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모르는 사이
은희 씨는 꽤 늦은 시간에 헐레벌떡 지구대를 찾았다. 상당히 겁먹은 표정이었는데 마치 낯선 곳에 홀로 떨어진 어린아이 같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런 표정을 지을 만큼 어려 보이진 않았다.
“사기당한 거 같아요”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로 은희 씨는 밑도 끝도 없는 서두를 꺼냈다. 그때 안쪽에 있던 경찰관 한 명이 일어서며 더 묻지도 않고 은희 씨를 소파로 안내했다. 그의 표정이 자세한 건 안 들어도 알만하다는 표정이어서 그런지 다른 경찰관들은 암묵적으로 나서지 않는 거 같았다. 그때 동료 경찰 한 명이 “경제팀 조사관 출신이 잘 판단하겠지”라고 말을 했고 은희 씨는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시키는 대로 자리에 앉았다.
“그 사람 이름도, 직업도 사실 아무것도 제대로 아는 게 없는 거 같아요”
굳이 늦은 시간에 지구대로 달려온 이유에 대해 은희 씨는 결혼을 전제로 사귀던 남자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는 것 같아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어서라고 했다. 오랜만에 서울의 친구를 만나러 다녀오는 길이었는데, 마침 집에 와보니 남자 친구가 없었다고 했다. 여전히 은희 씨의 말은 알아듣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청주에서 생활하던 은희 씨가 그곳 작은 도시로 온 것은 6개월 전이었다.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손님으로 온 남자와 눈인사를 주고받다가 교제하기 시작했는데 은희 씨보다 아홉 살이 많은 남자였다.
원래 변호사인데 지금은 부동산 사업을 하고 있다는 남자는 청주에서 6시간 걸리는 그곳 도시에 아파트를 사 두었다며 공기 좋은 곳으로 이사 가자고 제의했고 은희 씨는 처음 사귄 남자 친구의 말은 뭐든 논리적이고 맞는 말 같아 모든 걸 정리하고 그 말을 따랐다고 했다. 이상한 건 은희 씨에게 공기 좋은 곳으로 이사하자고 했던 남자가 정작 자신은 사업체가 서울에 있다며 집을 비울 때가 많았다는 것이다. 물론 은희 씨는 그곳에 홀로 두고 말이다.
“제2금융권에서 제 이름으로 대출을 여러 번 받았는데 다 합치면 1억이 넘어요”
연인으로 사귄 남자에게 무슨 사기를 당했는지를 묻는 말에 은희 씨는 남자의 요구에 따라 이런저런 서류를 갖춰주고 대출을 받았는데 정작 본인은 한 번도 그 돈을 만져본 적이 없고 모두 남자 친구가 관리하는 통장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남자 친구는 사업상 급히 돈이 필요하다거나 심지어 자신의 어머니가 보이스피싱을 당해 급하게 돈이 필요하다며 ‘오케이 또는 상호신용’이란 말이 들어간 은행들에서 필요하다는 서류를 요구했고 은희 씨는 그때그때 급하게 서류를 만들어 보냈을 뿐이라고 했다.
“변호사라고 했는데 이름이 검색되지도 않고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모르겠어요”
결혼을 전제로 사귀던 남자는 자세한 것을 물으면 지나치게 화를 내고 심지어 욕을 해서 언제부터인가 구체적인 것은 묻지 못했다고 했다. 한 번은 주민등록등본을 스치듯 보여줘서 이름과 생년월일을 언뜻 본 것이 전부이고 사업체는 네이버에 검색했을 때 서울 강남 주소로 나오는 것만 본 적이 있다고 했다. 남자 친구의 가족이나 직장 동료를 만나 본 적도 없냐는 질문에 “생각해 보니 그렇네요”라고 은희 씨는 대답했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4~5년은 사회생활을 했을 나이의 본인도 한심한지 그 뒤로 말을 잇지 못했다.
“엄마 아빠는 시골에 계시는데 제가 아직 청주에서 잘 지내는 줄 아세요”
우선 이 문제를 가족들과 함께 의논하는 것이 좋겠다는 경찰의 의견에 은희 씨는 남자 친구가 가족들에게 자기들의 사정을 이야기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해 말하기 어려웠다고 했다. 대출서류에 서명하는 걸 은희 씨가 주저하거나 가족에게 물어볼 기세라도 보이면 남자 친구는 불같이 화를 내며 금방이라도 헤어질 것처럼 말했다고 했다. 은희 씨에게 왜 그렇게 의존적이냐고 다그치며 심지어 고향의 엄마와 통화하는 것도 대놓고 싫어했다고 했다.
“아파트는 남자 친구가 사놓은 거라고 했는데, 관리비 명세서는 다른 사람 이름으로 나왔어요”
살고 있는 아파트의 소유관계에 대해서도 은희 씨는 아는 것이 없었다. 몇 년 전 고속도로가 뚫리면서 공기가 좋다고 서울 사람들이 세컨하우스로 많이 계약하던 아파트였다. 당연히 실거주자보단 임차 관계가 많았고 심지어 에어비앤비 렌털도 많은 곳이었다. 그러니까 은희 씨는 우연히 만난 남자와 3개월쯤 사귀다가 공기 좋은 곳에서 살고 싶다는 그 남자의 요구로 자신의 모든 걸 정리하고 이주했는데, 그 남자의 아파트로만 알뿐 정확한 소유관계도 모르는 아파트에서 6개월 동안 그렇게 살았다고 했다. 그리고 남자는 일이 있다며 자주 집을 비워, 결국 은희 씨는 아무도 모르는 낯선 곳에서 마치 섬에서 사는 것처럼 살아온 것이다. 육지 위에 섬 말이다.
“어는 순간부터 남자 친구가 화를 내고 욕을 하는 게 무서워 더 묻기 어려웠어요”
그때 테이블 위에 있던 은희 씨의 휴대폰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액정에는 남자 친구의 것으로 보이는 닉네임이 보였는데 이미 결혼생활을 상당히 했을 법한 관계의 닉네임이었다. 아까부터 카톡이 계속 울리고 있었지만, 확인하지 못하고 있던 차였다. 그걸 아는지 핸드폰 진동은 애타게 울리고 있었는데, 경찰이 턱으로 받아보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은희 씨는 받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했다. 그걸 바라보는 경찰은 표정의 변화도 없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하나요?”
남자 친구가 증발이라도 할 것처럼 걱정하는 은희 씨에게 경찰은 그럴 케이스는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다만 이 문제를 지금처럼 혼자 해결하려 하지 말고 누구라도 좋으니 가족과 의논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그리고 은희 씨에게 지금 이 문제를 가족들과 의논하는 것에 대해 왜 어렵게 생각하는지 잘 생각해 보라고 말했다.
사실 아직 서른도 되지 않은 은희 씨가 결혼과 관련된 문제를 가족들과 의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더욱이 자신의 이름으로 1억이 넘는 돈을 대출받는 문제도 최소한 가족들은 알아야 할 문제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모든 일을 가족과 의논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그럼에도 은희 씨가 왜 가족들이나 주변 친구들에게 그동안 모든 일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았는지 자신도 답답했다.
“예? 가스라이팅이요?”
날이 밝으면 경찰서 수사과로 가서 더 구체적인 상담을 받아보고 고소를 하는 게 좋겠다고 권유하던 경찰은 은희 씨에게 가스라이팅이란 말을 아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는 건 아니지만 대화 끝에 그걸 묻는 이유도 모르지 않던 은희 씨는 무척 당혹스러웠다.
“예? 제가 두려워하는 거요?”
두 사람의 관계에서 가장 두려운 것이 뭐냐고 경찰이 물었을 때, 은희 씨는 무엇이 두려운지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은희 씨가 두려워해야 할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 순간 은희 씨는 그때까지 남자 친구와의 관계가 그리 편안하지 않았다는 걸 느꼈다. 새삼 드는 생각인데 항상 뭔가 조마조마했다.
남자 친구를 고소하겠다고 마음먹으면 그때부터는 은희 씨가 갑이 되는 것이라고 경찰은 말했지만 고소하기도 쉽지 않을 거라며 마치 점쟁이처럼 덧붙였다. 실은 한밤중에 지구대로 뛰어가긴 했지만, 실제 고소하겠다는 마음까지 먹지는 못했던 은희 씨로서는 뭔가 들킨 기분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남자 친구와의 관계에서 자신이 두려워하는 게 뭔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고향을 떠나 낯선 곳에서 우연히 만난, 얼굴도 잘생기고 좋은 대학을 나와 변호사라는 안정된 직업을 가지고 있는 남자 친구가 아직도 꿈처럼 느껴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