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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됨과 낡음은 시대의 새로움이다, 개항로 맥주

여기 아주 특별한 맥주가 있습니다. 커다란 맥주병에 거칠게 쓰여진 로고는 요즘의 세련된 맥주들과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죠. 그런데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요. 이 글씨는 1968년부터 목간판을 만들고 있는 노포 전원공예사의 장인 전종길 씨가 썼기 때문이죠. 광고 포스터는 더욱 더 특별합니다. 수십 년 전 유행했을 법한 모델의 포즈와 폰트가 강렬합니다. 이 포스터의 모델은 과거 인천 개항로 극장에서 간판을 그리던 페인트 가게 사장님인 최남선 씨가 맡았습니다. 하지만 이 광고 덕분에 그는 현재 유명한 셀러브리티가 되었습니다.


무슨 얘기냐고요? 바로 인천의 명물 '개항로 맥주'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맥주를 편의점이나 마트, 심지어 택배로도 구할 수가 없어요. 이 맥주를 마시려면 인천으로 직접 가야만 하죠. 인천 개항로 인근의 가게나 공장을 찾아가야만 비로소 맛볼 수 있어요. 개항로 맥주는 현재 하얏트 인천과 파라다이스 호텔 등 5성급 호텔을 비롯해 인천 지역 250여곳에서만 판매되고 있거든요. 문득 "맥주는 양조장 굴뚝이 보이는 곳에서 마시라”는 독일의 격언이 떠오르네요. 이동 거리가 짧아 그만큼 신선한 맛을 즐길 수 있다는 얘기니까 어쩌면 당연한 말로 들립니다. 그래서 이 맥주의 탄생 배경이 궁금해지더라고요. 이 개성 넘치는 맥주는 어떤 사람의 어떤 사연을 가지고 이 세상에 나온 것일까, 하고요.


개항로 프로젝트의 시작


인천의 중구는 한때 인천에서 가장 번화한 지역이었다고 합니다. 특히 신포동은 서울의 명동처럼 활력이 넘치고 호황을 이루는 거리였죠. 하지만 신도시 개발 등으로 인하여 중구는 가장 번화한 도시라는 타이틀을 다른 지역에 넘겨주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인천은 구도심을 재개발하는 대신 땅을 매립해 신규 주택을 지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은 전국에서 구도심이 가장 많은 지역으로 꼽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기존 건물이나 시설, 공간을 때려 부수고 새로 짓는 방식이 아니었던 탓이죠. 그래서 오늘날까지 근대문화가 잘 보존된 곳으로도 평가를 받고 있고요.


그런데 인천에서 태어난 이창길 대표가 이 공간에 주목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버려진 공간을 리모델링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었습니다. 그의 손을 거쳐 제주 귤창고가 펜션 ‘토리코티지’로, 이대 앞 여관이 호텔로 변신할 수 있었죠. 그는 인천의 노포를 콘텐츠로 내세우는 것이 최근 트렌드와 걸맞으면서도 이 일대 지역 주민과도 상생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2018년부터 이곳의 건물 20여 채를 사들이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수십년간 공실로 남아있던 건물을 카페, 술집, 편집숍, 숙박시설 등으로 개조했죠. 그렇게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진 중구 일대 골목길을 '인스타그래머블'한 상권으로 하나씩 바꿔갔습니다. 이른바 '개항로 프로젝트'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대표가 사들인 건물 인근에는 40년 이상 된 노포가 60개 넘게 있었습니다. 이들 노포는 인천의 번화기 때 상권의 부흥을 주도했던 상점들이었죠. 전국 최초의 쫄면 제면소인 ‘일광제면’, 포스터로 벽화를 내걸었던 영화관, 50년째 운영하는 목공예품 공작소 ‘전원공예사’ 등이 대표적인 곳들이에요. 이 대표는 이들 점포의 역사와 특화된 제품을 스토리화 해 SNS를 통해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이 노포를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인천 개항로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이 대표의 예상이 적중한 셈이었죠.


한편 인천맥주의 박지훈 대표가 개항로 맥주를 만든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그에겐 항상 자신이 사는 지역에서 자신이 만든 맥주를 마실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었죠. 지역 사람들이 좋아하는 맥주, 사람들이 찾아와서 마시는 맥주를 만들고 싶다는 갈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저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고향 동네가 활기를 되찾기 바라는 소망이 깔려있었죠. 그러더 어느 날 박 대표는 술자리에서 이창길 대표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의기 투합했어요. 이 지역에서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맥주, 인천의 대표적인 맥주를 만들어보자자는 다짐이었죠. 하지만 대형 주류회사와 경쟁하기 위해 시작한 것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지역에 맞는 제품을 만들고, 지역에 맞는 이야기를 가진 분들과의 작업을 시작했죠. 개항로 맥주는 그렇게 세상에 나올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로컬에 다시 눈 뜨는 이유


요즘 로컬이 뜨고 있어요. 동네 브랜드가 사랑을 받는 것처럼 지역색 넘치는 브랜드들의 줄을 잇고 있죠. 춘천의 감자빵, 제주의 해녀의 부엌, 인천의 조양방직, 부산의 삼진 어묵 등 지역성을 강조한 브랜드들은 그 종류만 해도 매우 다양해졌어요. 이런 변화의 이유로 레트로 열풍의 영향을 빼놓을 수 없죠. 이제 지역이 곧 변두리의 상징이 되었던 시대는 종말을 고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 더딘 발전이 특색있음으로 새롭게 해석되고 있거든요. 특히나 MZ 세대들은 뻔한 도심의 정취를 넘어선 지역의 매력에 매료되고 있죠.


개항로 프로젝트를 진두 지휘 중인 두 대표의 생각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갔습니다. 오랜 시간 노포를 운영한 상인들의 시간과 철학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다는 생각으로 이들과 관계를 맺고 협업을 시작했죠. 노포상인의 내공에 새로운 트렌드를 접목하니 '올드앤뉴(Old and New)'라는 아이덴티티가 탄생했습니다. 그리고 이 개성 넘치는 제안에 MZ세대가 반응하기 시작했어요. 개항로 맥주는 이렇듯 시대의 필요를 읽고 과거의 유산을 재해석한 용기 있는 도전의 결과물인 셈입니다.


남의 장점을 따라가는 일은 경쟁이 필수입니다. 매우 어려운 일이죠. 하지만 개항로 맥주가 카스나 테라, 혹은 제주 맥주를 따라했다면 똑같은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까요? 저는 힘들었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개항로 맥주는 다른 길을 갔습니다. 지역의 의미를 재해석하고 그 올드함을 새롭게 해석했죠. 오래된 것을 유니크함으로, 유통의 한계를 판매 방식의 차별화로 극복해낸 겁니다. 그러니 우리의 브랜드가 가진 단점에서 '나다움'을 찾아내보자구요. 나의 약점이 오히려 차별화된 강점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오래되고 소외된 도시 인천의 맥주 브랜드 개항로는,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크고 오래 남는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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