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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대의 빨강머리 앤을 만났습니다

잠원동 고즈넉한 골목에 자리잡은 논술 학원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11시, 저는 주소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건물 2층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낸 것처럼 저를 맞는 원장님을 만났습니다. 마주 쥔 손이 따뜻했습니다. 그리고 무려 28년 간이나 아이들을 가르치셨을, 생각보다 너른 공부방으로 안내되었습니다. 솔직히 전후 사정을 잘 모르고 찾아갔습니다. 스몰 스텝을 함께하는 석헌님으로부터 저를 만나고 싶어하는 분이 계시다는 얘기만 들었을 뿐입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얼마나 대단한 분들을 만날지 잘 알지 못했습니다.


자리에 앉아 있으니 한 분이 더 오십니다. 영문도 모르고 인사부터 나눕니다. 하지만  어색함은 없었습니다. 원장님과 서로 책 사인을 주고 받은 후 바로 대화가 이어졌습니다. 제가 쓴 책에 빼곡히 책갈피를 꽂은 모습이 언뜻 보였습니다. 괜스레 마음이 편한해집니다. 원장님은 익숙한 듯 밑줄 그은 페이지를 넘겨 궁금했던 점들을 제게 물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빨강머리 앤'에 나오는 앤을 만난 기분입니다. 호기심과 유쾌함이 반반씩 섞인 질문에 저도 막힘없이 술술 답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알고 보니 그 시간은 몇 달 동안 이어진 글쓰기 학교의 종강 시간이었습니다.


두 분 다 넉넉한 삶을 사는 분들입니다. 말과 행동에 여유가 넘칩니다. 그동안 열심히 살아오신 결과입니다. 연세가 60대 중반이시지만 표정은 어떤 젊은이들보다 밝고 맑습니다. 우리는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첫 번째 주제는 '변화'입니다. 30년 가까이 아이들을 가르치신 원장님은 광고 한 번 없이 논술 학원을 운영해왔습니다. 하지만 아쉬움이 있다고 했습니다. 특히 커뮤니티 운영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모이고 배운다는 사실을 어깨 너머로 알게 된 탓입니다.


은퇴하신 다른 한 분은 삼성을 은퇴한 분이십니다. 돌아오는 질문들이 매섭습니다. 요즘 시대를 관통하는 키워드가 무엇이냐고 물으십니다. 저는 주저 없이 '나다움'이라고 했습니다. 혼자만 생각하는 지금 세대가 걱정된다고 하십니다. 나는 꼭 그렇진 않다고 답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나다움은 타인과의 교류를 통해 가치를 나누는 과정에서 생겨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고개를 끄덕이십니다. 자신의 주장은 있지만 남의 말도 들으십니다. 두어 시간이 훌쩍 지나갑니다. 그 사이에 우리의 모의와 작당은 어느 새 구체적인 약속들로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곰곰히 생각해보았습니다. 나는 어떻게 나이를 먹고 있는가, 어떻게 먹어가야 하는가. 이 두 분들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세상의 변화가 너무나도 흥미로워서 호기심이 넘칩니다. 늘 배우고 싶어하십니다. 편안한 노후보다는 에너지 넘치는 하루를 동경합니다. 일과 쉼의 구분이 선명하지 않습니다. 일하면서 쉬고, 쉬면서 일하십니다. 누구에게 손 벌리지 않을 만큼의 여유가 있습니다. 배우고 토론하기를 즐깁니다. 어쩌면 저는 그분들에게서 가까운 저의 미래를 본 것만 같습니다. 돌아오는 내내 가슴이 뛰었습니다.


원장님은 글쓰기 전문가십니다. 하루 동안의 가이드로 수없이 많은 브런치 작가를 배출하셨습니다. 다른 선생님은 강남의 건물주입니다. 배우고 싶어하는 분들을 위해 기꺼이 공간을 제공하겠다 하십니다. 우선 이분들을 위한 특강을 열어보기로 했습니다. 반응에 따라 커뮤니티도 운영해보기로 했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배우고 싶어서입니다. 그 지혜를 책으로 엮어보고도 싶습니다. 오늘처럼 웃고 떠들며 토론한 내용을 글로 써보고 싶습니다. 꼰대가 아닌, 열린 어른들의 대화는 보석처럼 소중합니다. 제가 그 가교 역할을 하고 싶다는 강한 열망이 일었습니다.


뜻밖의 만남은 인연이 되어 별자리가 됩니다. 점과 점이 이어져 선을 만들고 면을 만듭니다. 나이 50에 만난 세상은 2,30대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빛이 나고 신이 납니다. 나이는 젊으나 생각은 꽉 막힌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지만 나이를 불문하고 생각이 통하는 사람들과의 수다는 '살아있다'는 기분이 들게 합니다. 그런데 이미 이렇게 살고 있는 분들이 뜻밖에 많습니다. 매일 매일이 새롭습니다. 어렵고 속상한 일들도 끊이지 않는 요즘입니다. 하지만 기쁘게 견딜만 합니다. 또 오늘은 어떤 인연들을 만나게 될까요? 나도 모르게 설레는 마음으로 거실 창문을 열었습니다. 상쾌한 바람 한 줄기가 목덜미를 타고 지나갑니다. 이렇게 또 하루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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