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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집 '밀도'와 심플 라이프

스몰 스텝 스케치 #11.

이전에 다니던 회사의 입구 건널목에 조그만 빵집 하나가 새롭게 문을 연 적이 있었다. 두세 평이 채 되지 않을 것 같은 빵집의 이름은 '밀도', 흥미로운건 오직 '식빵'만을 만든다는 것. 그다지 빵을 즐기지 않는 나와 달리, 빵집 딸 출신인 와이프를 위해 근무 중 시간을 내어 잠깐 들른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날 빵을 사지 못했다. 오전에 나온 식빵이 다 팔리고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렵게 예약을 하고 빵을 살 수 있었던 건 그로부터 며칠이 더 지나서였다.


그 사이 빵집의 줄은 더욱 길어졌고 심지어 바로 옆 카페를 인수해 확장 공사를 했다. 호기심에 뒷조사를 했다. 빵집 주인은 일본에서 제빵기술을 배운 뒤 '시오코나'라는 빵집을 10년이나 운영한 나름 업계의 유명한 셰프였다. 여러 종류의 빵을 다양하게 만들다보니 각각의 빵에 충실할 수 없었다는 아쉬움 때문에 식빵 전문 빵집을 열게 되었노라 말하고 있었다. 유행을 따르지 않고 오랫동안 만들 수 있는 빵을 찾다보니 자연스럽게 식빵을 선택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일에서 '본질'에 집중하고 싶었고 그 대상이 바로 식빵이었던 셈이다.


빵집 '밀도'


'심플 라이프'가 유행이다. 유사한 컨셉의 브랜드가 호응을 얻고 물건과 시간, 나아가 인맥까지 버리고 정리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미니멀리스트'라고 부른다. 그들의 생각과 노하우를 담은 책들이 서점의 한 켠을 점거한지도 오래되었다. 하지만 그 '심플 라이프'가 그저 비우고 버리고 정리하는, 간소하고 단순한 삶의 방식만을 말하는 것일까? 나는 좀 더 근본적인 이유가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매일의 삶에서 반복하는 스물 네 개의 스몰스텝이 준 교훈 때문이다. 단순한 습관 만들기 이상의 경험이 심플라이프의 본질과 닿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야 했다. 그 방법으로 대단하고 거창한 모험과 도전을 택하기 보다는 일상의 삶에서 내게 '힘을 주는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나는 내 삶을 '단순하게' 만들고 싶었다. 책상 주변을 정리하고 나서야 비로소 온전히 일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처럼, 내 삶에서 불필요한 것들은 깔끔하게 정리한 후 내가 정말 원하는 것들에 집중하고 싶었다.


하지만 무언가를 버리고 선택하기 위해서는 나만의 뚜렷한 기준과 이유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매일 산책을 하고, 정해진 분량의 책을 읽고, 곡 만큼이나 멋진 가사의 음악을 듣고, 끌리는 팟캐스트들의 구독 목록을 늘려간 것은 내가 정말로 추구하고자 하는 '삶의 본질'을 찾기 위한 작은 힌트이자 소스 찾기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산책과 독서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좋은 취미이자 습관 중 하나이다. 하지만 산책을 하면서 흩어진 생각을 정리하고, 팟캐스트를 통해 한 번도 접하지 못했던 지식과 지혜를 만나는 과정을 통해 조금씩 내가 원하는 삶을 구체화해갈 수 있었다. 마치 빵집 '밀도'의 전익범 셰프가 그 수많은 빵들 중에서 하필 '식빵'을 선택했는지에 대한 자신만의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것처럼. 그래서 불필요한 모든 다른 제빵의 기술은 물론 10년간 운영하던 유명 빵집의 간판을 포기할 수 있었던 것처럼. 스몰 스텝은 내 삶의 본질을 발견하기 위한 나침반이자 테스트 같은 역할을 해주었던 셈이다.


심플 라이프를 가능케 하는 것은 그 사람은 '철학'이다. 철학이란 한 마디로 그 사람의 사고 방식이자 삶의 방식이며,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선택할 지에 대한 자기만의 기준이다. 그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심플'해질 수 없다. 오래된 가구를 들어내고 '무인양품'의 조명을 설치할 수는 있겠으나 브랜드의 상품이 그 사람의 생각까지 대신해줄 수는 없는 법이다. 방안에 오래된 가구가 빼곡하다 하더라도 그 사람의 삶에 꼭 필요한 것들로 채워져있다면 그것이 어쩌면 '심플 라이프'에 더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원하는 삶의 방식이 분명해지면 그 사람의 일상은 자연스럽게 심플해진다. 타인과의 비교나 경쟁에서 자유롭기 때문이다. 흉내낼 수 없는 여유로움이 주변을 채운다. 아울러 그 삶을 지켜가기 위해 더욱더 열심히 자신의 삶에 몰입한다. 자신의 선명하고 뚜렷한 주관과 가치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해주기 때문이다.


나 역시 15년 간의 직장 생활에 이별을 고하고 반 년 가까이 홀로서기에 도전하고 있는 중이다. 한 번은 어떤 중견 기업으로부터 입사 의뢰가 있었다. 이제껏 받아보지 못했던 연봉과 조건이 내 이름을 걸고 일해보겠다는 결심을 흐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결국 그 회사의 입사를 포기하고 말았다. (그 회사의 선택도 있었겠지만) 이 모양 저모양으로 알아본 그 회사의 문화는 많은 중견기업들이 그렇듯 내가 생각하는 삶의 가치와는 아주 많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그 선택에 매우 만족하고 있다.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나를 끌고 가는 힘이 무엇인지를 발견하면 된다. 하지만 그 질문에 답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이제까지의 우리는 그 누구도 그와 비슷한 질문을 받아보지 못해왔던 탓이다. 그저 남부끄럽지 않은, 남들만큼 살아가는 것이 가장 큰 미덕이라고 배워왔기 때문이다.


그러니 월요일 아침 고된 출근 시간에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지금의 삶이 당신이 선택한 삶인지, 더 나은 삶의 대안은 과연 없는 것인지, 정말로 원하는 삶을 선택하기 위해 오늘 당장 할 수 있는 작은 일들에는 무엇이 있을지. 그 질문에 하나씩 하나씩 답해가는 순간 우리는 내가 주인이 되는 삶의 희열을 보답받을 수 있다. 그 희열이 돈과 명예는 아닐지라도 더 큰 보람과 만족으로 인도할 것이기에.


그리고 그 모습은 '심플'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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