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능사는 아닐 수도 있다.
너무 이른 초저녁에 가정폭력 신고가 들어왔다. 여자가 남편의 폭력을 피해 1층에 내려와 지나가는 사람의 전화를 빌려 신고했다고 했다. 여름이라면 아직 훤할 시간인데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1층에서 만난 여자는 젊은 축에 들었는데 남편이 직접적으로 때린 것은 아니지만 위협이 무서워 피했다고 했다. 집에는 네 살이 안 된 아들이 있다고도 했다. 여자를 앞세워 엘리베이터를 타고 현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남자는 의외로 점잖아 보였다. 술에 취해 있지도 않았다. 다만 그 정도 일로 부인이 경찰을 부른 것에 대해 상당히 불편해했는데, 그걸 숨기지도, 아니 적극적으로 표현했다. 직업이 뭐냐는 질문에는 대답하기 곤혹스러워했는데 자기 직업이 보잘것없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 직업에 꽤 자부심이 있고 그런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서 경찰관이 집에 찾아온 것에 대해 상당히 언짢다는 표정을 애써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부인과의 다툼의 배경에는 공감할만한 사정이 있었다. 전날 아이를 데리고 부부가 함께 총 6시간을 운전해 수도권 병원에 다녀왔는데 돌아와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아내는 자신과 아이의 밥만 차려 먹더라는 것이었다. 평소 부인과 각자 방에서 생활하는 것으로 보였는데 부인은 아이에게 남편이 있는 방에 가지 말라며 그곳은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 사는 곳이라는 말을 남편이 듣도록 한 적도 있다고 했다. 결국 묵은 감정이 쌓여 폭발했고 분을 참지 못하고 손에 잡히는 물건을 바닥에 내리쳤을 뿐인데 부인은 그걸 경찰에 신고하겠다며 휴대폰을 집어 들었고 다시 경찰이 집에 찾아오는 것이 불편했던 남자는 부인의 신고를 만류하려 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남자는 그런 행동이 폭력이 아니라고 항변했지만 좁은 실내에서 무언가를 바닥에 내리치는 행동, 그러니까 상대방을 향해 던지는 것이 아닐지라도 위협의 방법으로 물건을 내동댕이치는 행동도 폭력이 될 수 있음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휴대전화를 억지로 빼앗는 행동은 직접적인 폭력이 될 수 있음을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부인과 갈등을 겪는 와중에 부인이 보여줬던 언행은 남편으로서 상처가 될 수 있었겠다는 싶었으므로 충분히 공감을 표시해 주었고 그 공감은 업무를 수행하기 위한 기계적인 공감이 아니라 실제 한 남자의 고뇌로부터 느껴지는 진심의 공감이었다. 그래서 아직 젊어 보이는 남편의 어깨를 살짝 잡아주기까지 하며 사건 처리 과정에서 그가 그런 행동을 하기까지의 심정이 충분히 표현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약속도 했다. 그리고 그 공감의 표시가 그에게 다소 위로가 됐으리라 짐작했다.
결론적으로 그 집에서 있었던 폭력의 정도는 그리 심한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여자가 밖으로 뛰쳐나가 이웃의 휴대전화를 빌려 112에 신고를 했던 일련의 행동은 다소 의도적일 수 있겠다는 싶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전에도 몇 차례 비슷한 신고가 있던 이력을 보면 여자의 두려움이 실제 클 수도 있었다. 따라서 분리 조치는 불가피했다.
남자를 상대로 체포하지 않는 조건으로 자발적 분리 조치에 협조할 것을 정중히 요청했다. 이미 그의 항변을 인내하며 충분히 들어주었고 공감도 표시했으므로 그 역시 협조할 것이란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그의 반응은 의외였다.
남자는 자신에게만 분리 조치에 협조라는 것에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아직 어린아이가 있지 않느냐며 설득했지만, 자신도 아이를 돌볼 수 있다며 물러서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유아는 아빠보다 엄마와 함께 있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말에는 모든 경우가 일반적이지는 않다며 여전히 항변했다. 결국 경찰관으로서 판단할 때 남자가 집을 잠깐 나가 있는 것이 좋겠다며 선을 그었다. 그는 마지못해 최대한 늑장을 부리며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서며 자기보다 열 살 이상 나이가 많은 경찰관에게 최대한 불쾌한 행동으로 복수하듯 유치하게 행동했다. 형사책임을 떠나 인간적 자세가 안된 놈이라고 따끔하게 지적하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고 우선 남자를 집에서 내보내야 했다.
돌아오는 길에 남자의 행동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불현듯 혹시 그의 아픔을 공감했던 것이 오히려 그의 신경을 건드렸던 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경찰관이 집에 찾아온 것에 대해서도 불편해하던 그인데, 그런 그의 자존심을 건드린 건 아닌지 싶었다.
영화‘친구’의 마지막 장면에서 유오성은 친구인 장동건을 살해한 혐의는 자기 부하의 행동이었음에도 “쪽 팔리잖아”라며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는 모습을 보여준다. 어릴 적 친구였던 장동건이 대립하는 다른 조직원임에도 불구하고 낭떠러지만은 피하고 싶었던 그였다. 형사에게 모든 걸 사실대로 진술하고 둘의 관계에 있었던 자존심 경쟁과 시시콜콜한 감정들을 설명하며 자신은 친구를 죽일 수 없었으며 살인의 간접적 책임만이 있을 뿐이라고 항변할 수도 있었지만, 자신이 살인 지시를 내렸다며 차라리 주범으로서 무거운 책임을 선택한다. 공감받을 수 있는 기회보단 자기 아픔을 고백하는 것이 더 고통스러웠을지 모를 일이다. 쪽 팔리다는 말은 그저 모든 걸 눙치는 수사였다.
누군가 자신의 아픔에 관해 이야기할 때 어떻게 공감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본다. 특히 그의 자발적 진술이 내가 가진 공적 권한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면 나의 어쭙잖은 행동이 오히려 그에게 상처가 되는 건 아닌지 싶은 의심이 든다.
공감…. 그놈 참 힘든 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