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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어비앤비 Jan 21. 2020

로마에서 내 입맛 찾기

로마에서 먹으며 발견한 나의 취향


이제 뭐해 먹고살지?

나는 실패했다. 3년 전 그때처럼 또 실패했다. 이번에도 실패감을 가득 안고 도망치듯 힐링인척 여행을 떠났다. 3년 전 사표를 던지고 떠난 남미 여행에서 소박하지만 자유롭게 사는 사람들을 만났었다. 나도 그렇게 살겠노라며 호기롭게 작은 가게를 열었다. 그러나 사람에 치여 지쳐버린 자들이 흔히 하는 실수를 나도 저질러 버렸다. 그렇게 나만의 성을 만들어 거주하면 안전하고 평화로울 줄만 알았는데, 그 성 안에서의 3년은 대부분 창살 없는 감옥과 같았다.


그래, 3년 버텼으면 됐다! 당장 앞으로 뭐해 먹고살아야 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짐을 쌌다. 내가 나에게 갇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언제나 여행이었다. 때마침 로마행 비행기표가 저렴하게 나와서 나와 남편은 티켓을 구매해 버렸다.


비행기표를 구했으니 숙소를 구해야 할 차례.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에어비앤비였다. 호텔은 몸이 편하지만 한 달 내내 고립된 여행자로만 살고 싶지 않아서, 한인민박은 속을 편하게 해 주겠지만 한국인보다는 현지인들과 더 마주치고 싶어서 제외했다. 또한, 남편은 한 때 에어비앤비 호스트였다. 그때 만났던 여행자들과의 추억을 여전히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기에 이번에는 우리가 게스트가 되어 호스트와의 추억을 쌓아보고 싶었다.


우리는 한 달이라는 여행 기간 동안 대부분을 에어비앤비에서 묵었다. 우리가 시간을 보낸 에어비앤비들은 적당히 프라이빗해서 편하고 분위기에 따라 얼마든지 호스트와 소통할 수 있는 곳들이었다. 그중 로마에서 머물렀던 에어비앤비는 내가 그동안 가봤던 곳 중 가장 에어비앤비 다운 곳이었다.

▲ 에어비앤비 현관. 길고양이를 위해 물과 사료가 항상 채워져 있었다. (좌) / 우리 방의 창문을 열면 나오는 발코니. 아침마다 새소리에 잠을 깼다. (우)



그들이 아니었다면 마주하지 못했을 순간 

새벽 6시, 로마에 도착한 우리를 위해 호스트 발터(Valter)는 기차역까지 우리를 마중 나와주었고, 얼리 체크인도 해 주었다.  발터와 바바라(Barbara) 부부는 로마의 외곽 지역인 콜레 베르데(Colle Verde)에 멋진 전원주택에서 살고 있었다. 발터와 바바라 부부의 에어비앤비를 예약한 건 우연이자 축복이었다. 원래 예약했던 에어비앤비의 예약이 취소되는 바람에 출발 4일 전에 급하게 예약한 곳인데, 그 덕분에 이번 여행 통틀어 가장 멋진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발터와 바바라 부부는 로마에서의 직장 생활에 지쳐 일을 그만두고 교외로 나와 프리랜서로 일하며 살고 있다고 했다. 이 큰 집을 무려 5년 동안 직접 조금씩 완성했다고 했다. 지붕의 기와부터 바닥의 타일까지 발터 부부의 크고 작은 이야기들을 품고 있었다. 그것들은 이내 발터와 바바라를 통해 우리의 이야기가 되었다. 처음에는 바닥이 타일인 것도, 현관을 열면 바로 거실이 나오는 것도, 건식 욕실도, 창문에 방충망이 없는 것도 모두 어색하기만 했다. 그럼에도 왠지 모를 낭만이 집안 곳곳에 가득했다.

▲ 평범해 보이는 거실마저 여행자의 감성에 운치를 더했다.

로마 여행의 첫날은 봄비가 내렸다. 발터는 휘파람을 불며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의 장밋빛 인생(La vie en Rose)을 틀어 놓고 우리와의 점심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 순간 빗소리와 휘파람 소리 너머로 파스타 냄새가 트럼펫 연주를 타고 풍겨왔다. 마치 마법처럼, 그동안의 고생을 누군가 위로해주는 것 같았다. 로마의 대단한 유적들이 우리를 압도했지만, 이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첫날 큰 창문을 통해 봄비를 마주 보며 음악과 파스타 냄새가 주는 위로의 순간이었다.




로마식 집밥의 발견

유쾌하고 친절한 발터 부부와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남편이 에어비앤비 슈퍼호스트를 했던 경험이 있어 호스트들끼리 업계(?) 이야기도 나누고 인테리어 디자이너인 바바라의 안목에 감탄하기도 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식사를 했다. 대화 중 우리의 눈이 가장 빛난던 순간은 음식 이야기를 나눌 때였다. 발터는 새댁인 나에게 비법을 전수해주는 시어머니처럼 이탈리아 레시피를 일러주었다.


“볼로냐 스파게티를 만들 때는 양파, 소고기, 돼지고기를 볶다가 어느 정도 익으면 레드와인을 크게 한 잔 넣어. 그리고 토마토를 많이 넣는 거야. 그다음 파마산 치즈의 굳어진 껍데기를 버리지 말고 모아 두었다가 스파게티에 조금 잘라 넣으면 풍미가 더 좋아진단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레시피이지만, 집에서 밥을 해 먹은 지 1년이 채 안된 나로서는 모든 것이 비법과도 같았다. 특이했던 건, ‘비스코티(Biscotti)’라 불리는 아몬드 비스킷을 먹기 직전 파스타에 부셔 넣어 먹는 것이었다. 단맛이 제법 있는 과자를 파스타에 뿌려먹다니? 마치 콜라에 밥을 말아먹는 느낌이었지만 직접 먹어보니 제법 어울리는 궁합이었다. 토마토소스에 달짝 쫀득한 식감의 비스코티가 고소하게 어우러졌다.

▲ 어떠한 상황에서도 통하는 만능 포즈를 배웠다. (좌) / 소박한 주방에서 비범한 요리가 완성된다. (우)

발터와 바바라는 우리가 에어비앤비에 머무는 내내 아침 식사에 초대했다. 덕분에 커피에 설탕 대신 꿀을 넣어먹으면 더 맛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탈리아 사람은 진짜로 매일 아침 모카포트로 에스프레소를 내린다는 것도, 아침 식사로 비스킷에 잼을 발라 먹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사실 로마 음식에 대해서는 큰 기대를 하고 오지 않았다. 미식의 천국이라 불리는 이탈리아이지만, 10년 전 배낭여행을 할 때 호기롭게 도전했던 엔초비 피자가 로마의 첫인상이었기 때문에 젤라토나 많이 먹고 가자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10년 만에 다시 찾은 로마는 달라져있었다. 아니, 내가 좀 더 로마의 음식에 관대해져 있었다. 그 관대해진 마음이 기특했는지 로마는 나에게 몇 가지 선물을 주었다.

▲ 일상이 작은 여행으로 채워진다면 사는 게 덜 힘들것 같다.
▲ 콜로세움 앞에서는 누구나 관광객 모드로 변한다.



일상을 여행처럼

▲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는 언제나 즐겁다.

콜로세움 근처 식당에서 만났던 로마 청년들이 생각난다. 테이블이 따닥따닥 붙어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한국과 이탈리아의 문화 차이에 대해, 여행에 대해, 음식에 대해…. 그들은 콜로세움에서 5분 거리의 아파트에 살고 있다고 했다. 당시 로마 역사의 유구함에 대해 벅차 올라 있던 나는 그들에게 로마에 산다는 건 어떤 기분이냐고 물었다. 그들은 똑같다고 했다. 평일에 회사에 가고 주말에는 외식하고 가끔은 여행을 하는 삶이라고 했다.


 “평범한 길거리에 거대한 유적이 있는 곳에서 산다는 건 도대체 어떤 느낌이야?”

 “살면서 제일 재미있을 때는 지금 너처럼 여행 다니면서 돈을 쓸 때야!”


무언가 가볍지만 띵한 말이었다. 지금까지 해외여행을 하면서 내가 푹 빠진 도시에 사는 현지인들을 부러워하곤 했다. 하지만 여행과 일상은 한 끗 차이였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간에 같은 음식을 먹고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일상이고 누군가에게는 여행이다. 내가 지겹게 먹는 김밥이 어느 여행자에게는 평생 기억에 남는 한 끼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여행과 일상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으며 그렇기에 일상을 여행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 심플한 그의 한마디에 새삼 다시 깨닫게 되는 진리이다.




평생 몰랐다면 억울했을 맛

로마의 유명한 여러 맛집들을 다녀왔다. 동네의 오래된 현지인들의 밥집, 세련된 레스토랑, 관광객에게 유명한 식당에도 가봤다. 대체로 맛은 있었지만 한국에서도 먹어본 맛이었다. 그래도 종종 내 입맛을 사로잡은 음식들이 있었다.

▲ 로마식 까르보나라를 처음으로 먹어보았다. (좌) /  정통 까르보나라의 핵심, 페코리노 로마노 치즈! (우)

정통 로마식 까르보나라는 스페인광장(Piazza di Spagna) 근처의 유명 맛집에서 발견했다. 1세기부터 존재했다는 가장 오래된 치즈인 페코리노 로마노(Pecorino Romano)를 넣은 진짜 까르보나라였다. 한국에서 먹는 크림이 듬뿍 들어간 까르보나라는 미국인들에 의해 변형된 형태라고 한다.


하얗고 국물이 자작한 까르보나라만 먹다가 노랗고 찐득한 까르보나라를 먹으려니 아무래도 어색했다. 로마식 까르보나라는 치즈를 섞은 달걀물을 마지막 조리 과정에서 면에 후루룩 섞어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날달걀을 좋아하지 않아서 크림을 넣어 먹는 미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용기를 내어 한 입 먹어보니 이 고소한 음식에 크림을 넣어서 느끼하게 만든 미국인들이 이해되지 않았다. 굳이 ‘까르보나라’라는 동일한 이름을 쥐어주고 더 유명해지게 만들었는지 원망이 될 정도로, 정통 로마식 까르보나라는 고소한 풍미가 가득했다. 로마에 오지 않았다면 평생 하얀 크림의 까르보나라만 알고 살뻔했다.

▲ 오늘이 장날이라면? 무조건 시장이다!

또 하나 새롭게 알게 된 음식은 부라타(Burrata) 치즈이다. 몇 년 전 어느 여배우가 예능에서 우아하게 부라타 치즈를 바게트 위에 올려 먹어 화제가 되었다는데, TV가 없는 나에게는 그야말로 우연히 뽑아 든 행운 같은 치즈이다. 우리는 여행하는 동안 1일 1마트를 실천했다. 요리를 할 수 있는 에어비앤비에 묵을 때도, 요리를 할 수 없는 호텔에 묵을 때도 대부분 하루의 마지막 코스는 마트였다. 이 도시의 건물 중 나에게 가장 익숙해 보이는 장소이지만 익숙한 물건은 거의 없는 곳이다. 유적지 앞에서는 때때로 심드렁했던 남편도 마트에만 오면 호기심이 왕성해졌다.

▲ 우리는 포르투에 가서도 거의 매일 부라타 치즈를 먹었다.

가장 궁금했던 음식은 수많은 종류의 치즈였는데, 몇몇 시도해봤지만 부라타 치즈의 발견이 가장 성공적이었다. 동그란 모차렐라 치즈 안에 고소한 우유 크림이 들어있다. 마치 샤오롱바오처럼 치즈를 갈라내면 크림이 흘러나온다. 부라타는 ‘버터를 바른’이라는 뜻이다. 크림은 고소하고 부드러웠고, 크림을 감싼 모차렐라 치즈는 쫀득한 매력이 있었다. 우리는 매일 저녁 마트에서 부라타 치즈 한 덩이를 사서 다음 날 아침에 발사믹 식초를 뿌려먹었다. 군더더기 없이 딱 그렇게 먹는 게 가장 맛있었다. 한 덩이에 단돈 1유로 남짓. 한국에서 사 먹으려니 손이 좀 떨린다 싶을 때는 제조 과정이나 시식 영상을 찾아보며 마음을 다스린다.

▲ 포르게타 샌드위치는 튀긴 통돼지를 편으로 썰어서 빵에 끼워먹는다. (좌) / 겉은 바삭, 속은 촉촉한 포르게타 샌드위치. (우)

로마를 떠나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여행하고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다시 마지막 이틀을 로마에서 보냈다. 마지막의 마지막, 최후의 저녁 식사로 우리가 선택한 건 포르게타(Porchetta) 샌드위치였다. 마지막으로 다시 먹고 가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은 음식을 먹기로 했고, 심사숙고 끝에 포르게타 샌드위치를 선택한 것이다.


포르게타 샌드위치는 통돼지구이를 두툼하게 썰어서 빵 사이에 끼워서 먹는다. 다른 재료 없이 빵과 돼지고기만 심플하게 들어간 것이 가장 맛있다. 빵 안에 들어간 돼지고기는 마치 보쌈처럼 야들거리지만 겉면은 바삭하게 구워졌다. 육즙도 가득 품고 있는 것이 씹는 맛도 충실하다. 하나씩 테이크아웃해서 시끌벅적한 나보나 광장(Piazza Navona)의 벤치에 앉아 포르게타 샌드위치를 즐겼다.




여행에 결코 실패는 없다

한 달의 여행을 소회하며 뾰로통했던 마음도 다듬고, 한 달 동안 묻어두었던 ‘한국 가서 뭐해 먹고살지?’ 하는 걱정도 다시 채웠다. 그때 거짓말처럼 발터와 바바라가 우리 바로 앞을 지나갔다. 이 사람 많은 로마에서, 로마에 살지 않는 사람들인데, 여행 첫날 만났던 사람들을 마지막에 다시 마주치다니? 그들은 근로자의 날을 맞아 로마 시내에 놀러 왔다가 우연히 우리를 만났다고 했다. 마치 로마에 사는 지인을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주절주절 한 달 동안 어떤 여행을 했는지 풀어놓고는 로마가 제일 좋았다고 하니, 발터는 뒤로 넘어갈 듯 좋아했다. 이 사랑스러운 사람들과 처음과 끝을 함께해서 좋았고, 경유 시간을 포함해 24시간 만에 먹은 첫 식사가 정성스러운 이탈리아의 집밥이었던 것이 감사했고, 나도 몰랐던 내 입맛, 내 취향을 알아간다는 것이 참 짜릿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번 여행에서 이만큼 알았으니, 다음 여행에서는 조금 더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로마의 동네 시장에서 샀던 올리브 비누를 다 써간다. 타짜도르(Tazzadoro)에서 사 온 원두도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욕심껏 쟁여온 트러플 오일만이 (아껴 먹어서 그런지) 아직 건재하다. 하나 둘 내 일상에서 자취를 감춰가고, 더 이상 사진만 봐서는 그때의 기억이 완벽히 떠오르지 않을 때 까르보나라를 만들어 볼 것이다. 떨리는 손으로 부라타 치즈를 주문할 것이며, 한국에서 포르게타 샌드위치를 가장 잘 만든다는 맛집을 수색할 것이다. 아껴가며 조금씩 조금씩 내 취향을 닦아 가야겠다.




에어비앤비 작가, 박은혜

회사원이었다가 자영업자였다가 지금은 다시 학생이 되었습니다. 아직 뭐해 먹고살지 정확하지 않지만 오늘도 열심히 공부하며, 치열하게 고민하며 살고 있습니다.

인스타 그램 @eunhye_ashe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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