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다운 인터뷰 #2.
얼마 전 회사를 나온 정진호 씨의 명함에는 여러 가지 직함이 쓰여 있다. 아티스트, 인스트럭터, 스페셜리스트... 하지만 명함에 나온 이 단어들로 정진호 씨를 한 번에 가늠하기란 쉽지 않다. 이해를 돕기 위해 짧게 소개하자면 그는 직장생활을 프로그래머로 시작, 대기업 기업문화팀에서 일하며 직원과 회사의 창의적인 일하기를 도왔다. 늘 새로운 것을 만들어 누군가가 더 행복하게 일할 수 있도록 기여하고 싶다는 그는, 코딩을 하던 손으로 마인드맵을 그리고 파워포인트를 만들다 지금은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이러한 그리기 훈련이 만들어낸 '비주얼 씽킹 워크숍’은 퇴사 이후 그가 직접 개설하면서 매진 행렬이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두 번에 걸친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정진호란 사람을 그가 가진 경력이나 기술로만 평가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인터뷰를 정리한 녹취에는 '행운'이라는 단어가 유독 많이 등장한다. 하지만 대학 무렵의 그는 어떻게 보아도 불행의 정점을 달리고 있었다. 과연 무엇이 그의 삶을 불행에서 (스스로 생각할 때) 누구보다도 운 좋은 사람으로 바꿔놓은 것일까? 인생의 전환점에서 그가 내린 결정과 이유를 따라가다 보면 혹 당신도 정답 비슷한 것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코딩에서 드로잉으로, 개발자에서 기업문화 전문가로>
Q. 첫 직장에서는 프로그래머로 일했다고 들었다.
“처음 입사한 회사에서 맡은 업무가 전 직원을 위한 게시판을 만드는 거였다. 인터넷 도입 초기라 난감해하고 있던 참에 선배가 PHP라는 프로그래밍 언어를 알려줬다. 그 소스를 받아 첫 페이지를 띄우는 데 꼬박 사흘이 걸렸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3시간이면 해결될 일이 아닌가. 나 같은 사람이 많겠다는 생각에 스스로 (삽질하며) 깨우친 노하우들을 공유하기 위해 ‘PHP school’ 이란 사이트를 만들었다. 처음엔 하루 30명 찾아오던 이곳이 7년 후에는 2만 명이 됐다."
Q. 어떤 일을 효율적으로 설계하는 데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예를 들어 그다음 직장이었던 야후 코리아에선 개발자로 일하기 위해 3, 4주 정도의 교육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팀마다 교육을 따로 받고 있었다. 몇 년 후 직접 커리큘럼을 짜서 24개의 과목을 만들고 이를 수업해 줄 프로그래머들을 직접 찾아다녔다. 그리고 총 12명의 사내 강사를 뽑아 3주간 4시간씩 교육하게 하는 '부트캠프'라는 프로그램이 만들었다. 원래 교육팀이 할 일이었지만 엔지니어인 내가 직접 과정을 설계하니 훨씬 효과적이었다."
Q. 전문 강사도 아닌 사내 직원들에게 동기부여가 쉽지 않았을 텐데.
"엔지니어 12명을 뽑아서 1년에 4번, 3개월씩 교육을 맡겼는데 회사에서 나오는 돈이 겨우 시간당 이 만원 남짓이었다. 그래서 고민 끝에 그 비용으로 200명의 개발자 중 트레이너만 입을 수 있는 티셔츠와 백팩을 딱 15벌씩 만들었다. 그랬더니 강사들이 정말 좋아하더라. 매일은 물론이고, 심지어 해외 출장을 갈 때조차 입고 갔다. 이 옷을 디자인한 디자이너들까지 자랑스러워할 정도였다."
Q. 앞선 경험들과 뭔가 연결점이 있는 것 같다.
"이 일을 계기로 내게 사람과 사람, 그리고 일들을 연결하는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학벌이 좋거나 가방끈이 길다고 해서 오래 일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30년 정도 더 일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대한민국에서 개발자로 30년을 일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래서 찾은 것이 마인드맵이었다. 새로운 것을 배우고 이를 정리하고 새로운 경험과 연결해가는 과정에서 알 수 없는 즐거움과 쾌감을 맛보았다.
Q. 이때를 기점으로 프로그래머에서 기업 문화 관련 전문가로 방향을 틀었다. 계기가 있었나?
"마인드맵에 관한 교육을 받고 보니 16시간을 들여 배울만한 내용은 아니라는 판단이 섰다. 그래서 직접 정리해보니 3시간 정도면 교육이 가능할 것 같았다. 이 내용을 회사 교육팀에 얘기했더니 무척 좋아해서 결국 1년에 2, 3번 전 직원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과정으로 자리 잡았다. 물론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교육이 거듭되면서 내용도 좋아지고 그 결과들이 슬라이드로 나왔다. 물론 이때도 필요하신 분은 그냥 가져가시라고 원본을 블로그에 올렸다. 그런데 이 내용을 보고 SK컴즈의 기업문화팀에서 연락이 왔다. 가서 보니 다들 해맑고 착하고 분위기가 좋아 보였다. 그 일이 인연이 되어 결국 이곳에 입사하게 됐다."
<보이는 만큼 그릴 수 있다, 창의성의 비밀 >
Q. 그때도 여전히 블로그와 사이트를 운영하고 책을 쓰고 있었나?
"대개의 사람은 무언가를 시작할 때 거창하게 하려는 경향이 있다. 나는 같은 계획이라도 매일 조금씩 했다. 책은 매일 한 페이지씩, 블로그도 정기적으로 글을 올리는 식이다. 우리나라의 회사원들이나 학생들은 세상일을 너무 짧게 본다. 나는 마인드맵만 5년, 수채화는 3년, 블로그는 12년을 했다. PHP 사이트도 7년을 운영하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결국 사업화를 원하는 사람에게 팔았다. 그게 뭐든지 간에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덩어리가 커지다 결국 빙산이 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빙산의 일각만 본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선한 뜻을 가지고 지속하면 그 일을 도와주는 우주의 보이지 않는 선한 힘이 있다고 믿는다."
Q. '운이 좋았다'는 표현이 많다. 원래 긍정적인 사람이었나?
"실제로 운이 좋았다. 가장 힘든 시기에 아내를 만났고, IMF 직후에 어렵사리 좋은 회사에 취직했다. 그곳에서 PHP를 배워 더 많은 사람에게 알려주고 싶어 사이트를 만들었고, 그 내용으로 책을 썼다. 그 사이트는 운영을 원하는 사람에게 그냥 넘기려 했는데 사려는 사람이 나타났고, 책이 나오자 정부 정책으로 뜻하지 않은 베스트 셀러가 됐다. 마인드맵을 배워 회사 내외의 사람들에게 가르치자 좋은 회사에서 경력을 바꿀 수 있었고 지금처럼 원하던 그림도 그리게 됐다. 돌이켜보니 이렇게 운 좋은 사람이 또 있나 싶을 정도다."
Q. 요즘은 '비주얼 씽킹' 전문가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림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
"그림을 제대로 그리고 싶어 홍대 근처 화실을 찾았는데 다들 2절, 4절지에 깨진 병과 썩은 사과만 그리고 있었다. 그림만 봐도 그 사람이 좋아하는 대상이 아니라 시킨 것을 그렸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수없이 오고 간 연필선에선 어떤 고통이 느껴졌다. 실제로 미대생을 만나 인터뷰를 해도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미대 입시의 과정을 보면 하루 4시간 동안 기계적으로 똑같은 그림만 그리는 훈련을 한다. 미대를 가기 위한 목적이 아닌 나는 그런 데서 그림을 배울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Q. 굳이 그림을 시작하는 이유는 뭔가?
"대상을 보는 훈련을 하기 위해서다. 그림을 그리게 되면서 주변의 것들을 찬찬히 바라보는 관찰력이 좋아졌다. 굳이 비유를 들자면 보통의 사람들이 72dpi로 세상을 스캔하는데 나는 600dpi로 스캔하는 셈이다. 같은 가방을 보아도 고리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 바느질 상태가 어떤지, 고리와 가방은 어떻게 연결되어 있고 그 뒤는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지가 보인다. 보지 않고도 그 이면의 무엇이 있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달까? 그렇게 하나에 대한 관찰력이 좋아지면 다른 것에 대한 안목도 생겨난다. 그게 통찰력이 아닐까 싶다."
Q. 대상을 보고 그대로 그리거나, 남의 것을 따라 그리는 것이 창의적이라 할 수 있을까?
"인간의 손은 원래 남의 것을 절대로 똑같이 그릴 수 없다. 설사 다른 사람의 것을 따라 그린다 해도 결국은 나만의 스타일로 재해석할 수 있게 된다. 게다가 베끼는 대상도 자신을 따라 하니 좋아하는 경우가 많고. 일단 따라 하는 연습을 해야 보지 않고도 그릴 수 있게 된다."
Q.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진정한 창작이란 결코 그냥 나오지 않는다. 나 역시 처음 18개월간은 매일 그렸고, 이후 3년간은 매주 그림을 그리고 있다. 무언가를 새로운 방법으로 만들려면 저절로 손이 움직이는 수준에 올라서야 한다. 어제 워크숍 준비를 위해 100개의 봉투에 색연필을 나눠 담는 작업을 했다. 그런데 50개쯤 되니 TV를 보면서도 자동으로 담을 수 있었다. 우리의 좌뇌는 늘 하던 대로 하려는 반면 우뇌는 새로운 방법을 찾는다. 이 두 과정이 동시에 작동하려면 손이 저절로 움직이는 무아지경으로 넘어갈 수 있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무언가가 나온다. 즉 무슨 일을 하건 생각하지 않고도 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를 수 있어야 진정한 의미의 창작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Q. 이런 훈련이 매일 성과와 싸움하는 직장인들과 무슨 상관이 있나?
"꽃을 그대로 그리는 것은 예술이지만 내가 그리는 그림은 소통을 위한 도구인 셈이다. 내 나름대로 변형하고 단순화한다 해도 다른 사람들이 금방 꽃이라고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관찰과 표현을 잘하는 것이 곧 소통을 '잘'하게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생각한 무언가를 상대방이 눈으로 볼 수 있게 되는 것, 그게 비주얼 씽킹이 필요한 이유다."
Q. 비주얼 씽킹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얼마 전부터 '세상을 바꾸는 15분(이하 세바시)'를 듣고 한 장의 그림으로 정리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어떤 이는 내가 정리한 그림을 보고 세바시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졌다고 한다. 15분짜리 강의를 중간쯤 듣고 나서야 별로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억울하지 않은가. 내가 하는 일은 이처럼 사람과 기업들의 시간을 줄여주고 시각적으로 소통하는 과정을 도와주는 일이라 생각한다."
<나도, 주변도 행복해는 정진호답게 사는 법>
Q. 굳이 남들이 가지 않는 이런 길을 걸어가는 이유가 궁금하다.
"우선 컨텐츠를 만드는 과정 자체가 재미있다. 재미와 보람 모두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그린 그림이나 작업물들은 출처를 밝히지 않아도 개의치 않는다. 예를 들어 미래의 어느 날, 우리나라에 어떤 유명한 학자나 연사가 와서 발표한다고 상상해 보자. 그런데 구석에 어떤 할아버지가 와서 그 과정을 그림으로 그리고 있는 거다. 그런 할아버지가 되고 싶다. 그림을 그리는 일은 여전히 어렵지만 30년 정도 계속하면 조금 더 쉬워지지 않을까? 그렇게 살아가면 70대까지도 일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긴다."
Q. 정진호답게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지금 내가 40대 중반인데 죽기 전까지 돈이 되든 안 되든 의미 있는 것들을 계속 만들어 내고 싶다. 며칠 전 '창의적인 사람이 되기 위한 29가지 방법(사진첩 참조)'이라는 그림을 그려서 올렸더니 사람들이 직접 프린트에서 벽에 붙인 사진을 보여주었다. 얼마나 보람되고 기뻤는지 모른다. 내가 생각하는 가치 있는 사람이란 '내가 만든 거다'라고 외치는 사람이 아니라, 그 결과물을 남에게 전해주고 자신은 새로운 다른 것을 만드는 사람이다. 세상에 똑똑한 사람은 많은데 똑똑하면서도 친절한 사람은 정말 적더라. 그런 사람이 많은 곳이 천국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잘하는 것은 다른 사람보다 빨리 배운다는 것이다. 그렇게 배운 무언가로 죽을 때까지 좋은 것을 만들어내고 싶다.”
Q. 대개의 사람은 일의 전문성과 경륜으로 부와 성공을 좇는다. 그런 욕심이 잘 보이지 않는다.
"대학교 3학년 때였던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너무 힘든 싶은 시점까지 갔었다. 그때 아내가 나타났고, 어느 날 집으로 불러서 갔더니 장모님이 결혼하라고 하시더라. 조건이 딱 하나 있었는데 성당에 가는거였다. 혼자 두면 안될 것 같다고 하면서. 그때 두 가지를 느꼈다. 꼭 행복해져야겠다는 것, 그리고 내 주변도 행복하게 만들겠다는 것. 반드시 이 세상에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내가 일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 정진호 개인 블로그 - http://lovesera.tistory.com/
* 정진호 개인 페이스북 - http://goo.gl/0sAjBw
* 페이스북 페이지 - https://www.facebook.com/ArtistJinho
* 정진호 플리커 (더 많은 그림들 보기) - http://goo.gl/by3zP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