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미끼를 던지는 글쓰기

다들 세상이 달라졌다고 말한다. 그건 눈에 보이는 팩트다. What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누구나 본대로 말할 수 있다. 이건 하나마나한 이야기고 뻔한 이야기다. 그런데 누군가 '그래서 왜 달라졌는데?'라고 말하면 어떻게 답할 것인가. 좋은 책의 서두는 이렇게 질문이나 호기심을 자극하는 글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스릴러나 형사물의 영화 장르가 여전히 사랑받는 이유는 '범인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일상을 관찰해보자. 그리고 아주 작은 변화라도 감지된다면 질문을 던져보자.


예를 들어 요즘은 '국민 가수'가 나오지 않는다고 말한다. 나훈아나 서태지처럼 한 시대를 풍미하는 가수가 나오지 않는 이유는 뭘까? 예전보다 음악적 역량이 떨어져서일까? 그럴리 없다. 문제는 음악 만큼이나 음악을 소비하는 환경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한 가수의 노래를 서너 개의 공중파나 라디오 채널이 하루 종일 틀어내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멜론, 유튜브, 애플 뮤직 등 자신만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채널의 수가 거의 무한대에 가깝다. 이들이 각각의 뮤재션과 만나는 방법도 훨씬 더 직접적이고 다양해졌다.


소비자들도 달라졌다. 사람들은 이제 온 나라 사람들이 듣는 유행가에 좌우되지 않는다. 저마다의 취향을 가지고 힙합이든 트로트든 자신만의 팬덤을 좇아다닌다. 이런 양상을 우리는 탈중앙화(Decentalization)라고 부른다. 바로 이 지점이 팩트 뒤에 숨은 도도한 트렌드이자 시대적 변화이다. 음악을 소비하는 채널이 달라지니 사람들의 개성과 취향은 한껏 고조되기 시작했다. 유명한 브랜드의 로고를 드러내기 보다 가리는 것이 유행이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변화를 글쓰기에 적용하면 어떨까? 책을 쓰고 소비하는 시장은 어떻게 달라지고 있을까?


요즘 사람들은 한 권의 종이책을 사서 탐독하지 않는다. 전자책이 있고 구독 서비스가 있다. 얇은 아이패드에 수천 권의 책을 담아 다니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다. 밀리의 서재나 리디북스 같은 서비스는 한 달에 만 원 미만을 내고 수천, 수만 권의 책을 읽을 수 있게 한다. 음악을 음반이나 시디로 듣지 않고 스트리밍 하는 것과 똑같은 논리다. 심지어 요즘은 운전을 하면서도 들을 수 있는 오디오책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채널의 변화는 사람들의 책읽기 양식도 함께 바꾸었다. 혼자가 아닌 '함께' 책을 읽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점이다.


독서 모임하면 생각나는 '트레바리'는 함께 책을 읽는 서비스다. 아지트란 이름의 공간에서 비슷한 취미와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모여 책을 읽고 토론한다. 지역마다 이런 독서모임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은 일이 되었다. 심지어 '모두의연구소'에서는 전공자와 비전공자가 함께 모여 AI를 공부한다. 앞서 말한 탈중앙화의 흐름은 자연스럽게 탈개인화(Depersonalization)로 이어진다. 유행의 중앙에서 멀어지니 다시 외로워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대세를 따르진 않는다. 대신 나의 취향을 존중하고 공감받을 수 있는 모임이나 공동체를 찾아다니는 것이다.


그러니 팩트의 이면에 있는 유행이나 트렌드에 관심을 가지자. 그리고 그 이유를 집요하게 따라가보자. 세상에 이유없는 무덤이란 없는 법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러한 변화의 이유를 궁금해하고 있을 것이다. 마치 시간 들여 알아보긴 귀찮고, 그냥 넘기기엔 왠지 찜찜한 궁금증을 해결해주는 진용진이란 사람이 운영하는 유튜브처럼 말이다.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은 생리적인 욕구가 아닌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도무지 돈이 되지 않는 시를 쓰고 읽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리고 이 욕망의 시작엔 호기심과 설렘 등의 감정이 담겨 있다. 우리가 쓰는 글을, 그리고 우리가 쓰는 책은 이런 설렘 가득한 질문을 담아야 한다. 그리고 독자는 호기심에 당신이 쓴 책을 덥썩 물어버릴 것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