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영화 '오펜하이머'를 보고 나서며...

친구 하나가 외국계 기업에서 시설 관리 일을 하고 있다. 문제는 맡은 일을 너무나 잘한다는 것. 그러나 그가 해마다 이뤄내는 성과는 고스란히 '정규직' 직원에게 돌아간다. 그는 하청받은 인력회사에 고용되어 있으므로 그 어떤 추가 혜택도 받지 못한다. 이번에도 전력 사용량을 절반 이상 줄이는 성과를 냈는데 회사 매니저만 월급이 올라서 뻘쭘해했다 한다. 그런데 단톡방에 이 친구의 글이 올라오자 1조 매출의 회사에서 상무로 일하는 친구가 한 마디 한다.


"사회는 냉정한거다. 필요하면 돈 더 주고, 필요 없으면 내 보내는 곳이 회사지."


맞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와 나의 아주 큰 생각의 차이가 있다. 이 친구는 사회와 회사가 만들어놓은 구조와 조건 안에서 고민한다는 것이고, 나와 용역 회사에 다니는 친구는 그조차도 부당하면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비슷한 환경에서 같은 교회를 다녀도 이렇게나 생각이 다르다. 그는 지금 정부의 출범식 장면을 자랑스럽게 단톡방에 공유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 하다.


영화 '오펜하이머'를 보았다. 이 영화는 주인공이 원자폭탄을 만들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프로젝트 성공 후 겪는 고초?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감독은 '오펜하이머가 공산당원이 아니다'라는 말을 하고 싶어 이 영화를 찍지는 않았으리라. 나는 그가 인간의 끝없는 '욕망'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오펜하이머는 당대의 뛰어난 과학자들에 명성은 떨어지는 사람이었다. 그 열등의식과 불안이 그를 '맨해튼 프로젝트'의 성공을 갈망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뒤에 이어진 성공은 자신에게 또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성공 그 너머에 있는 내면의 도덕심과 책임의식이 그 자신을 청문회의 고통으로 스스로를 몰아넣은 것이다.


나는 그가 친구와 적을 갈라 놓았던 청문회에서 싸우지 않은 이유를 알 것만 같다. 그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이 싸움에 뛰어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어쩌면 일부러 매를, 비난을, 배신을 청한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으로 인해 죽어간 피해자들에 대한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덜고 싶은 마음이 적지 않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조차도 오만 아닌가. 트루먼 대통령의 말대로 그는 그저 정부의 요구대로 엄청난 폭탄을 만들어낸 인물일 뿐이다. 그 폭탄을 사용할 권리나 책임은 그에게 없었다. 정작 더 큰 죄책감과 책임을 느껴야할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징징대는 것들은 다시 들이지 마라."


한 개인의 욕망은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시대가 요구하는 욕망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는 전쟁을 일으키고, 누군가는 그 전쟁을 막기 위해 다시 총칼을 든다. 누군가는 대단한 업적을 만들고 싶어하고, 누군가는 그 업적 때문에 시기와 질투심을 느끼며, 더 대단한 성과를 만들어내기 위해 비난하고 싸우고 모략하고 경쟁한다. 그러나 어쩌란 말인가. 우리는 그렇게 제어할 수 없는 욕망에 날마다 시달리는 한낱 우주의 먼지 같은 존재인 것을.


사실 세상은 거대한 담론으로 바뀌기보단 권력자들의 소소한 욕심으로 수많은 비극을 만들어왔던 게 사실이지 않은가. 나와 회사 상무인 친구는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많이 다르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친구로 지내며 그 다름을 인정하려 애쓴다. 그러나 정작 역사를 움직이는 이들은 한없이 편견어린 시선으로, 옹졸한 이유로, 상식과 공정을 벗어난 선택으로 나를 혼란스럽게 한다. 평범한 한 시민으로서 가지는 이 가벼운 절망이, 시대의 책임을 진 누군가의 양심으로 전이되기를 바라는 건 그저 욕심에 머물러야 하는 것일까. 영화보다 묵직한 현실의 세계로 돌아오는데는 고작 3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