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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가능한 '넘버링'의 비밀

스몰 스텝 스케치 #09.

내가 즐겨 쓰는 에버노트에는

스몰스텝을 위한 별도의 카테고리가 있다.

다큐, 명언, 카피, 뮤직,

브랜드,  시, 여행, 필사,

책과 TED, 강연에 관한 항목까지...

그리고 세부 카테고리의 모든 글들에는 각각 번호가 붙는다.

예를 들어 '다큐 다이어리'의 마지막 글은 '#73'이라는 숫자가 붙는데

이것은 짬짬히 보아온 다큐멘터리의 숫자를 의미한다.

그렇게 '138개'의 칼럼을 옮겨적었고,

'102곡'의 좋아하는 노래를 찾았으며,

'385권'의 읽고 싶은 책을 수집했다.

직접 챙겨 본 TED나 강연의 목록도 '70개'를 바라본다.


에버노트에 기록한 '필사 다이어리'


숫자란 신기하다.

하루 5분, 길어야 10에 불과한 습관들은

그 하나로 존재할 때는 참으로 보잘 것 없고 하찮은  법인데,

그저 작은 습관의 반복에 불과할 따름인데,

하나씩 숫자가 쌓이면서 묘한 자극을 준다.

'138번 째'의 칼럼을 옮겨 쓰고 나면

'139번 째'의 칼럼을 옮겨 쓰고 싶은 욕구가 솟아난다.

숫자는 그렇게 숨은 '본능'을 건드린다.

자칫 무의미해 보이는 스몰 스텝의 과정에 의미를 부여한다.

마치 아주 작은 눈뭉치 하나가

산비탈을 따라 구르며 엄청난 눈덩이로 불어나는 것을 지켜보듯이.

그러고보니 알겠다.

왜 사랑하는 연인들이 100일, 200일, 300일,

그리고 천 일을 기념하는지.

그것은 그 연약한 관계의 시작을 지키고 키우고 싶은 열망이라는 것을.

그것이 우리 모두에게 숨겨진 본능이란 것을.


스몰 스텝의 방점은 '작다'는데 있다.

그것이 일상에 부담으로 다가서는 순간 그 의미를 잃는다.

그래서 누군가는 매일 아침 침구를 정리하는 습관으로 하루를 시작하지만

그 시간이 절대로 3분을 넘기지 않는다고 들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일상에 방해를 일으킬만한 스몰 스텝은 과감히 리스트에서 제외한다.

그것이 아무리 유익하다 해도

지속해갈 수 없을만큼 부담이 된다면

그건 이 스몰 스텝을 시작한 이유에 반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에겐 그림 그리기가 그랬다.

적지 않은 이들이 매일 한 장씩 그림을 그린다는 얘기를 듣고

나도 매일 한 장씩 그림을 그린 적이 있었다.

주변의 아주 작은 물건들을 따라 그리는 것은

분명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

한 대상을 집중해서 관찰하고 그리는 과정을 통해

내가 얼마나 많은 디테일한 순간들을 놓치며 살아가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더 많이, 더 빨리 해결하려는 욕구를 조심스레 눌러가며

느리게 살아가는 삶의 지혜를 가르쳐주었다.

하지만 그 30분의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았다.

좀 더 잘 그리고 싶은 욕심이

어느 순간 '부담'이 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그 시간을 스몰 스텝에서 제외했었다.

'지속가능한 스몰 스텝'이 아니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매일의 스몰 스텝에 번호를 매기는 것,

즉 '넘버링'은 무언가를 지속하는 힘을 내게 주었다.

오늘도 해냈구나라는 작은 성취의 기쁨을

하나씩 늘어가는 숫자로 보상받고 확인하는 과정인 셈이다.


왜 우리는 해마다 돌아오는 생일을 기념하는 것일까?

왜 한 해의 마지막 날의 시간을 카운트다운하며

새롭게 밝아오는 새로운 숫자를 기념하려고 하는 것일까?

자라는 아이들의 키를 달마다 꼼꼼히 벽에 기록하고

10주년, 20주년의 결혼식을 기념하고 싶어하는 것일까?

켜켜이 쌓인 나무의 나이테를 보고,

그 나무에 쌓인 세월의 의미를 읽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감추어진 본능이다.

그리고 그 본능에 좀 더 충실할 줄 아는 사람이

좀 더 의미있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무심코 지나가는 일상을 하나씩 쌓아갈줄 아는 사람이

그 하루의 소중함을 좀 더 깨닫고 누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오늘도 이동진씨가 쓴 영화 칼럼 하나를 옮겨 적고

'#189'라는 숫자를 제목 앞에 붙여 기록해 두었다.

손석희, 문유석, 권석천, 허지웅, 서민...

그렇게 내가 좋아하는 글쓰기의 장인들을 따라

189개의 주옥같은 칼럼과 글들을 옮겨 적어왔다.

이 숫자가 늘어나는만큼 내 글솜씨가 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아마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 숫자가 주는 뿌듯함은 그 결과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하루 10분, 이 짧은 필사의 시간들이 켜켜이 쌓여

내 생각과 경험이 지평을 넓혀줄 것이란 기대가

이 숫자와 함께 자라고 있음을 보기 때문이다.


이것이 스몰 스텝을 지속가능케 하는

나만의 아주 작은 의식, '넘버링'의 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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