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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농업적 근면성'으로 일하고 있습니까?

조금 소심하지만, 잘 살고 있습니다 #20.

어느 경제 언론사의 이사님을 인터뷰했습니다. 그 날이 바로 3년 만의 첫 휴가라고 했습니다. 휴가지가 어디냐고 여쭤보니 한남동 집 옆의 이태원에 있는 호텔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1시간 반 가량의 열정적인 인터뷰가 이어졌습니다. 누가 봐도 리더이고, 누가 봐도 멋진 커리어 우먼이었습니다. 그런데 인터뷰가 끝나가던 시점에 자신은 엄청난 내향성(ISTJ)의 소유자라고 고백하시더군요. 일터와 집에 완전히 다른 캐릭터로 살아가신다고 했습니다. 평일 동안은 미친듯이 일하지만 주말엔 절대 집밖에 나오지 않는 그런 삶을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문득 최근에 본 '한산'이라는 영화가 생각이 났습니다. 고뇌에 찬, 과묵하고도 결단력 있는 이순신 장군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어땠을까요? 그가 쓴 난중일기에는 전쟁에 대한 불안과 걱정, 고민이 낱낱이 드러나 있습니다. 악몽을 꾸고, 땀에 흠뻑 젖은채로 일어나 새벽을 지새우는 날들이 많았습니다. 분명 그는 대범한 호인의 유형은 아니었습니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의심하고 닥달하고, 때로운 우울에 빠지는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그를 더욱 깊이 흠모하고 존경하게 됩니다.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이라는 사실에 더 깊은 위로와 공감을 얻습니다.


제가 만난 세상의 리더들은 압도적으로 탁월한 분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덜 고민해도 더 압도적인 결과를 만들어내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저와 크게 다르지 않은 소심한 리더들도 많이 만났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언론사 이사님께 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계속 해오신 힘은 어디에서 왔냐고. 그는 자신의 일을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24시간 긴장한 채로, 3년간 휴가없이 해야 하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그 일이 너무 재미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치밀하고 치열하게 일한다고 했습니다. 경쟁 PT를 하게 되면, 준비하는 자료를 보면 토가 나올 정도로 반복하고, 반복하고 또 반복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문득 1년 전쯤 만난 대기업 이사님이 생각이 났습니다. 누가 봐도 멋지고, 세련되고, 스마트한 커리어 우먼이었습니다. 그러나 역량 있는 마케터가 되기 위한 노력의 방법으로 '농업적 근면성'을 이야기했습니다. 자신은 논과 밭에 씨를 뿌리는 마음으로 매일 매일 성실하게 일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마치 수능 만점자가 교과서 위주로 열심히 공부했다는 답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이 50이 되어 돌이켜 보니 이 말이 새삼 다르게 와닿습니다. 남들은 그 치열함에 혀를 내두르겠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제 생각은 다릅니다. 분명 힘들고 어려운 일에 분명하지만 그들은 그 일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지치지 않고 반복할 수 있었던 겁니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 타고난 소심함과 게으름 탓에 혹독한 직장 생활을 보냈습니다. 우울증과 공황장애가 뒤를 따랐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20여 년을 일하고 보니 그래도 조금은 단단해졌습니다. 특별한 비법은 없었습니다. 그저 견디고, 견디고, 또 견디는 수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수없이 많은 수모와 절망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뒤늦게 깨달은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그건 제가 너무나도 '브랜드' 관련 일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2008년 처음으로 브랜드 전문지에 입사한 이후로, 이 브랜드에 관한 저의 관심과 애정은 몇 배로 더 커졌습니다. 강의할 때마다 청중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브랜드, 너무 너무 너무 재밌지 않나요?"


소심함을 이겨내는 방법에 왕도 따윈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일이 재밌고 흥미롭고 즐거운 일이라면, 그 일의 현장이 혹독하더라도 견뎌낼 수 있습니다. 오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오래 한 가지 일을 반복하게 되면 전문가가 될 수 있습니다. 10년 혹은 10000시간의 법칙은 과장이 아닙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반복하는 시간이 아니라 그 일에 대한 애정의 밀도입니다. 10년 동안 지겹도록 그 일을 했는데도 여전히 그 일과 관련된 이야기를 들으면 흥미롭고 즐거우신가요? 제가 그렇습니다. 여전히 새롭고 흥미로운 브랜드를 만나면 가슴이 떨립니다. 그런 브랜드를 만든 사람, 그 자신이 브랜드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큼 신나고 재미난 일이 다시 없습니다.


공정을 이야기하는 젊은 친구들이 걱정이 됩니다. 자신의 입맛대로 취사 선택한 공정은 그저 한낱 '이상'일 뿐입니다. 세상은 원래 공정하지도, 공평하지도, 정의롭지도 않습니다. 만일 그랬다면 자유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고난을 당하고 목숨을 잃는 일 따위는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진리는 있습니다. 자신이 좋아하고, 잘하고, 심지어 그 일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면 좀 더 쉽게 견뎌내고 종국에는 그 일의 전문가가 되는 일이 어렵지 않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시대는 그런 진짜 전문가를 찾고 또 열광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돈과 성과, 명예는 그저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결과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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