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바시 촬영이 있던 날이었다. 나는 서너 번의 퇴짜를 맞은 후에야 겨우 하나의 원고를 완성할 수 있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방송국에 갔다. 생전 처음 메이크업도 받았다. 내 손에는 아주 큰 글씨로 쓰여진 큐시트가 여러 장 쥐어졌다. 여차 하면 컨닝을 할 수 있는 원고 묶음이었다. 물론 생방송이 아니라 녹화이긴 했다. 그러나 나는 그날 그 컨닝 페이퍼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아니 보아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강렬한 조명과 스탭들의 따가운 시선, 간간히 들리는 낮고 묵직한 세바시 대표의 목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큰 실수는 없었으나 당황한 나머지 이야기의 순서가 뒤죽박죽이 되어 버렸다.
이윽고 금요일 저녁 6시, 세바시에서 촬영한 영상이 유튜브에 떴다. 나는 숨을 죽이고 영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15분이 흘러갔다. 생각보다 잘한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러나 뭔가 이상했다. 분명 내가 말했는데 내가 말한 것 같지 않은 짜임새가 있었다. 사건의 전개에 임팩트가 있었고 여운도 컸다. 내 입으로 할 말은 아니지만 아주 괜찮은 영상이라는 생각이 들자 안도감이 찾아왔다. 영상은 다행히 60만을 넘기며 선전했다. 무명의 작가가 이룬 성과 치고는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그런데 나는 이 영상의 비밀을 한참 후에야 알 수 있었다. 바로 편집의 힘이었다.
원고의 내용은 그대로였으나 순서가 바뀌어 있었다. 가장 힘들었던 순간을 고백한 영상이 맨 앞에 가 있었다. 다소 여유를 찾은 중반부의 모습은 가장 뒤로 가 있었다. 필요 없는 부분은 말끔히 잘려 있었다. 그때서야 편집의 위대함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글쓰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글은 일단 양을 만들어야 한다. 그 다음 작업이 바로 편집이다. 편집이란 글을 다듬는 과정만을 말하지 않는다. 구체적인 사건과 그로 인한 교훈, 그리고 그 교훈을 적용한 성과 순으로 기술할 때 사람들은 가장 쉽게 내용을 받아들인다. 세바시의 편집도 다름아닌 그 순서를 따르고 있었다.
앞서 소개한 롱블랙의 글쓰기 공식이 효과적인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사건만 기록하면 신문 기사가 된다. 감상만 적으면 일기가 된다. 성과와 변화만 기록하면 보고서처럼 읽힐 것이다. 좋은 글은 좋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수십 년 전 결혼 사진을 찍으며 배운 바가 있다. 가장 자연스러운 사진 장면은 피사체가 가장 불편할 때 나온다는 교훈이었다. 글도 마찬가지다. 처음부터 일필휘지로 마음에 드는 글을 쓰는 사람은 소수다. 앞서 소개한 최소한의 공식과 구성을 따르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이런 걸 의식하지 않고 쓰는 사람은 그 공식이 '훈련'된 사람이다. 그러니 한 번에 글이 쓰여지기를 바라는 욕심을 버리자. What, Why, So What의 순서대로 짧은 글이라도 써보자. 분명 당신의 글이 달라질 것이다.
* 세바시나 TED 중 마음에 드는 주제를 찾아 정주행 해보자. 어떤 구성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지 꼼꼼히 기록해 보자.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하는지, 어떻게 이야기를 마무리하는지 연구해보자. 그 순서대로 나만의 짧은 글을 다시 한 번 써보자.
https://www.youtube.com/watch?v=rXD_p5tk21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