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몰 미라클 #01.
오랫동안 준비했던 워크샵 하나를 끝냈다. 이런 저런 이유로 모객이 늦어져 마음이 쓰였던 프로그램이었다. 다행히 참여자들의 만족도가 높아 뿌듯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와 밥을 먹었다. 그리고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한참을 잔 후 눈을 떴더니 시간은 아직 12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때 고양이 뚱이가 내 배 위로 올라와 잠을 청한다. 유난히 털이 매끄러운 이 녀석을 배려하느라 신경을 쓰다보니 잠이 완전히 달아나 버렸다. 어느새 뚱이는 내 가랑이 사이에서 골골거리며 단잠을 자고 있다. 문득 이 상황이 너무나 평화롭다는 생각이 들어 자리를 털고 일어나 컴퓨터 앞에 앉았다. 마치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노인이 사자의 잠을 자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바다에 나가는 장면이 떠올랐다. 이제 반백의 나이가 된 나는, 그 노인의 마음을 조금은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
최근 들어 친구 하나가 두 번째 암 수술을 받았다. 신장으로 전이된 암이 아주 곤란한 위치에 있다고 했다. 걱정과 기도로 친구의 암은 적어도 보이는 부분만큼은 제거되었다고 한다. 이제는 기다리고 견디는 시간만 남았다. 나는 친구에게 아주 오랫동안 기다리고 견뎌보자고 제안했다. 아직 스탬프란 것을 제거하지 못한 상태지만 그래도 우리는 송년회를 핑계로 만나기로 했다. 작은 기적이다. 우리에겐 매일이 기적이다. 친구는 암을 앓고 있지만 누가 먼저 이 세상을 떠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친구 때문에 다시 한 번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이런 깨달음은 아주 자잘한 일상의 고민과 번뇌로부터 한 걸음 떨어져 있게 한다. 사실 나는 아주 어린 시절 수영을 하다가 물에 빠져 죽을 뻔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어렴풋한 임사 체험을 했다. 물에 빠졌지만 숨이 가쁘지 않았다. 저 멀리 빛이 빛나고 있었고, 나는 너무 어린 시절에 죽는 것이 억울하다고 생각했다. 그때 불쑥 내 몸은 떠올랐고, 그후로 나는 수영을 배울 수 없었다. 그래도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나름의 소박한 믿음을 가진채 살아올 수 있었다.
삶은 안개와 같다. 어린 시절 살던 시골 마을엔 종종 몇 미터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가 찾아오곤 했다. 그럴 때면 나는 맞은 편 안개가 자욱한 편을 향해 미친 듯이 뛰곤 했다. 그 안개 속에 숨어버리고 싶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가 뛰어간 곳은 내가 이전에 있던 곳과 같았다. 그리고 내가 이전까지 있었던 그곳이 안개로 뒤덮여 또 다시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었다. 내가 주변을 또렷히 볼 수 있는 곳은 나를 둘러싼 반경 수 미터의 원 안이었다. 그때 깨달았다. 삶은 미지를 향한 여행이라는 것을. 내가 볼 수 있는 삶의 시야는 언제나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그 원을 벗어나 달려보아도 내가 볼 수 있는 곳은 언제나 반경 몇 미터의 원 안일 뿐이라는 것을 말이다.
스몰 스텝은 내가 볼 수 있는 그 작은 원 안에서 열심히 살자는 일종의 각오이자 제안이었다. 내 전체의 삶을 관장하는 미래는 어차피 내가 관여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아무리 달려도 그곳은 언제나 안개에 덮여 있을 뿐이었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먼 미래를 걱정하기 보다 눈 앞의 내 삶에 충실하자는 것, 그 성실한 삶을 담보로 내 미래를 조금씩 밝혀가자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옳았다. 책을 쓰고, 강연을 하고, 그로 인해 티끌만한 유명세를 탄 것은 행운이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내 삶은 단단해졌고 더 이상의 우울과 무기력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전보다 좀 더 많이 웃을 수 있었고 행복할 수 있었다. 내 경험을 타인과 나누는 기쁨은 아주 보람찼다. 나의 쓸모를 발견한다는 것, 나의 하루가 의미있어진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저 매일 일기를 쓰고, 영어 단어를 외우고, 읽은 책의 문장을 나누고, 사진을 찍고,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내 삶은 아주 작은 성취를 경험할 수 있었다. 나는 그것은 '나다운 삶'이라고 불렀다.
그렇게 4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나는 이 모든 과정이 문득 '작은 기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 삶은 누군가에겐 평범한 일상이었는지 모른다. 기분 좋게 아침을 깨우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일하고, 그 일에서 성취를 얻고, 저녁이면 맥주 한 캔과 함께 드라마에 푹 빠지고, 또 다시 기분 좋게 잠자리에 드는 삶, 그런데 나는 아주 오랫동안 이런 평범한 삶을 살지 못했다. 일에 쫓기고 사람에 쫓기고 아주 평범한 보통의 삶에 쫓겼다. 나이에 걸맞게 살고 싶어 안간힘을 썼다. 그런데 그럴수록 내 삶은 불행해졌다. 불면의 밤이 찾아오고 번아웃이 찾아왔다. 상사의 다그침에 쫓기고 동료들과의 경쟁에 쫓기고 때로는 부하 직원들의 불신에 쫓겨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일과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일하는 법을 체득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선 일단 솔직해져야 했다. '나다운 삶'을 정의내릴 수 있어야 했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야 했다. 스몰 스텝은 그런 내 삶을 인도하는 아주 선명한 문장이자 가치이자 가이드였다. 나의 이 소박하기 그지 없는 삶도 행복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아주 작은 확신이자 깨달음이었다.
그리고 이제 나는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다. 이런 스몰 스텝을 밟아나가다보면 결국엔 내가 원하는 아주 작은 기적의 삶을 살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생겼기 때문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느 날 야구장에서 공이 배트에 맞는 '땅'하는 소리를 듣고 소설을 써야겠다고 마음 먹었다고 한다. 스몰 스텝은 그렇게 마음 속에 훅하고 들어온 작은 각오를 실천하는 것이다. 어느 날 문득 글을 쓰고 싶어지는 순간, 어느 날 문득 그림이나 사진을 배우고 싶어지는 순간, 어느 날 문득 작은 모임을 하고 싶어지는 그런 순간을 우리는 종종 만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마음의 소리를 따르지 않는다. 피곤하고 귀찮다는 이유로 곧바로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가곤 한다. 그러나 아주 소수의 사람들은 그것을 실천한다. 꾸준히 반복한다. 그리고 깨닫게 된다. 이런 작은 실천으로 자신의 삶이 바뀔 수 있음을 경험한다. 나는 이것을 일상의 작은 기적, '스몰 미라클'이라 부르기로 했다.
어느 순간 나는 도전을 즐기게 됐다. 머릿 속에 떠오른 생각들을 실천하는데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지난 5년 동안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일들에 자주 도전해왔다. 브랜드 관련 회사에서 일했지만 내가 한 건 글쓰기가 전부였다. 하지만 독립한 이후로 네이밍을 하고, 카피를 쓰고, 스토리를 만들고, 다양한 마케팅에 도전했다. IR자료를 만들고, 보도자료를 쓰고, 사이트를 만들고, 글을 쓰고 책을 만들었다. 그렇게 크고 작은 100여 개의 일들에 도전하면서 깨달았다. 회사에서 주어진 일만 할 때는 경험할 수 없었던 엄청난 보람과 만족과 성취감을 느꼈다. 그런데 중요한 건 그 중 절반 이상의 실패의 기록이라는 것이다. 실력의 부족으로, 시간의 부족으로, 신뢰의 부족으로 불면의 밤을 새운 것도 여러 번이었다. 하지만 이전처럼 아주 주저앉는 일은 없었다. 내 작은 일상의 스몰 스텝이 나를 무너지지 않게 도와주었다. 성공의 기쁨도 영원하지 않듯 실패로 인한 좌절감도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엇보다 내 주위엔 어느새 나의 존재를 인정하고 믿어주는 사람들이 하나 둘 소리없이 늘어나고 있었다.
어제 끝낸 워크샵의 이름이 '스몰 미라클 코칭'이었다. 오랜 경험의 전문 코치와 함께 만든 프로그램이었다. 4시간의 짧지 않은 워크샵 프로그램을 통해 나는 다시 한 번 내 삶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내가 그동안 실천해온 작은 발걸음들이 작금의 기적으로 이어져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건 부와 명예와는 또 다른 의미의 기적이었다. 무엇보다 내 삶이 지니는 의미와 가치를 깨닫게 됐다. 그 삶의 방식을 책쓰기와 강연, 컨설팅으로 나누고 있다. 나와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그리고 그 삶을 다른 누군가가 동경하고 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됐다. 이건 10년 전, 아니 5년 전의 나를 돌아보면 그야말로 '기적'과도 같은 변화다. 2018년 내가 '스몰 스텝'이라는 책을 쓰지 않았다면 결코 찾아오지 않았을 '스몰 미라클'이었다.
나는 이제 작은 기적의 삶을 살기로 했다. 이 스몰 미라클의 힘을 주변 사람들에게 더 많이 전파하기로 했다. 나로 인해 더 많은 기적들이 일어나길 기대하게 됐다. 나로 인해 더 많은 사람들이 '자기다운 삶'을 살아가길 응원하고 돕기로 결심했다. 내가 경험한 우울과 번아웃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짓밟고 있는지 나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멀쩡해 보이는 사람들의 일상이 얼마나 처참하게 무너져 있는지도 너무나 잘 알게 됐다. 그리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작은 실천의 힘이라는 사실, 그 실천이 종국엔 그들 삶의 기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확신을 전파하고 싶어졌다. 코칭의 기본은 그 사람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다. 사람은 누구나 온전하다는 사실, 그 온전함이 완벽함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게 됐다. 그러니 그 가능성의 힘으로 저마다의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돕는다는 것은 얼마나 필요하고 또 위대한 일인가. 그래서 나는 더더욱 나의 일상을 '기적'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 기적은 결코 대단한 것이 아니다. 기분 좋게 잠자리에 들고, 타인과 교감을 나누고, 때로는 이렇게 새벽에 일어나 확신에 찬 삶을 선언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어쩌면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작은 기적이 아닐까. 나는 오늘도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노인이 꾸었던 사자의 꿈을 꾸고 싶다. 고된 삶에서 전부를 잃은 것 같지만, 그래도 삶의 순간순간에 최선을 다했던 그 노인이 꾸었던 사자의 꿈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