다 에어비엔비 강연에 갔다. ‘여행자의 서재'가 주제였다. 나는 ‘리딩 파티(Reading Party)’에 대해 이야기했다. 영국 대학원 재학 당시 알게 된 전통이었다. 여름 방학에 이삼주 정도 알프스 산장에 들어가서 독서와 산책과 와인을 즐기는 프로그램이었다. 교수 한 명과 열댓 명의 학생들이 독서 목록을 만들어서 같이 읽고 토론도 했다. 내가 운영하는 책방 ‘풀무질'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제공하고 싶었다. 장소가 문제였다. 한국에서도 알프스 산장처럼 문명과 동떨어진 듯한 느낌을 줄 수 있는 곳이 어딨을까.

▲ 고흥군야구소프트볼협회장의 직책은 지고 있지 않다.

강연이 끝나고 나를 초청했던 에어비앤비 손하빈 님이 말을 걸었다. “고흥으로 가세요.” 본인도 일전에 그런 곳을 찾아 헤맸다고 했다. 미국의 버닝 맨(Burning Man) 페스티벌과 비슷한 것을 만들기 위해 전국을 다니다 발견한 게 고흥이었는데, 같이 간 동지들이 나중에 발을 빼서 수포로 돌아갔다고 했다. “제 친구는 한적마을로 간다고 해서 저도 거길 가보려고요.” 하빈님은 네이버 지도에 한적마을을 쳐보더니 놀랐다. “한적마을이 고흥에 있네요!”


주변에서 두 명의 사람이 동시에 한 곳을 가리키며 가보라고 하면, 가보는 게 맞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필연적으로 느껴졌다. 운명은 내가 그래도 머뭇거리는 것 같았는지, 한방 더 날렸다. 내가 운영하는 비건 식당 ‘소식’의 주방장 안백린도 알고 보니 고흥에 연고가 있었다. 거기서 농사를 지어서 팜투테이블(Farm-to-Table) 식당을 만들자고 했다. 구조된 동물들을 위한 생츄어리도 짓자고 했다.


고흥! 고흥! 고흥! 한적마을과 리딩 파티와 버닝맨과 팜투테이블과 생츄어리가 있는 곳.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유토피아. 내 머릿속에서 고흥은 이미 샹그릴라요, 무릉도원이요, 미래의 땅이었다. 그곳으로 가야만 했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애인이 영화를 보자고 했다. TV 스트리밍 서비스 중에서 아무거나 고르라고 했더니 스탠리 큐브릭의 1968년 대작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골랐다. 예전부터 보고 싶었지만 미뤄뒀던 작품인지라 이때다 싶었다. 영화는 인류의 시작부터 우주 항해까지 아우른다. 줄거리는 생략한다. 이 영화가 중요한 이유는 곧 이어질 고흥 여행의 전주와도 같았기 때문이다. 여행을 떠날 때는 그 목적지 자체의 객관적인 환경도 중요하지만, 여행자가 가지고 떠나는 인문학적 레퍼런스가 더 중요하다. 고흥을 가기 전에 큐브릭을 본 것이 신의 한 수였다.


고흥 여행은 단순히 전라도의 한 귀퉁이를 탐험하는 게 아니다. 시공간을 초월하는 행위다. 고인돌과 우주센터가 공존한다. 한반도에서 가장 큐브릭스러운 곳이 바로 고흥이다. 스페이스 오디세이 주제곡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들으며 거금대교를 건너보아라. 다리 건너 휴게소에 세워져 있는 20m 높이의 은빛 거인이 태양을 향해 손을 내뻗는 장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정말이지 그 조형물은 인류의 다음 진화 단계를 향해 나아가는 손짓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고흥 곳곳에 있는 ‘우주' 관련 지명, ‘우주휴게소', ‘우주로', ‘우주낚시' 등은 미래지향적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켜 준다.

▲ 우주에서는 무엇을 낚을까?

실제 나로 우주 센터가 있는 곳은 간척지다. 바다 사이에 널리 펼쳐진 평야는 미국 네바다 주의 사막을 연상시킨다. 그렇게 곧게 뻗은 도로는 한국에서 쉽게 볼 수 없다. 자동차로 직선을 달리다 보면 우주를 향해 이륙하는 듯한 환상이 든다. 그러다 군데군데 고인돌이 튀어나오는 식이다. 아, 이것들은 미국에서도 볼 수 없는 태초의 흔적들. 나는 작년에 텍사스에서 캘리포니아까지 혼다 자동차를 타고 내달린 적이 있다. 그때는 기껏해야 백여 년 전 서부 개척의 역사로 밖에 거슬러 올라갈 수 없었다. 현대 자동차를 타고 남해안을 달리다 보면 구석기시대가 보이거늘.


싸이키델릭한 로큰롤 반주에 오직 직진을 거듭하면서 나는 이번 여행의 제목을 정했다. “2019 고흥 오디세이". 인류의 여명부터 앞날까지의 대서사시를 나른한 주말 오후의 드라이브로 만끽하다.




필립 제이슨의 고향


고흥에는 에어비앤비 숙소가 많지 않았다. 그나마 괜찮아 보이는 곳은 예약이 차있었다. 나는 기왕이면 한옥에 묵고 싶었다. 한복 입고 한옥에서 쉬는 것을 좋아한다. 마침 고흥에서 가까운 보성에 기가 막힌 곳이 있었다. ‘목임당'이라는 번듯한 이름도 있었다. 리뷰가 극찬뿐이었다. 하지만 내가 결정을 내린 건 소개글의 마지막 한 줄이었다. “서재필 생가 바로 앞"


필립 제이슨. 그의 인생이야말로 대륙과 문명과 시대를 넘나드는 대여정이었다. 1864년 전라도 보성에서 태어난 서재필은 84년, 고작 스무 살의 나이에 갑신정변을 일으킨다. 조선을 개화시키겠다는 일념 하에 박영효, 서광범 등의 동지들과 함께 무력 쿠데타를 도모한 것이었다. 그러나 알다시피 갑신정변은 삼일천하로 끝난다. 조선을 가까스로 탈출한 서재필은 곧 미국으로 망명한다. 그러나 남겨진 그의 부모와 아내는 모두 죽임을 당한다. 반역자는 삼족을 멸하는 조선왕조의 전통 때문이다. 서재필은 미국에서 치를 떤다. 앞서간 자신의 뜻을 받아주지 못한 조선의 미개한 왕과 백성들을 경멸한다.


서재필은 새롭게 태어난다. 자신의 이름을 앞뒤로 뒤집어서 필재서,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으로 개명한다. 그는 한국인 최초로 미국 시민권을 얻었고, 의대까지 졸업한다. 그리고 제임스 뷰캐넌 미국 전 대통령의 조카인 뮤리엘 암스트롱과 결혼하여 미국 주류사회로 편입된다. 갑오개혁 이후 그는 복권되었고, 서광범과 박영효의 주선으로 귀국을 결심한다. 조선인이 아닌 미국인으로서 1895년 모국에 돌아온다. 조선을 떠난 것은 서재필이었으나 조선으로 돌아온 것은 필립 제이슨이었다.


미국인 부인과 경호원을 데리고 양복을 차려입은 채 제이슨이 성문 안에 들어서자 장안이 떠들썩했다. 그는 조선말을 쓰지 않았다. 고종을 만날 때도 허리를 굽히지 않았다. 더 이상 조선의 신민이 아닌 미국의 시민으로서, 통역관을 통해 영어로, 안경도 벗지 않은 채 (당시 조선에서는 왕 앞에서 안경을 벗는 게 예의였다) 이야기했다. 미국에 오래 살아서 모국어를 까먹었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그보다 복잡한 감정이 교차했을 것이다.


제이슨은 조선을 미국화하고 싶어 했다. 독립신문을 편찬했다. 민중 계몽을 위한 한글판과 선교사들을 위한 영어판을 동시에 간행했다. 조선 최초의 시민단체인 독립협회를 발족했다. 백성들을 개화하여 조선의 민주화를 꾀하기 위함이었다. 독립문도 세웠다. 하지만 수구파와 황제의 반대에 부딪혔다. 암살 기도가 있었다. 정신이상자, 반역자로 몰렸다. 그는 조선에 대한 환멸을 지우지 못하고 다시 미국으로 떠났다. 마중 나온 이승만과 김규식 등에게 제이슨은 “귀국 정부가 나를 필요 없다고 하여 떠나는 것”이라고 했다. 조선을 “너희 나라"로 칭한 것이다.


곧이어 미국-스페인 전쟁에 군의관으로 참전했다. 필라델피아에 필립 제이슨 상회라는 문구사를 차려서 돈을 벌었다. 삼일운동이 일어나자 제이슨은 다시 조선에 희망을 걸었다. 인민이 드디어 스스로 깨쳐 일어났다고 본 것이다. 사재를 털어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그러나 그 희망도 오래가지 못했다. 결국 미군이 조선반도를 장악한 후 1947년 필립 제이슨은 고국 땅을 마지막으로 밟았다. 이승만을 혐오했던 하지 중장은 제이슨을 대통령감으로 점찍었으나, 그는 권력에 뜻이 없다며 사양했다. 대신 고향인 보성 가내마을로 내려갔다. 마지막인 걸 알았을 것이다. 필립 제이슨은 1951년 사망하여 필라델피아에 묻혔다.


나는 운전하면서 조수석에 앉은 애인에게 위와 같은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놨다. 하지 중장 부분에 이르렀을 때 애인은 코를 골았다. 가내마을 입구에는 거대한 독립문이 서있었다. 서울에 있는 것과 같은 크기로 보였다. 서재필 기념관도 널찍하게 조성되어 있었다. 나는 에어비앤비 숙소 호스트 분께 전화를 걸었다.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서재필 생가 표지판을 따라오세요.”


열심히 따라간다고 갔으나 길을 잃었다. 수자 님께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쪽 말고 다시 돌아 내려오셔야 해요. 첫 번째 다리에서 좌회전입니다.” “아, 지금 제가 보이시나요?” “네, 다 보고 있어요.” 옛 고을 양반집 자리에서는 마을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법이었다.




목임당


목임당은 숨은 진주와도 같은 곳이었다. 리뷰에도 그렇게 적혀있었으나 가기 전까지는 확신하지 못했다. 마당 겸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자그만 대문이 열린 채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오래된 집에 있는 있으나 마나 한 빗장이었다. 들어오고 싶으면 그냥 열고 들어오면 되는. 넘고 싶으면 그냥 넘을 수 있는 담벼락. 그런 기분 좋은 경계를 건너서 목임당에 진입했다.


수자 님은 함박웃음을 하며 인사하셨다. 먼 길 오느라 고생했다며 바로 숙소로 안내해주셨다. 한옥 한 채를 전부 쓸 수 있었다. 미닫이 문을 열면 복도가 있었고 그 안에 거실과 침실, 주방이 있었다. 복도 저 편에는 사랑방도 있었다. 욕실은 한옥 치고는 드물게 거대했는데, 바닥이 난방이 된다는 점이 놀라웠다. 욕조나 변기도 아주 현대식으로 깔끔했다. ‘한옥 스테이'라는 정부 인증스러운 간판까지 달려있는 것을 보아 꽤나 공들여서 꾸미고 홍보하신 듯했다.


에어비앤비 소개 사진에서도 봤는데 수자 님은 발 마사지 전문가인 것 같았다. 외국인 손님의 발을 마당에서 방긋 웃으며 마사지해주시는 모습이었다. 목임당 욕실에는 독일어로 된 발 해부도가 있었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지압 요법을 위한 설명서 같았다. 떠나기 전에 이것 관련해서 여쭤본다는 것을 마지막 날 늦잠 자느라 까먹었다. 이박 삼일을 묵었는데, 둘째 날 아침은 보행보조기를 밀고 마당으로 들어서는 어느 동네 할머님의 목소리에 깼다. “주인 있어? 내가 주인 애민디, 주인 어디 갔어?” 다짜고짜 반말을 하시는데 듣는 내가 그렇게 유쾌할 수가 없었다. 수자 님의 어머님도 같은 마을에 사시는구나.


셋째 날, 그러니까 마지막 날 아침은 수자 님의 외침으로 깼다. “범선님! 체크아웃 시간입니다.” 미닫이문 너머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화기를 보니 한 시간 전에 이미 부재중 전화가 와있었다. “주무시는데 깨워서 너무 미안해요. 바로 서울에 올라갈 일이 있어서요.” 땔감으로 짐작되는 나무를 패면서 말씀하셨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계셨다. 목임당 앞에서 기념사진도 직접 찍어주셨다. 우리의 모습을 간직하고 싶다며 당신의 손전화로도 찍으셨다. 사랑이 넘치는 주인장.


나는 목임당을 떠나는 아침 서재필 생가 안을 산책했다. 서재까지 갖춘 양반집이었다. 1860년대 그곳에서 뛰놀던 어린 서재필과 1947년 다시 돌아온 늙은 필립 제이슨의 모습을 상상했다. 알고 보니 한국전쟁 때 불타서 2003년에 완전히 새로 지은 것이었다. 이 반도 땅에는 오래된 것이 정말 없구나. 식민지배와 전쟁이란 참 지독하다. 수자 님께 서재필 집에 다녀왔다 했더니, 자신은 그 집안과 직접 연관은 없지만, 여순반란 때 불탄 것으로 알고 있다고 하셨다. 그래, 여기가 <태백산맥>의 고장이었지. 오다가 조정래 문학관을 본 것도 같다.




창꼬막과 소리꾼


나는 태백산맥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말이 “벌교 꼬막”이었다. 이 유명한 지역 특산물에 대해 나는 전혀 몰랐다. 소설을 읽다가 처음 맞닥뜨린 개념이었다. 일단 벌교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꼬막에 대해서도 전문가가 아니었다. 그런데 “벌교 꼬막”이라는 이 두 단어의 조합은 어딘가 매력적이었다. “벌교꼬막”이라고 붙여서 읽으며 더 귀엽다. 아마 “교꼬”라는 중간 부분 때문인 것 같다. 아무튼 나는 벌교 꼬막을 먹어본 적도 없지만, 그 발음과 글자가 주는 맛을 좋게 생각하고 있었다.


소록도를 지나 거금대교를 건너 휴게소에 멈췄다. 20미터 높이의 거대한 은색 인간 조형물이 서있는 그곳이었다. 맛없는 휴게소 커피를 마시고, 주차장에서 파는 선인장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바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길 건너 주차장 한가운데에는 포장마차가 둘이 있었다. 매생이 호떡과 유자 호떡을 팔았다. 매생이가 너무 먹고 싶었다. 똑같은 메뉴를 제공하는 듯한 두 포장마차 중에 한 곳을 골라야 했다. 처음에는 왼쪽으로 가려다가 갑자기 등장한 이스타나 승합차에서 단체 손님이 내리는 것을 보고 오른쪽으로 갔다.


갑자기 모든 것이 수상해 보였다. 이 아주머니의 립스틱은 왜 이리 빨간 것인가. 왜 “매생이 호떡”이라는 글씨에서 “매생이”만 빨갛게 되어있을까. 아니 그보다 어떻게 휴게소 주차장 한가운데 포장마차를 펼쳐 놓고 장사를 할 수 있을까. 호떡도 먹고 싶어 졌다. 그래서 매생이와 유자 호떡을 주문하고 앉았다. 접이식 식탁과 의자도 빨간색이었다. 그것도 아주 진한. 호떡만 먹고 무사히 이곳을 떠날 수 있을까.


그때, 건너편 탁자에서 누군가 젓가락으로 모서리를 “탁” 쳤다. “그때의 심청이가 인당수에 들어갔는디!” 우렁찬 소리가 나의 귓방망이를 두들겼다. 아니 저 양반은 아까 입장부터 요란스러웠던 용두성 사장님 아닌가? “짜장면 다 팔고 오늘 장사 접고 왔재!” 고작 오후 두 시인데 이미 소주 몇 병은 걸친 듯한 붉은 얼굴과 해맑은 표정으로 허경영 호떡 아주머니께 인사를 건네었던 분이었다. 곧이어 비슷하게 취하신 아저씨 둘이 합류했고, 보라색 머리를 한 아주머니와 그의 친구도 합석했다.


용두성 사장님은 예사 목청이 아니었다. 실버백 고릴라의 인상으로 각을 잡고 앉아서는 말과 소리를 넘나들었다. 저것이 조선의 프리스타일이었지. 바닷가에서 대낮에 소주와 호떡을 먹으며 구사하는 창과 아니리. 공포는 순식간에 사라졌고, 나는 호떡을 기다리며 용두성 사장님의 소리에 귀 기울였다. 나의 몸은 이 탁자에 있지만 귀는 이미 저쪽에 합석한 상태였다. 그때 나와 애인은 모두 한복 차림이었는데, 사실 그 포장마차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이미 우리를 궁금해하고 있었다. 우리 말고는 다 동네 사람들인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수염 난 사람이 한복 차림으로 앉아있으니 나에게도 소리하는 사람이냐고 물었다. 청년도 한 곡조 뽑아보라고 난리였다.

▲ 조선인의 모습이지만 미국 음악을 일삼는 사람이다.

록밴드 보컬도 소리꾼이라면 소리꾼이겠지만,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을 수는 없었다. 고흥 바이브, 특히 이곳 거금 휴게소 호떡 포장마차 바이브는 내가 소화하기 힘들었다. 여기까지 와서야 내가 얼마나 겉만 조선이고 속은 미제의 앞잡이인지 깨달았다. 나는 실없이 허허 웃을 뿐이었다. 보다 못한 보라색 머리 아주머니는 우리에게 손짓했다. “어서 일루 와! 같이 마셔!”


용두성 사장님은 원래 트로트를 좋아했다. 나훈아처럼 되고 싶어서 트로트를 하다가 이 동네 어느 선생님께 창을 배웠다고 한다. 그러나 음악 하면 배고프다고 하도 그래서 그만뒀다. 나는 격하게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님은 소리란 자고로 뱃심에서 나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옆에 앉은 국밥집 사장님이자 보라색 머리 아주머니의 남편 분은 왕년에 코미디언 지망생이었다. 80년 MBC 개그맨 공채에 지원했는데 “백이 없어서” 떨어졌다. 분명 앞에 놈이 자기보다 훨씬 못했는데 “장동건처럼 잘생겨서” 붙었다. 다들 고흥 출신이지만 젊은 시절 도시에 나가 살다가 다시 내려온 분들이었다. 고흥 자랑이 끝이 없었다.


그중 최고는 창꼬막이었다. 우리 같은 서울 사람들은 절대 모르는 것. 꼬막에는 세꼬막과 창꼬막 두 가지가 있는데, 도시에 나가는 건 다 세꼬막이다. 창꼬막이 훨씬 크고 귀하고 맛있는데, 그건 이 동네에서만 먹을 수 있다. 용두성 사장님, 국밥집 사장님 말고 셋 중 막내 아저씨는 꼬막 양식을 하는 것 같았다. 창꼬막 예찬론이 소주와 호떡과 아니리와 창을 반주로 끝없이 펼쳐졌다. 듣다 보니 “고흥 꼬막”도 벌교 꼬막만큼이나 사랑스러운 이름이었다. “흥꼬”




산과 바다와 태양과 별


그 어떤 인문학적 레퍼런스보다 여행의 핵심은 자연이다. 고인돌과 우주센터와 서재필과 창꼬막과 판소리를 논했지만, 고흥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인간을 초월하는 것에 있다. 조선반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다가 다도해라는 것은 절대 부정할 수 없다. 고흥은 튀어나온 반도라 바다 건너 보성이 보인다. 바다와 하늘의 경계가 무너지고 그 주변을 남도의 곡선이 테두리처럼 감싼다. 그래, 한국적인 것이란 결국 저 산들의 곡선뿐이다. 하늘과 태양과 바다와 별은 지구 어딜 가나 똑같지만, 저 푸르고 아담한 굴곡이야말로 이 땅의 고유한 풍경이다. 조정래가 산맥에 주목한 이유가 있었구나.

▲ 고흥 바다에는 하늘과의 경계가 없다

태양은 찬란하지만 절대 나에게 다가온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일몰뿐만 아니라 일출 때도 떠오르는 것이지 나와 가까워지는 게 아니다. 하지만 고흥 하늘의 별들을 보면서 처음 깨달았다. 별들은 항상 나의 위로 떨어지고 있구나. 분명 과학자들은 태양이야말로 가장 가까운 별이라고 했다. 그러나 태양은 가까운 만큼 눈부시고, 눈부신 만큼 절대적이다. 아무런 광해가 없는 고흥 바닷가에 누워 별들을 올려다보면 그들이 전부 나에게 쏟아진다. 모든 별은 별똥별이었다.


한적마을을 찾아 떠났지만, 막상 그곳에는 가보니 별 거 없었다. 농기구들이 산적한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다. 그렇지만 나의 이박삼일 여행은 예상치 못한 어드벤처가 가득했다. 2019 고흥 오디세이. 시공간을 넘나드는 짜릿한 여행을 해외도 아닌 국내에서 누리고 싶다면 고흥으로 떠나라. 따듯한 때에  2020년은 고흥 방문의 해!




에어비앤비 작가, 전범선

글 쓰고 노래하는 사람. 밴드 ‘양반들’ 보컬, 책방 ‘풀무질’ 대표, ‘두루미 출판사’ 발행인, 사찰음식점 ‘소식’ 대표, 동물권 단체 ‘동물해방 물결’ 자문위원 등의 직책을 지고 있다.

인스타그램 @junbumsun

매거진의 이전글 여름의 기억, 엑상프로방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