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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Roll, 컨트롤(Control)이 필요한 순간

My Littlest Brands #03.

그날은 출판사 편집자와의 약속이 잡힌 날이었다.

제안을 받은 후 약 4개월 만에 계약서에 사인을 하기로 한 것이다.

생애 첫 책의 출간을 위한 날인만큼 약간은 상기된 기분으로 가방을 챙겼다.

언제나처럼 노트북과 관련 액세서리들,

노트 한 권과 책 한 권을 따로 챙겼다.

그런데 집을 나서려던 나는 문득 '사인'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펜이 필요하다는 뜻이잖아.

물론 가방 한쪽에는 늘 쓰던 유니 제트스트림 볼펜이 꽂혀 있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약간의 상상으로도 모양이 좋지 않았다.

그래도 첫 책의 사인인데 아무렇게나 꺼낸 볼펜으로 끄적이다니.

물론 '몽블랑' 따위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무슨 나라를 구하는 '사인'도 아니고.

하지만 그렇다고 가방 한구석에서 꺼낸 삼색 볼펜은 아니지 않나.

그때 생각이 난 것이 '컨트롤'이었다.

'컨트롤(ContRoll)이란 이름의 두루마리 가죽 필통이었다.


IMG_1245.JPG 펜을 좋아하는 누군가에게 선물을 해야 한다면, '컨트롤'은 썩 괜찮은 선택이다.


이 필통 브랜드는 이전 회사의 동료가 대표로 있는 회사에서 만들었다.

개발의 역사는 꽤 길었다.

처음에는 노트로 시작해서 자연스럽게 필통으로 이어졌고,

벌써 7,8년 이상 '유니타스매트릭스'란 이름으로

노트와 문구 브랜드로 성장해가는 중이다.

하지만 내 기억엔 유독 이 필통이 기억에 각인되어 있었는데

그건 이 회사의 대표가 보여준 몇몇 모습 때문이었다.


우선 이 사람은 육군 헌병 출신이었다.

모든 헌병이 그렇듯이 균형잡힌 몸매에 짧은 머리가 잘 어울렸다.

(슬프게도 최근엔 숱이 많이 안보인다...)

이젠 민간인인데도 목소리엔 왠지 '각'이 잡혀 있었고

모든 행동에는 조금 과하다 싶은 절제가 배어 있었다.

하루는 집들이로 찾은 그의 집에서

책의 내용이 아닌 키높이로 각을 잡은 책장을 본 적이 있었다.

아이들 동화책이니 딱히 종류를 따질 이유는 없었지만

뭔가 '그답다'는 생각을 잠깐 한 적이 있었다.


회사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느 날은 팀장 미팅으로 모인 자리에서 옆자리에 다가와 앉더니

무슨 장인처럼 두루말이 필통을 주루룩 자기 앞에 펼쳐 놓았다.

그 필통에는 각양 각색의 펜과 문구들이

역시 나름의 각을 잡은채 진열되어 있었다.

마치 수술을 앞둔 의사 옆에 놓은 수술 기구들처럼.

어쩌면 그는, 자신이 그토록 갖고 싶어하던

자신만의 문구 브랜드를 직접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다른 제품들이 성에 차지 않아서 말이다.


여하튼 그 순간에 '컨트롤'이 떠오른건

적어도 내 생에 하나의 이정표가 될 그 순간을

소중히 다루고 싶다는 남사스런 욕심이

무의식 중에 고개를 빼꼼히 내민 탓인지도 모른다.

어찌되었든 '컨트롤'은 그런 순간이 어울리는 '필통'이었다.

그리고 오늘만큼은 그런 '격'에 욕심을 내고 싶었다.

'컨트롤'을 꺼내 펼친 후 만년필을 꺼낸다.

그리고 그 만년필로 사인을 한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그런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나는 '컨트롤'을 꺼내 만년필을 확인한 후 다시 가방에 넣었다.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되는 기분이었다.


IMG_1242.JPG 디테일한 수납공간과 펜 보호 기능, 말린 상태에서도 하나의 펜은 쉽게 뽑을 수 있다.


사실 '컨트롤'은 실용적이지 않은 필통이다.

내가 하는 작업들은 주로 '맥북'에서 시작해 '맥북'으로 끝난다.

간단한 메모들은 아이폰, 혹은 아이패드로 충분하다.

굳이 노트를 쓸 때면 제트스트림 볼펜이 있다.

펜이 자주 필요하지 않고,

필요해도 볼펜 한 자루면 충분한 내게

여러 개의 펜을 꽂고 다닐 두루마리 필통이

굳이 더 필요하진 않았다.

설사 그렇다 해도

매번 사용할 때마다 두루마리를 펼치고

필요한 펜을 고민하는 과정이 내겐 불필요해 보였다.

그저 아무데나 꽂아두었다 꺼내 쓰는 펜 한 자루로 충분했다.

물론 가방에서 꺼내놓으면

왠지 모르게 전문적인 느낌을 준다는 매력이 있었지만 말이다.


어느 날, 스타벅스에서 밀린 작업을 하던 날이었다.

내 또래로 보이는 아저씨? 한 분이 여직원을 데리고 자리를 잡았다.

목소리만 들어도 '이사급' 이상의 포스로 가득했는데

역시나 들려오는 내용을 보니 인사 담당자쯤 되어 보였다.

바로 앞의 여직원에게도,

크게 들려오는 전화기 건너편의 누군가에게도

숨길 수 없는 권위가 눈에 보이게 넘쳐났다.

사실 그건 딱히 뭐랄 일이 아니다.

문제는 그의 벨소리였다.

그 옛날의 '따르릉' 소리를 그대로 재현한 벨소리가

10분을 참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울려댔다.

그렇게 자주 울리면 진동으로 바꿀 법도 한데,

그는 그렇게 대여섯 번의 통화를 이어갈 동안도

절대로 벨소리를 진동으로 바꾸지 않았다.

마치 여전히 자신의 사무실인 것처럼.


물론 목소리는 더 컸다.

그가 지금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

무슨 일로 골머리를 앍고 있는지를 대충 다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카페는 자유롭게 얘기하라고 있는 곳이다.

하지만 그 모습은 그 '대화'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듯 보였다.

나는 그날 40대 중년, 배 나온 남자의

굵게 울리는 목소리와 따르릉거리는 벨 소리에서

숨길 수 없는 '경박함'을 볼 수 있었다.

진짜 권위란 목소리와 벨소리에서 나오지 않는다.

상대방을 위한 배려와 솔선수범,

자기희생에서 나오는 법이다.

하지만 그날 그 스타벅스의 그 '임원님'에게선

그런 아름답고 품위있는 권위의 모습은 찾아볼 순 없었다.

그냥 욕심 많고 대접받고 싶은 '아재'로 보였을 뿐.

그건 아마도 나 역시 '아재'라서 그런 것은 아닐지.


필통과 아재의 벨소리,

이 둘이 생뚱맞게 연결지어진 건

다름아닌 '격'이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실용을 중시하는 나같은 사람에겐

꼭 필요한 것 이상의 과한 치장과 차림새가

불필요하고 불편하게 여겨질 때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나같은 사람도

때와 장소를 따라 '격'을 갖춰야 하는,

갖추고 싶은 순간을 종종 만난다.

내겐 첫 책의 계약을 위한 사인을 하던 날이 그랬고,

그래서 모두를 위한 카페의 공간을

마치 자신의 사무실처럼 쓰는 그 '아재 임원'을 보면서는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불쑥 들었던 것이다.


스크린샷 2017-06-28 오후 6.40.36.png 가장 최근 나온 '컨트롤 프로'는 예술가, 장인의 손을 연상케 된다.


모두에게 '컨트롤' 필통이 필요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진 않은 것 같다.

많은 펜을 다양하게, 자주 써야 하는 학생들에게는

'컨트롤' 보다는 이마트의 이천원 짜리 모닝글리가 훨씬 더 유용할 것이다.

모든 물건은 어울리는 시간과 장소가 있고

'컨트롤'이 어울리는 곳은

아마도 나같은 현업 비즈니스맨이

한 달에 한두 번은 꼭 만나게 되는

일과 삶에 있어 '격'이 필요한 그 순간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중요한 계약이 이뤄지는 미팅의 순간이 그렇고,

오랜 동안의 집중이 필요한 '몰입'의 순간이 그런 때일 것이다.

앞으로의 삶을 좌우할 이직과 퇴사와 같은 순간에도

어쩌면 그같은 '격'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컨트롤'에서 아끼는 만년필 하나를 꺼내어

자신의 선택이 가져올 미래를 조용히, 그러나 신중하게

노트 위에 옮겨 써 보는 그런 순간 말이다.


'컨트롤(ContRoll)'은

어쩌면 인생에 있어서 '컨트롤(Control)'이 필요한 순간에

그 중요함의 무게 만큼의 '격'이 필요한 순간에 빛나는 필통이다.

뭐 어떤가.

인생의 정말 중요한 순간에는

이런 식의 허세스런 의미를 부여해보는 것도 필요하지 않겠는가.

어쩌면 이 브랜드를 만든 대표에게서 보았던 것은

그렇게 자신의 모든 삶에 '책임'을 지고 싶어했던

그의 사람과 삶을 대하는 자세가 뭍어나와서는 아니었을지.


'컨트롤(ContRoll)'은 내게

바로 그런 브랜드다.


p.s. 그 날 나는 '컨트롤' 속 만년필로 사인을 하지 못했다.

너무 경황이 없어서 편집자가 빌려준 펜으로 사인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다음에 비슷한 순간이 온다면, 그때도 '컨트롤'을 들고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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