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어느 소심한 고양이 집사의 반성문

고양이를 키운다. 세 마리를 키운다. 그런데 막상 써놓고 보니 '키운다'는 이 표현이 맞는지 매우 애매해진다. 데리고 산다? 그것도 아니다. 모시고 산다? 조금 비슷해진다. 저들이 하는 일은 늘어지게 자거나 스크래쳐를 할퀴거나 먹고 싸는 일 뿐인데, 소위 키운다는 사람이 하는 일은 너무도 많다. 사료와 물을 채우고 모래와 배변 패드를 치우고, 흩날리다 못해 얼키고 설킨 털을 치우고, 다시 사료와 패드와 스크래쳐를 주문하는 날들이 반복된다. 상전도 이런 상전이 따로 없다.


폭풍우 치던 전날, 유독 목소리가 컸다는 와이프와 딸의 말빨로 고양이 별이를 떠안게 됐다. 루이와 그의 새끼 까망이는 가족 회의 끝에 입양을 결정했다. 그리고 어느 주말, 유독 큰 소리로 울며 마을이 떠나가게 존재감을 드러냈던 뚱이는 내가 데려왔다. 이유는 각각 다르지만 가장 천방지축인 뚱이 때문에 욕이란 욕은 내가 다 먹고 있다. 매미를 잡아오더니, 어느 날은 떡하니 비둘기를 잡아왔다. 결혼 생활 20년 만에 그렇게 큰 아내의 비명 소리를 들은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반지하에 사는 깡마른 청년이 '무언가가 뛰어다닌다'며 항의를 했을 때는 심각하게, 아주 심각하게 이들의 '처분'을 고민했었다. 이건 가족도 모르는 일이지만, 나는 1층 거실 창문 밖으로 몰래 뚱이를 내보내고 문을 닫았다. 너가 뛰어다니는 통에 우리가 집을 나갈지도 몰라. 이런 거룩한 이유로 문을 닫고 한참을 소리 죽였다. 그러나 뚱이는 마치 처음 내가 간택을 당했던 그날처럼 큰 소리로 울며 문을 긁어댔다. 그렇게 나의 소심한 유기는 단 5분 만에 정리되었다. 그리고 우리집 고양이들은 이제 자유롭게 거실문을 통해 마실을 다니는 새로운 습관이 생겼다. 아무 때나 나갔다가 아무 때나 들어온다. 몰래 '버렸다'고 생각했던 나의 결단이 이토록 무색해지다니.


한 번은 시골 쌈밥집 상추에서 달팽이가 나온 적이 있었다. 아이들이 귀여워했다. 키우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정작 매일 상추를 주고 달팽이를 돌보는 건 나 뿐이었다. 심지어 달팽이는 알도 낳았다. 그 알이 또 달팽이가 되었다. 그렇게 3대를 키우다가 어느 날 큰 마음을 먹고 계곡에 풀어주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상추를 갈아줄 때면 면봉으로 달팽이 새끼를 옮겼다.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 스스로도 의아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내 마음 속 답은 선명했다. 이것도 '생명'이니까 버리면 안된다였다. 그렇게 작은 물고기 구피도 몇 대에 걸쳐 키웠다. 이제는 고양이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것도 소심한 탓이리라. 고양이 뚱이를 내보내고 어찌나 심장이 쿵쿵 뛰었는지 모른다. 키울 형편이 못되어 교회 앞 아기 상자에 자신의 아이를 내놓는 심정을 잠깐 떠올릴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이 소심함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도움이 된다. 보신이 필요한 친구에게 누룽지 백숙을 사줄 수 있고, 코로나에 걸린 친구에게 유쾌한 직장 생활 얘기를 담은 책을 사줄 수 있으니까. 모두에게 친절할 순 없지만 몇 몇 사람에게는 다정해질 수 있으니까. 가끔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배려할 수 있으니까. 깨어지고 끊어진 관계에 대해 두고 두고 가슴 아파할 수 있으니까. 사람도 생명이니까. 그래서 나는 오늘도 고양이의 변을 치우면서 건강을 걱정한다. 조금 더 비싼 사료를 사드려야 하나. 소심한 집사의 하루가 이렇게 저물고 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