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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각역 비빔국수와 일상의 황홀

면을 사랑한다. 면으로 된 것이면 무엇이든 좋아한다. 라면, 소면, 쫄면, 국수, 스파게티... 심지어 부대찌개 속 라면이나 물회에 잠긴 소면조차도 이유를 막론하고 사랑한다. 종각역 인근에서 미팅을 마친 어제도 그랬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조그만 노포를 발견했다. 거대한 빌딩 숲속에서 분식집의 허름한 모양새가 더없이 당당해 보였다.


점심 시간을 약간 넘긴 오후의 작은 분식집, 주인은 깡마르고 거친 목소리의 할머니셨다. 메뉴를 살피던 내 눈에 비빔 국수가 들어왔다. 이유 불문 주문을 했다. 그 사이 사이 굳이 김밥의 종류를 묻지 않는 단골들이 몇 들어왔다. 벽에는 때묻은 메모지들이 빼곡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기분 좋은 허기를 느꼈다.


이윽고 국수가 나왔다. 면발 쫄깃하다. 양념 적당하다. 짙은 고추장 베이스에서 왠지 모를 신뢰를 느낀다. 그 위에 올린 김가루가 묵은 양념에 화룡점정을 찍는다. 첫 입에 반했다. 반찬은 달랑 단무지 두 개. 먹으면서 이유를 알았다. 잘 볶은 김치가 소면 아래 숨어 있었다. 먹으면서 후회했다. 김밥 하나 미리 시킬 걸. 이래서 단골들의 주문을 훔쳐 들어야 한다.


빌딩 숲은 화려하다. 종각에서 외국인을 만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렇게 글로벌한 서울에서 굳이 조그만 분식집을 찾는 일이 이상하게 뿌듯한 마음이 든다. 문득 구본형씨가 쓴 '일상의 황홀'이라는 책 제목이 떠올랐다. 집 주변 산을 오르며 감탄을 내뱉던 그의 심정을 오늘에서야 알았다. 그렇지. 일상도 가끔은 황홀할 때가 있지.


저녁에는 친구가 톡을 보내왔다. 부산에 있는 이케아에서 일하는 친구다. 숨고에서 일을 하고 10만원을 받았단다. 그리고 5만원 짜리 보쌈 먹는 사진을 단톡방에 올려 놓았다. 집주인과 와이프는 그 10만 원을 주기 싫어 일하는 사람 앞에서 서로 삿대질을 했다고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런 작은 소란이 있는 삶도 황홀한 삶이다. 나는 맛있는 비빔국수를 먹었고, 친구는 빻은 마늘이 올라간 수육을 먹었다. 이쯤 되면 황홀하지. 둘 다 잘 살았다고 생각하고 기분 좋게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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