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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꿈 꾸던 날

조금 소심하지만, 잘 살고 있습니다 #27.

가끔 개꿈을 꾼다. 그 날 아침은 괜히 찜찜해진다. 아주 아주 가끔 이빨 빠지는 꿈을 꾼다. 매우 불안한 심정으로 네이버를 검색한다. 온갖 꿈풀이들이 넘쳐난다. 아랫이 윗니를 기점으로 꿈풀이도 달라진다. 출근길의 모골이 송연해진다. 그나마 다행인건 차가운 아침 바람이 따뜻하게 데워지는 정오가 되면 그냥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과연 그꿈이 맞았는지 틀렸는지, 꿈대로 불길할 일들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가늠할 길이 없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개꿈을 꾼다. 이빨 빠지는 꿈을 꾼다. 잊을만 하면 한 번씩 아주 가끔.


한 번은 가위에 눌린 적이 있었다. 정신은 말짱한데 누군가 내 위에 올라탄 듯 꼼짝달싹할 수 없었다. 그때 나는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주기도문을 외웠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의식이 명료해선지, 너무 자주 외운 탓인지, 단 번에 아멘까지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가위가 사라졌다. 아쉬운건 그 효능?을 확인해볼 기회가 다시는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도 다행인건 여지껏 한 번도 귀신을 만나지 않았다는 정도다. 습관처럼 얼굴 반쪽짜리 귀신을 생생하게 만났던 어느 친구에 대한 기억이 새삼스럽다. 물론 그 친구도 아주 잘 살고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진짜 모골이 송연해지는 날은 따로 있다. 명치 끝에서 종양 비슷한 게 만져진다든가 (검색을 해보면 나이 들면 만져진다고 했다), 귓볼에 좁쌀만한 멍울이 잡힌다거나, 손톱 위에 까만 줄이 생긴다거나, 친구가 대장내시경 검사를 받았는데 선종이 있었다거나, 또 다른 친구가 이름도 생소한 암 진단을 받았다거나, 누군가의 장례식장에서 죽음을 생각할 때면, 어떻게든 웃고 있지만 세상 소심한 내 모습을 보고 한심해지는 것이다. 왜 나는 이렇게 깃털처럼 가벼운가, 내 삶은 왜 이렇게 쉽게 흔들리는 것인가 하고 자조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참 부러운 친구가 있긴 하다. 이 친구랑 가면 멀쩡한 가게가 문을 닫아있곤 했다. 분명 주말에 쉬는 가게라 평일에 가면 내부 수리를 한다고 했다. 멀쩡한 날이었다가 이 친구를 만나면 비가 쏟아지곤 했다. 한 번은 컨설팅 때문에 매주 가던 스타벅스에서 만나기로 이 친구와 약속을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친구를 만나던 그 날 스타벅스는 영문도 알지 못한채 텅텅 비어 있었다. 파괴왕 주호민의 귀여운 버전이랄까. 하지만 이 친구는 항상 웃는다. 아버지의 억대 빚을 30년 간 갚고 있는 친구다. 그리고 소심한 나는 이 친구의 불행을 보고, 아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는 친구를 보고 힘을 얻는다. 좀 더 대담해지자고 스스로를 격려한다.


삶이 때때로 외줄타기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그건 지금처럼 혼자 다닐 때 뿐 아니라 월급을 타며 회사를 다닐 때도 마찬가지였다. 지금도 한 치 앞을 예상 못하는 삶을 살고 있지만, 회사를 다닐 때도 늘 불안했다. 늘 위기였고 늘 사표를 품에 안고 살아야 했다. 하지만 그것은 삶의 초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달린 것임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어차피 삶은 유한하다. 그 대전제 앞에 아주 작은 불안과 불행은 정말로 소소한 것들이 된다. 그리고 그만큼이나 작고 소소한 행복과 기쁨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다른 이는 몰라는 나는 성격상 낙천주의자가 되긴 힘들 것 같다. 하지만 그 예민함으로 불안과 불행만을 좇을 이유는 전혀 없다고 본다. 하루를 살다보면 기분 좋은 일이 한 가지 이상은 있다. 좋은 사람, 맛있는 음식, 행복한 경험... 그것들을 기록하는 습관이 오롯이 '스몰 스텝'이라는 한 권의 책이 되었다. 스몰 스텝을 실천하는 단톡방을 보니 밤새 추석에 바라본 밤 하늘의 달 사진이 한 가득 올라와 있었다. 아, 이런 게 살아가는 것이구나, 함께 살아가는 것이구나, 그런 마음으로 이 글을 쓰는 새벽이 따뜻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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