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관람 후기나 리뷰들을 보니 나만 지루했나 싶어 더빙판 보고 왔습니다. 이번엔 한때 성우 지망생이었던 딸과 함께 다녀왔어요. 결과적으로 이번에도 중간 중간 살짝 졸다 왔습니다. 그대신 더빙판이라 몰입하긴 쉬웠습니다. 두번 보니 내용 이외의 디테일도 많이 보이더군요. 농구화가 미끌어지는 장면, 바닷가 파도, 땀방울이 떨어지는 장면까지... 그 섬세한 표현에 다시 한 번 놀라고 왔습니다. 일본 특유의 장인 정신이 애니메이션을 만나 그 정점까지 다다른 느낌을 받았습니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태섭의 스토리는 너무 예측 가능한데다 공감이 조금 어려웠습니다. 분명 농구와 인생의 선배인 형의 빈 자리가 크긴 했을 거에요. 엄마의 상실감은 말할 것도 없죠. 하지만 형이 낚시하러 가는 장면만 마주해도 어떤 스토리가 펼쳐질지 너무 빤히 보이는 연출이 조금 아쉽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산왕전 중간 중간 끝없이 이어져요. 경기에 몰입할 즈음 특유의 전주가 들리면서 흐름이 끊깁니다. 처음도 그렇고 두 번째는 더 그랬어요.
3. 솔직히 제게 슬램덩크는 인생 만화는 아니었습니다. 저는 오히려 'H2' 쪽이에요. 야구를 빙자한 사랑과 우정의 이야기에요. 10대의 푸릇푸릇한 성장 스토리가 작가 특유의 시크한 유머와 맞물려 두 번 세 번을 읽어도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오죽하면 우리나라 가수가 노래를 만들었을까요. 만일 H2가 극장판으로 나왔다면 저의 감흥이 조금은 달랐을 겁니다. 그래서 3,40대가 열광하는 이유도, 눈물을 흘렸다는 얘기도, 가슴이 뛰었다는 얘기도 충분히 이해는 갑니다.
4. 하지만 하나 아쉬운 건 작가가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는 겁니다. 익히 알려진대로 작가는 10년 째 펜을 놓고 있습니다. 물론 그간의 작품과 파생된 굿즈 같은 비즈니스로도 돈 걱정은 없을 겁니다. 그런데 왜 그는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대신 추억을 소환하는데 열중하고 있는 것일까요. 나무라는건 아니고 아쉽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겁니다.
5. 추억은 앞으로 이야기가 앞으로 나아갈 때 더 빛이 난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은 많은 부분에서 과거에 매여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10년 불황이 20년 째로 이어지고 있죠. 그들이 잘했던 영역의 대부분을 한국, 중국, 대만과 같은 후발 주자들이 따라잡거나 압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 사람들은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하는 것 같아요. 사실 일본 애니메이션의 정점에 달하는 작품들은 8,90년대에 이미 꽃을 피운바 있습니다. 저는 '아키라'를 극장에서 본 감독와 충격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거든요.
6. 나라에 대한 감정을 쏙 빼고 이야기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새 우리나라는 만화가 아닌 웹툰이라는 장르를 새롭게 개척해 놀라운 결과들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만화와 웹툰을 같다고 여기시는 분은 정말 잘못 알고 계신 겁니다. 작품을 소비하는 방식의 차이가 창작의 차이로까지 이어지고 있거든요. 농구와 축구처럼 그 룰과 전개 방식이 달라요. 그러나 일본의 많은 작품들은 과거의 명성에 아직도 기대고 있는 느낌이에요. 제가 잘못 알고 있다면 꼭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7. 일본은, 그리고 그들이 만든 애니메이션은 대단하다는 말로는 부족합니다. 그 성취와 명성은 한 시대를 풍미한 것도 맞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30년 전 작품을 꺼내어 CG를 입히는 쪽과 조금 성글더라도 새로운 도전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쪽, 저는 이 둘 중에 꼽으라면 후자를 선택하고 싶어요. 그건 슬램덩크도, 베가본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그들다운, 그리고 우리는 우리다운 이야기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침 일본 넷플릭스 순위에 '더 글로리'가 '아리스 인 더 보더랜드' 시즌 2를 이기고 1위에 올라섰군요. 아마도 일부 일본 사람들은 혼란스러울 것 같네요. 그들의 기대다 어마어마한 작품이었으니까요.
8. 함께 영화를 본 딸은 서태웅 역을 맡은 신용우 성우를 좋아합니다. 유명한 성우들의 이름도 줄줄이 꾀고 있죠. 그런데 이번 극장판은 서태웅의 역할이 너무 미미합니다. 그 츤데레한 매력이 10분의 1도 보이지 않아 아쉬워요. 그래도 서태웅의 이야기는 옛날 만화나 TV판을 보아도 충분할 겁니다. 이노우에 다케히코가 더 늦기 전에 새로운 작품을 그려줬으면 좋겠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두 번의 은퇴를 번복하고 새로운 작품을 만들고 있는 것처럼요. 이 놀라운 작가의 작품을 새로운 세대와 함께 향유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p.s. 작품은 칭찬해도 슬램덩크에 욱일기가 여러 번 등장했다는 사실은 모두 꼭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