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넷플릭스 다큐 한 편을 추천 받았다. 제목도 낯설었다. '나의 문어 선생님'. 추천한 그 사람이 신뢰할만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제목만 보고도 지나쳤을 것이다. 다행히 나는 이 문어에 관한 다큐를 끝까지 보았다. 아니 두 번, 세 번 보았다. 그리고 내 생에 가장 감동적인 하나의 장면을 가슴에 새길 수 있었다. 문어는 사람을 알아 본다. 문어와 손끝을 맞출 수 있다. 심지어 품에 안기기도 한다...
이 다큐를 찍은 사람은 현직 다큐 감독이었다. 다큐 감독이 다큐를 찍는게 당연한 일이겠지만 문제는 이 사람이 심각한 슬럼프에 빠져 있다는 거였다. 그의 표정과 담담한 나레이션, 그리고 출렁이는 바다와 스산한 바닷가 풍경이 그의 심정을 대신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해법을 바다에서 찾는다. 거친 바닷속 풍경을 매일 찾아다니며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 애쓴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우연히 문어 한 마리를 만난다. 그리고 그 만남은 문어가 새끼를 낳고 죽을 때까지 1년 여간 계속된다.
나는 가장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이 바로 '실패'의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성공적인 삶을 살 때도 물론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일생은 대부분 성공과 실패의 애매한 중간을 살아가지 않는가. 특별한 감흥을 느끼기 쉽지 않다. 하지만 느닷없는 인생의 위기를 만날 때 우리는 오감을 곧추세워 내 안의 이야기들을 쏟아낼 수 있다. 실연을 당한 후 소주 한 잔을 기울이며 친구를 붙잡고 하소연하는 것처럼 말이다. 심지어 어떤 가수는 슬픈 노래를 부르기 위해 일부러 여자 친구와 헤어지기까지 했다지 않은가.
나는 그래서 힘든 일이나 고민이 생기면 글을 쓸 준비를 한다. 예를 들어 세바시 강연을 앞두고는 공황 장애의 경험을 떠올렸다.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 중 하나였다. 부하 직원과 내 책상이 눈 앞에서 바뀌는 그 순간의 이야기를 담담히 써내려갔다. 세 번째 고쳐 쓴 그 글을 보고 담당 PD의 얼굴이 밝아지던 그 때를 지금도 기억한다. 그 덕분에 무명의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무려 60만 회 가까운 조회수를 기록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나의 그 경험이 부끄럽지 않다. 나의 실패가 누군가의 위로가 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실패와 좌절, 위기가 오면 글을 쓸 때가 왔다고 생각하자. 이런 글은 당장 공개하지 않고 묻어 둔다 생각하고 꾸준히 글을 쓰자. 나도 차마 남에게 얘기할 수 없는 내용의 글들을 스무 편 가까이 써놓았다. 그해 겨울에서 봄으로 이어지는 동안 나는 거의 매일 같이 목을 놓아 마음으로 울었다. 언젠가 때가 되면 그 원고들 추스려 한 권의 책을 다시 쓸 것이다. 그때는 조금 더 성숙한 시각으로 내 인생을 반추할 것이다. 해법을 찾을 것이다. 나와 같은 아픈 경험을 하는 사람이 수없이 많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한 가지 반가운 사실은 사람들이 성공한 이야기만큼이나 실패의 스토리들을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유명한 브랜드일수록 수없이 많은 흑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들이 처음부터 유명했다고 착각하지 말자. 그들이 바닥을 걷던 시절이 있었기에 지금의 성공이 더 빛나보이는 것이다. 그러니 아프고 힘든 일이 있다면, 실연을 했다면, 사업에서 실패했다면, 기록으로 남길 최적의 시기라고 생각하자. 그리고 겨울 김장 담그듯 땅 속 깊숙이 나의 이야기를 묻어 두자. 이윽고 봄이 찾아와 그 이야기를 꺼내들고 '그땐 그랬었지' 하며 미소 지을 날을 기다리면서... 나도 그 봄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