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아
관광지 주차장에서 미아를 보호하고 있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신고자는 아이를 지구대로 데려오겠다고 했지만, 그냥 그곳에서 기다려 달라고 했다. 경험상 잠깐 기다리면 보호자가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아동의 위치를 변경해 오히려 보호자가 아동을 찾는데, 혼란을 줄 필요는 없다. 그냥 제자리에 있으면 보호자가 나타나기 마련이다.
가끔 미아 발생 신고가 접수되지만, 보호자가 나타나기까지 30분이 넘은 적은 없다. 대개 뒤늦게 나타난 보호자, 그러니까 미아의 부모들은 잠깐 한눈파는 사이에 아이를 놓쳤고, 그 사이에 아이도 부모를 위치를 찾지 못한 경우이다.
한때 우리나라에서 미아 문제가 심각할 때가 있었는데 그건 앨범 속의 흑백사진 이야기일 것이다. 어린이날이면 인파가 복잡한 놀이공원 광장에 의례 경찰서에서 임시 설치한 미아보호소가 있었고 실제 그곳에 미아가 울면서 보호자를 기다리는 장면이 흑백사진으로 남아 있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그때는 왜 보호자들이 지금처럼 금세 아이를 찾지 못했는지 모르겠다. 혹시 그때는 아이들을 내버리고 의도적으로 찾지 않는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린이날 부모를 잃어버린 아이가 오랫동안 보육원에서 지냈다는 이야기를 흑백사진 신문 기사에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걸 보면 말이다.
현장에 도착했을 때 역시 미아의 보호자, 그러니까 아빠라는 사람이 이미 도착해 있었다. 보호자를 찾았으니 해결된 상황이라 생각했지만, 문제가 좀 있었다. 그런데 그 문제라는 것이 좀 어처구니가 없었는데, 간단한 것 같기도 하면서 그렇다고 쉽게 결정을 내릴 수도 없는 문제라, 복기해보면 결론적으로 복잡한 문제였다.
아이가, 그러니까 그 미아가 아빠라고 나타난 사람이 자신의 아빠가 아니라고 한 것이다. 미아는 발생했고 아빠라는 사람이 나타났지만 7살의 아이가 자신의 아빠가 아니라고 하는 웃기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뭔가? 이 상황은?
2021년 대한민국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싶었다. 아이에게 신분증이 있을 리 없으니 확인할 수 없으므로 난처했다. 급한 대로 아이 아빠는 주민등록등본 사진을 전송받아 제시했다. 등본에는 분명히 부자 관계가 맞아 보였다.
하지만 아이는 일관되게 자신의 아빠가 아님을 주장(?)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부자간에 같은 DNA를 공유하고 있음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어찌 믿겠는가? 친부자 사이에서도 무슨 일이 벌어질 수 있는 세상 아닌가?
보통의 경우, 미아는 울거나 혹은 부모를 보면 서러운 마음에 울음을 터트리기도 한다. 그런데 이 녀석은 울지도 울음을 터트리지도 않았다. 아빠가 나타날 때까지 묻는 말에 한마디 대답도 하지 않다가 정작 아빠를 보고 자기 아빠가 아니라고 한다. 이 정도면 실제 아빠도 기분 나쁠 만한 상황이다.
아이가 그날 낯선 그곳에 누구와 어떻게 오게 됐는지 등 여러 가지 정황에 비추어 그들은 부자 관계가 확실했다. 그날 여행에 동반하지 않았다는 아이의 엄마도 영상통화에서 자기 아들이 확실하다는 웃지 못할 상황까지 이미 연출됐다.
결정적으로 7살 아이가 자신의 아빠가 아닌 낯선 사람이라고 주장할 만한 아무런 동기가 없어 보였다. 결국 아이를 아빠에게 인계하고 돌아섰지만 뭔가 찝찝했다.
단순한 해프닝이었지만, 며칠 내내 그 아이의 마음은 어떤 것인지 궁금했다. 전문가의 자문이 필요했는데, 아동 특수교육과 심리상담을 전공한 L은 모든 아이는 한 번쯤 자기 부모가 친부모가 아닐 것이라는 상상을 하기 마련이라고 했다.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말을 듣고 친부모를 찾아 집을 나갔다는, 우스갯소리로 전해지는 스토리가 집안마다 하나 정도 있는 걸 보면 L의 말이 수긍도 간다. 하지만 대개 실행 전 단계에서 부모가 지어낸 이야기임을 밝히고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며 그야말로 웃으며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는 것이 아닌가?
L에 따르면 아이는 아마 부모에게 뭔가 굉장히 서운했던 일이 있었을 수도 있다고 했다. 또는 권위적인 환경으로 인해 자기표현이 훈련되지 않은 아이일 수도 있다고 했다. 다시 그 아이를 만날 수 없어 뭐가 그렇게 서운했었는지 물어볼 순 없지만, 혹시 그 가정이 사실이라면 친아빠를 눈앞에 두고 아빠가 아니라고 말해야 했을 7살 아이의 서운함은 진심이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 서운함이 실제 서운할 정도인지 아닌지가 아닌, 7살의 아이가 받아들였던 그 서운함의 진심 말이다.
어린아이라고 “에이~ 뭐가 서운해? 서운할 만한 일도 아닌데”라고 말하면 안 되겠다. 혹시 다시 만나게 되면 진심으로 그 서운함이 뭔지 들어줄게. 귀여운 녀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