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발효의 미학이 빚어낸 전통의 현대적 전복, 복순도가

전통은 종종 박제된 유산으로 남는다. 낡은 도포를 입고 제삿날에나 올리는 술, 혹은 비 오는 날 파전에 곁들이는 서민적인 음료라는 틀에 갇혀 있을 때 막걸리는 현대적인 라이프스타일과 거리가 먼 존재였다. 하지만 울산 울주의 작은 마을에서 시작된 '복순도가(Boksoon_Doga)'는 이 완고한 고정관념을 보란 듯이 깨뜨렸다.


이들은 막걸리를 '전통주의 계승'이라는 무거운 가치에 가두지 않고, 샴페인처럼 경쾌하고 예술적인 '발효 문화'로 재정의했다. 스몰 브랜드가 어떻게 로컬의 원형을 유지하면서도 가장 세련된 글로벌 감각을 획득할 수 있는지, 복순도가의 행보는 브랜드의 급(級)을 만드는 본질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묻는다.


관점의 전복: "막걸리는 샴페인이다"


복순도가의 브랜딩에서 가장 결정적인 한 수는 막걸리를 '손막걸리'이자 '샴페인 막걸리'로 포지셔닝한 것이다. 기존 막걸리 시장이 저렴한 가격과 양에 집중할 때, 이들은 천연 탄산이 주는 청량감에 주목했다. 발효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강한 탄산 덕분에 뚜껑을 열 때 소용돌이치며 올라오는 기포는 그 자체로 화려한 퍼포먼스가 되었다.


스몰 브랜드에게 필요한 것은 대중과의 타협이 아니라 '새로운 장르의 창조'다. 복순도가는 막걸리를 맥주나 소주와 경쟁시키지 않았다. 대신 축하와 환대의 자리에 어울리는 샴페인의 대항마로 세웠다. "막걸리도 우아하게 즐길 수 있다"는 메시지는 젊은 세대와 와인 애호가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제품의 본질은 지키되 사용되는 '맥락'을 바꿈으로써, 복순도가는 1만 원대 중반이라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가격 저항선을 단숨에 무너뜨렸다.


시각 언어의 혁신: 곡선의 병과 건축적 미학


복순도가를 각인시킨 또 다른 일등 공신은 유려한 곡선을 가진 '병 디자인'이다. 투박한 플라스틱병이 주류를 이루던 시장에서 길게 뻗은 목과 세련된 라벨을 가진 복순도가의 외형은 그 자체로 프리미엄의 상징이 되었다. 이는 단순히 예쁜 용기를 넘어, 강한 천연 탄산을 견뎌내면서도 시각적 만족감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능적 브랜딩의 결과물이었다.


이러한 미학적 접근은 울산에 위치한 '양조장 건축'으로 이어진다. 건축을 전공한 아들이 설계한 양조장은 볏짚과 숯을 활용한 전통적 소재와 현대적인 건축미가 결합된 하나의 예술 작품이다. 스몰 브랜드에게 공간은 철학의 실체다. 논밭 한가운데 자리 잡은 검은 빛의 양조장은 방문객들에게 "이 술은 단순히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어지는 것"이라는 장엄한 서사를 전달한다. 제품과 패키지, 그리고 공간이 하나의 일관된 시각 언어로 연결될 때 브랜드의 세계관은 비로소 단단해진다.


발효라는 기다림: 수제(Handmade)의 진정성


브랜딩이 화려한 껍데기라면, 그 속을 채우는 것은 결국 '맛'과 '정성'이라는 실력이다. 복순도가는 대량 생산의 유혹을 뿌리치고 전통 방식의 누룩을 고집한다. 할머니(박복순 여사)의 성함을 브랜드 이름으로 삼은 것부터가 가족의 명예를 건 정직한 생산을 약속하는 행위다.


손으로 빚어 자연 발효를 기다리는 시간, 그 느림의 미학은 빠름과 효율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강력한 차별화 요소가 된다. 복순도가는 이 기다림의 과정을 마케팅의 핵심 콘텐츠로 활용했다. 온도와 습도에 민감한 생막걸리의 특성을 숨기지 않고, 오히려 "매번 맛이 조금씩 다를 수 있는 살아있는 술"임을 강조하며 소비자들을 발효의 신비로운 과정에 동참시켰다. 진정성이란 완벽함을 꾸미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과정의 수고로움을 투명하게 공유하는 데서 나온다.


확장과 연결: 한식 너머의 테이블로


복순도가는 막걸리의 영토를 확장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이들은 전통적인 안주인 파전이나 도토리묵에 머물지 않고 스테이크, 치즈, 디저트와의 페어링을 제안한다. 글로벌 전시나 명품 브랜드의 런칭 파티에 웰컴 드링크로 등장하며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라는 격언을 몸소 증명해 보였다.


이러한 확장은 스몰 브랜드가 지녀야 할 '유연한 태도'를 보여준다. 뿌리는 견고하게 로컬에 두되, 소통의 방식은 국경과 장르를 초월하는 것이다. 화장품 라인(발효 에센스)을 런칭하거나 지역 예술가들과 협업하는 행보 또한 '발효'라는 브랜드의 핵심 키워드를 다각도로 해석하려는 시도다. 하나의 카테고리에 안주하지 않고 가치를 확장할 때, 브랜드는 수명을 연장하고 시대의 흐름과 호흡하게 된다.


시간이 빚은 가장 힙한 유산


복순도가의 성공은 우리에게 브랜딩의 본질에 대해 묻는다. 오래된 것이 낡은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발견의 대상인가? 복순도가는 가장 오래된 방식의 발효를 가장 힙한 방식의 문화로 탈바꿈시켰다. 이들은 뚜껑을 여는 순간 터져 나오는 탄산처럼, 정체되어 있던 전통주 시장에 강력한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작은 마을의 양조장에서 시작해 세계의 식탁 위에 오르기까지, 복순도가를 지탱한 힘은 '가장 나다운 것'을 지키려는 뚝심과 그것을 '남들과 다르게' 보여주려는 감각의 조화였다. 뽀얀 술방울 속에 담긴 농부의 땀과 예술가의 안목. 복순도가는 술을 파는 것이 아니라, 잊혔던 우리의 시간을 가장 아름답게 복원해내고 있다.


결국 진정한 승리는 자본의 크기가 아니라, 자신들의 뿌리에 대한 깊은 이해와 그 가치를 현대인의 언어로 번역해내는 진심에서 결정된다는 사실을 복순도가는 톡 쏘는 탄산 소리와 함께 묵묵히 증명하고 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