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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어 Jul 09. 2021

당신이  전문가

 자정 무렵 신고가 접수됐다. 성수기가 아니면 그리 붐비지 않는, 그러니까 비성수기엔 좀 을씨년스러울 수도 있는 산장 같은 그 펜션에서 여자가 죽으려 한다는 신고가 그녀의 남자 친구로부터 접수됐다. 

“여자 친구가 자꾸 죽으려고 해요”

 112 상황실에 녹취된 남자의 목소리는 조금 다급했다. 그런 자기 마음을 티 내려하지 않았지만 목소리에서 다급함이 묻어 나왔다. 

“지금 제가 출입문을 막아서고 있는데, 감당이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펜션에 도착해 남녀가 묵고 있는 호실 앞에 도착했지만 남자는 여자 친구가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옷을 벗고 있다며 잠깐 기다려 달라고 했다. 출입문을 사이에 두고 한참을 옥신각신 한 끝에 남자 친구를 내보내는 조건으로 대화하기로 약속하고 여자가 옷을 입었다. 약속대로 남자는 내보내고 여자와 마주 앉았는데 테이블 위에는 남녀가 마신 소주 빈 병과 맥주 피처가 절반 남아 있었다. 여자는 얼굴이 달아올랐고 눈도 약간 풀려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묻는 말에 여자는 대답 없이 고개만 잦기를 반복했는데 이상하게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 있는 것 같았다.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남자 친구를 내보내면 대화를 하기로 약속하지 않았나요?”

 예상치 못했던 내 질문에 여자는 살짝 당황한 듯 픽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아! 그건 그렇네요”

 하지만 그 뒤 한동안 또 고개만 저었다. 역시 희미한 미소를 띠면서 말이다.

“남자 친구와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있었긴 하나 보네요”

대화의 물꼬를 터보자고 내가 툭 던진 말이었다. 그 순간 여자가 희미했던 미소를 싹 거두며 나를 노려봤다.

“너무 몰아가시는 거 아녜요?”

쏘아붙이는 여자의 말투가 지금까지와는 사뭇 달랐다. 무언가 자신의 아픈 부위를 내가 건드리기라도 했다는 투였다. 도저히 대화의 진전이 어렵다고 판단한 나는 후배에게 여자를 맡겨 두고 밖으로 나와 남자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냐고 물었다.

“여자 친구에게 성폭행 트라우마가 있어요”

 여자는 마음의 병을 앓고 있다고 했다. 몇 년 전 성폭행을 당한 적이 있어 계속 그 트라우마에 시달려 왔고 얼마 전에는 전방에서 간부로 군 생활을 하는 자신에게 한밤중에 당장 자기를 데리러 오라고 울며 떼를 써 애먹었던 적이 있다는 말도 남자는 덧붙였다. 남자가 군 생활하는 곳과 여자가 있는 곳은 한밤중에 갑자기 갈 수 있는 거리는 아니었다. 아무튼 남자는 빠르게 지금까지 여자와 사귀어 오면서 있던 일을 말해 줬고 나는 그 말을 바탕으로 어떻게든 상황을 타개할 묘책을 짜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좀처럼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 남자와 나는 번갈아 한숨을 쉬기를 반복했다.

“여자 친구의 말을 좀 더 들어줘야 하지 않을까요?”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사람이 죽겠다고 말하는 건 정말 죽고 싶다는 게 아니라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고 싶은 거라는 건 이제는 너무나 평범한 상식이었으므로 나는 그렇게 뻔한 말을 다시 툭 던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뻔한 말을 약간 폼 나게 포장하기 위해 한 가지 더 덧붙여야 했다.

“어떤 판단도 하지 않고 말입니다.”

 여기저기 많은 유튜브 강연에서 경청에 대해 했던 말이었다. 일체 판단이나 조언, 심지어 위로조차 하지 말고 그저 들으라는 것이 다수의 심리 연구자의 말이었으므로 나는 그 뻔한 말을 다시 덧붙여 앞에 했던 말의 뻔함을 가려 보려 했지만, 왠지 수렁에 빠지는 거 같았다. 하지만 다행히 남자가 수긍하는 눈치였다. 자신감을 얻은 나는 쐐기를 박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자 친구가 자기 고통을 말하고 싶은데 생판 처음 보는 경찰관을 불러들였으니 혹시 크게 실망했을지 모르겠어요”

 그 말에 남자는 마음을 다잡는 거 같았다. 잘할 수 있겠냐는 나의 질문에 눈에 힘까지 줘가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끝까지 전문가인 체를 해야만 했다. 트라우마네 경청이니 하는 얘기가 유튜브만 열면 쏟아져 나오는 시절이고 주워들은 말은 많았기 때문에 나의 전문가 행세는 그럴듯했다.

“아! 그랬구나!라는 리액션만 넣으세요, 그 외 다른 건 절대 안 됩니다”

남자는 이제 내 말에 완전히 용기를 얻은 거 같았다. 잘할 수 있을 거라며 어깨를 두드려 주자 정말 진지하게 눈인사로 화답까지 했다. 

 다시 여자를 남자에게 맡기고 돌아오는 길에 후배는 내가 밖에서 남자와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여자가 다소 말문을 열었는데 성폭행 트라우마가 있음을 말했다고 했다. 남자 친구는 모르니까 절대 말하지 말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말이다. 나는 잠시 혼란스러웠다. 조금 전 나와 대화했던 남자는 여자 친구의 트라우마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었고 내가 묻기도 전에 그 말을 했는데, 남자 친구는 그걸 모르고 있으니 절대 말하면 안 된다고?

“남자 친구가 알고 있던데?”

되묻는 내 말에 후배도 어리둥절 해했다. 남자가 여자의 트라우마에 대해 너무도 구체적으로 알고 있었음은 분명했다. 더욱이 얼마 전 한밤중에 부대에 있는 자신에게 여자가 전화해 자기의 고통을 외면한다며 떼를 썼던 적이 있다고 말한 것은 남자가 분명히 여자의 트라우마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남녀 두 사람이 동시에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했다. 뭐가 진실인지 혼란스러웠지만, 그날 내가 바랄 수 있는 최선은 남자가 여자의 말에 정말 아무런 판단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의 리액션만으로 경청해 주는 것이었다. 유튜브 강연으로 주워들은 게 전부인 나의 조언이 그저 잘 작동해 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로부터 두어 시간 후 남자가 지구대로 전화를 걸어왔다. 여자 친구와 얘기가 잘 돼서 많이 안정됐다며 자신의 112 신고는 없던 것으로 해달라고 했다. 새벽 두 시가 넘어가면서 한참 졸음이 밀려오는 시간이었지만 나는 참 다행이다 싶은 생각과 깊이라고는 전혀 없는 나의 조언이 어쩌면 그렇게 제대로 먹혀들어 갔는지 신기한 생각이 번갈아 오는 것을 느끼며 애써 졸음을 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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