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머니가 97세로 세상을 떠나셨다. 어린 시절부터 할머니셨던 분이 내 나이 오십을 넘겨서도 할머니로 남아계신게 참 묘하다, 싶던 차의 장례식이었다. 문제는 이런 장례식을 전후해서 꼭 한 번은 집안의 빌런 아닌 빌런들을 만난다는 것인데... 생긴 것 답지 않게 다혈질인 나는 집안 행사가 있을 때마다 무례한 사람들로 인해 분노할 때가 종종 있다. 장인어른은 나보고 '착하다' 하셨지만 그건 나를 정말 잘 모르고 하시는 말씀이다.
오늘 돌아가신 외할머니처럼 장인 어른도 요양원에 오래 계셨다. 코로나가 겹쳐 요양원 방문도 엄격히 제한되었었기에 많이 찾아뵙지도 못했다. 그런데 간만에 날 잡고 방문한 자리에서 결혼식 이후로 처음 보는 와이프의 외삼촌이란 분이 만나자마자 대뜸 '그렇게 살면 안돼'라는 일장설로 나를 꾸짖기 시작하셨다. 하고 싶은 말은 장인어른을 잘 모시지 못했다는 것인데, 내가 알기로 본인은 조카들의 이름도 모르는 분이시다. 정작 그분도 장인어른을 그날 처음 찾아뵌 걸로 아는데... 아무튼 나는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와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그 사람을 다시 볼 일은 없을 듯 하다.
오늘은 내가 장례식장을 나온 후에 일어났다. 와이프가 어머니를 다시 집으로 모시기 위해 장례식장을 찾은 모양인데, 서로 얼굴도 모르는 이모부가 와이프를 불러 세워 큰 절을 하라고 했다고 한다. 내가 학생이거나 막 결혼한 신혼 부부라면 모를까, 지난 20년 간 이모 외에는 거의 왕래가 없던 분이 이러니 주변 사람들이 모두 뜯어말렸다고 한다. 하지만 그 자리에 없던 나는 그 얘기를 전해 듣고 매우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모부라면 당연히 외조카 며느리에게 장례식장에서 큰 절을 받을 그만한 지위나 위치에 있는 것인가.
예전에는 사돈 조카에 팔촌까지 모두 한 마을에 모여 살았다. 서로를 대하는 예의가 중요했고 그에 상응하는 크고 작은 도움을 주고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시대가 변해도 많이 변했다. 일가 친척이라고 하지만 형제들끼리도 명절에 한두 번 볼까 말까다. 그런데도 여전히 대접받고 싶은 빌런들이 판을 친다. 결혼식 때 한 번 보고 만 사람인데, 그 이후 왕래도 없던 사람인데, 그래서 서로간의 친밀함은 커녕 주고 받은 마음도 없는 사이인데 촌 수 하나로 함부로 무례하기 대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난다. 나는 이런 친인척의 보이지 않는 무언의 폭력이 참 싫다.
개인적으로 나는 근거 없는 권위를 싫어하고, 그래서 직장 생활도 힘들어했다. 인턴들에게조차 한 번도 반말을 해본 적이 없지만, 그렇다고 좋은 리더가 되어 본 적도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어쩌면 지금처럼 혼자 자유롭게 일하는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친인척 간의 살뜰한 관계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보기만 해도 눈물나게 고맙고 친절한 분들이 참 많다. 그러나 아직도 세상 변한 줄 모르고 촌수 따지며 나이 불문하고 무례하게 대하는 인간들에게는 그 어떤 정도 주고 싶지 않다. 집안 어른이라는 이유로 대접받는 시대는 지났다. 어른 대접 받고 싶으면 어른 답게 살자. 나는 절대로 그렇게 나이 들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