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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서른'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날 나는 방 청소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무심코 와이프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 직장 옮기려고"

"뭐하는덴데?"

와이프가 물었다.

"잘 몰라. 그냥 글 쓰는데야."

그리고 간단히 스카웃 제의를 말해주었다.

"전혀 안해본 일인데... 말지?"

그러나 나는 마른 걸레로 방을 훔치며 답하지 않았다.

그때가 막 서른 다섯이 되던 해였다.

그리고 나는 새로운 직장으로 이직을 했다.

고된 인생의 시작이었다.

역시 와이프말을 잘 들어야 하는 것일까?


'월간서른'이라는 모임에서 워크샵을 시작했다.

자기발견을 위한 스몰 스텝을 주제로 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나의 서른을 돌아본다.

세월은 나의 서른을 '순삭'해갔다.

남은 기억은 많지 않다.

삼십대 전반은 웹기획자로

삽십대 후반은 글쓰는 에디터로 살았다.

핸들로 치면 180도를 꺽은 터.

전혀 해보지 않은 일을 한다는 것,

그러니까 '업'을 바꾼다는 것은 위험한 선택이다.

무모한 도전이다.

하지만 서른 이후에는 그 조차도 불가능하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그런 사회다.


글 쓰는 일을 좋아했다.

어릴 때는 상도 많이 타고

서평으로 수십만 원의 적립금도 챙기고

다른 사람의 이름을 책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업'으로서의 글쓰기는 전혀 다른 일이었다.

나는 브랜드의 '브'자도 모르면서 업을 바꾸었다.

더 늦기 전에 좋아하는 일을 해야겠다는 조바심 탓이었다.

그리고 그 조바심이 몸과 마음을 축냈다.

전혀 경험이 없는 일로 도전하기에는

서른 다섯의 나이가 너무 많았다.

열 살 가까이 어린 친구들에게 혹한 피드백을 받았다.

때로는 팀장의 위치에서 팀원으로 강등되기도 했다.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했지만

오래된 문화와 편견에서 나도 자유롭지 못했다.

우울증과 공황장애가 거친 파도처럼 나를 덥쳤다.

석달 동안 식물인간처럼 집과 도서관을 오간 적도 있다.

그렇게 7년을 일하다가 결국 회사를 나왔다.

그렇다면 그 7년을 후회하냐고?

글쎄 그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만일 내가 서른 중반에 무모한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마흔 중반 지금의 내가 그 도전을 할 수 있을까?

어불성설이다.

서른도 숨이 턱에 찼었다.

적어도 내게는 어림없는 일이다.

그렇게 서른 중반을 온 몸으로 버티며 지나오니

이제 내 이름으로 일하는 1인 기업으로도

최소한 내 식구 밥벌이는 할 수 있게 됐다.

그 7년의 고생은 그 당시에는 견디기 힘들었으나

지금은 훈장처럼 하고 있는 일의 거름이 되어 주었다.

디딤돌이 되어 주었다.

그래서 나는 서른이었던 나의 선택에

그 무모한 도전에

스스로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고 있다.


물리적인 나이는 중요치 않다.

흔한 수사, 꾸밈말이 아니다.

스무살인데 마흔의 부장 같은 사람을 만난다.

오십을 바라보는데 청년 같은 사람도 자주 본다.

혼자 일하는 1인 기업의 장단점은 명확하다.

한 달 벌어 한 달을 살아야 하는 불안이 일상이지만

조직 안에서는 결코 만날 수 없는 기회와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내 하기 나름이지만

꿈도 꾸지 못했던 일을 도모할 수도 있다.

세상에 나와보니 의외로 그런 사람이 많았다.

이십대 같은 마흔은 충분히 가능하다.

마흔같은 이십대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리고 그 사이에 서른이 있다.


나는 다시 서른을 살고 싶다.

마흔도, 오십도 서른처럼 살고 싶다.

무한한 가능성과 함께 인생의 고됨도 어느 정도는 아는

신중함과 무모함의 차이를 가늠할 수 있고

한 사람의 만남이 가진 무게에 경의를 표할 줄 알고

결국 남는 것이 사람임을

내가 하는 오늘의 작은 선택이 가져올 변화를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원숙함과

그래도 여전히 뛰는 심장을 가진,

세상을 바꾸고 싶은 열정을 아직 놓치지 않은 서른.

나는 그 서른을 다시 살고 싶다.

이 세상에 내게 삶을 허락하는 한은

그런 젊은 서른의 삶을 반복하고 싶다.

그리고 때로는 무모한 도전을 다시 하고 싶다.

죽지 않으니까.

고작 해봐야 공황장애 정도 아닌가.


그러니 심장 뛰는 삶을 살자.

남이 뭐라 하는 말에 신경 쓰지 말자.

하지만 전제가 있다.

나를 알아야 한다.

내가 무엇에서 에너지를 얻고

어떤 일을 통해 힘을 빼앗기는지.

어떤 일은 몸이 고되도 감당할 수 있지만

어떤 일은 아무리 돈을 많이 받아도 축나는 삶이 있다.

그러니 '나다운' 삶을 살자.

그래서 '나다운'게 도대체 뭔지 알아야 한다.

그 다음에야 '나다운' 삶을 살 수 있을테니.

그것이 신이 우리에게 선물한 삶에 대해

할 수 있는 최선이 선택이 아니겠는가.

빛나는 서른을 준 조물주에게

그 정도의 열심은 돌려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나다운'게 뭔지 찾아보자.

그것이 가장 '서른다운' 삶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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