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하나가 외국계 기업에서 시설 관리 일을 하고 있다. 문제는 맡은 일을 너무나 잘한다는 것. 그러나 그가 해마다 이뤄내는 성과는 고스란히 '정규직' 직원에게 돌아간다. 그는 하청받은 인력회사에 고용되어 있으므로 그 어떤 추가 혜택도 받지 못한다. 이번에도 전력 사용량을 절반 이상 줄이는 성과를 냈는데 회사 매니저만 월급이 올라서 뻘쭘해했다 한다. 그런데 단톡방에 이 친구의 글이 올라오자 1조 매출의 회사에서 상무로 일하는 친구가 한 마디 한다.
"사회는 냉정한거다. 필요하면 돈 더 주고, 필요 없으면 내 보내는 곳이 회사지."
맞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와 나의 아주 큰 생각의 차이가 있다. 이 친구는 사회와 회사가 만들어놓은 구조와 조건 안에서 고민한다는 것이고, 나와 용역 회사에 다니는 친구는 그조차도 부당하면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비슷한 환경에서 같은 교회를 다녀도 이렇게나 생각이 다르다. 그는 지금 정부의 출범식 장면을 자랑스럽게 단톡방에 공유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 하다.
영화 '오펜하이머'를 보았다. 이 영화는 주인공이 원자폭탄을 만들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프로젝트 성공 후 겪는 고초?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감독은 '오펜하이머가 공산당원이 아니다'라는 말을 하고 싶어 이 영화를 찍지는 않았으리라. 나는 그가 인간의 끝없는 '욕망'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오펜하이머는 당대의 뛰어난 과학자들에 명성은 떨어지는 사람이었다. 그 열등의식과 불안이 그를 '맨해튼 프로젝트'의 성공을 갈망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뒤에 이어진 성공은 자신에게 또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성공 그 너머에 있는 내면의 도덕심과 책임의식이 그 자신을 청문회의 고통으로 스스로를 몰아넣은 것이다.
나는 그가 친구와 적을 갈라 놓았던 청문회에서 싸우지 않은 이유를 알 것만 같다. 그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이 싸움에 뛰어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어쩌면 일부러 매를, 비난을, 배신을 청한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으로 인해 죽어간 피해자들에 대한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덜고 싶은 마음이 적지 않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조차도 오만 아닌가. 트루먼 대통령의 말대로 그는 그저 정부의 요구대로 엄청난 폭탄을 만들어낸 인물일 뿐이다. 그 폭탄을 사용할 권리나 책임은 그에게 없었다. 정작 더 큰 죄책감과 책임을 느껴야할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징징대는 것들은 다시 들이지 마라."
한 개인의 욕망은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시대가 요구하는 욕망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는 전쟁을 일으키고, 누군가는 그 전쟁을 막기 위해 다시 총칼을 든다. 누군가는 대단한 업적을 만들고 싶어하고, 누군가는 그 업적 때문에 시기와 질투심을 느끼며, 더 대단한 성과를 만들어내기 위해 비난하고 싸우고 모략하고 경쟁한다. 그러나 어쩌란 말인가. 우리는 그렇게 제어할 수 없는 욕망에 날마다 시달리는 한낱 우주의 먼지 같은 존재인 것을.
사실 세상은 거대한 담론으로 바뀌기보단 권력자들의 소소한 욕심으로 수많은 비극을 만들어왔던 게 사실이지 않은가. 나와 회사 상무인 친구는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많이 다르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친구로 지내며 그 다름을 인정하려 애쓴다. 그러나 정작 역사를 움직이는 이들은 한없이 편견어린 시선으로, 옹졸한 이유로, 상식과 공정을 벗어난 선택으로 나를 혼란스럽게 한다. 평범한 한 시민으로서 가지는 이 가벼운 절망이, 시대의 책임을 진 누군가의 양심으로 전이되기를 바라는 건 그저 욕심에 머물러야 하는 것일까. 영화보다 묵직한 현실의 세계로 돌아오는데는 고작 3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