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아도 괜찮아, 어느 스몰리스트의 이야기 #16.>
어느 날 친구와 함께 일하던 공유 오피스에 가던 길이었습니다. 건널목 앞에서 멈춰선 어떤 여자를 보고 나는 순간 얼음처럼 굳어버렸습니다. 만 가지 생각이 교차했습니다. 상대가 남자였다면 뒷통수를 쳤을지도 모릅니다. 여러가지 욕에 해당하는 단어, 말, 문장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는 사이 파란불이 들어왔습니다. 그 여자는 예의 걸음걸이 그대로 유유히 인파 속으로 사라져갔습니다.
그 사람은 한때 나의 부하 직원이자, 동료이자, 상사였던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내 손으로 뽑았던 사람인 동시에 아주 짧게 상사였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욕심도 열심도 많은 친구였습니다. 동시에 제가 아는 한 회사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불편해했던 사람입니다. 어찌나 공격적인지 출근하는 구둣소리만 듣고도 가슴이 쿵쿵 뛰던 때가 있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알았습니다. 내가 그 사람의 가스 라이팅 상대였다는 것을. 내가 너무도 착하게만 살았던 탓입니다.
오랫동안 나는 그 모든 분란의 이유가 내 리더십 부족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나는 에디터의 경험 없이 팀장이 되었습니다. 도움을 얻기 위해 경력자를 뽑았습니다. 하지만 나의 실체가 드러난 후 그녀는 돌변했습니다. 거의 모든 의사 결정에서 하나씩 나를 무시하고 배제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그 과정이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 착각이었습니다. 그녀는 회사 대표의 팀장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였습니다. 하루 아침에 나와 그녀의 책상이 바뀌었습니다. 애석하게도 나는 쿨하지 못했습니다. 우울과 절망, 공황장애가 찾아왔습니다.
나를 굳이 변호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녀는 능력 있는 후배였고, 그 능력을 따라 팀장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팀장이 된 그녀는 대기업과 일하면서 담당자와 싸움이 나고야 말았습니다. 회사 대표가 나를 불러 이 친구를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나는 그녀를 도와 일주일간 밤을 새며 프로젝트를 마무리지었습니다. 하지만 그 책의 맨 뒷장에는 오직 자신의 이름만 들어가 있었습니다. 나는 더 이상 착한 역할을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좋은 마음을 벗어던졌습니다. 돼지 목에 보석을 걸어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나의 우울을 치료해주겠다며 기도 모임에 데려가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정작 자신이 내 모든 우울의 원인임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그 날 건널목 앞에서 만감이 교차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입니다. 나는 아직도 그녀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때로는 받아들일 관계가 있고, 때로는 버릴 관계도 있음을 그제서야 배웠습니다. 돼지에게 보석을 걸어주지 말라고 한 건 성경 속 말입니다. 예수님은 고리대금업자의 사업장을 뒤엎고 세관원들에게 '독사의 자식'이라는 표현도 서슴없이 했습니다. 나는 마냥 착하기만한 나의 가면을 벗어던졌습니다.
나는 더 이상 착하게만 살지 않을 겁니다. 착함이 무능함으로 인식되는 이 시대의 시선 때문만은 아닙니다. 제 성정을 거슬러 나쁜 사람이 되겠다는 어설픈 다짐도 아닙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을 믿고 사랑하겠다는 욕심을 버리겠다는 말입니다. 무례한 사람에게까지 애써 인류애를 베풀 필요는 없습니다. 나는 예수님도 아니고 하나님도 아닙니다. 원수를 사랑할 만큼 큰 사람이 못됩니다. 내게 잘해주는 사람과의 관계를 지키는 것만 해도 버겁습니다.
혹 저같은 포지션으로 힘든 직장 생활을 하고 있다면 회사를 나오십시오. 당신은 그 회사는 커녕 단 한 사람의 마음도 바꿀 수 없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동시에 다른 누군가에게 사랑받기 충분한 좋은 사람입니다. 세상은 넓고 일할 곳은 많습니다. 아무리 회사 밖이 지옥이라 해도 가스라이팅 당하는 직장보다는 훨씬 더 좋은 곳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 날 건널목에서의 일을 얘기했더니 와이프가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어떻하긴 뭘 어떻게 해. 무시해. 반응하지 않는게 최고의 복수야." 언젠가 다시 그녀를 만나면 그렇게 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하지만 다시는 만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