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아침 9시, 예상대로 여의도는 조용하고 깨끗하고 쾌청했다. 약속된 카페는 넓고도 아늑했다. 모던한 스타일의 디자인은 세련되면서도 과하지 않았다. 심지어 라떼와 크로와상 세트 메뉴가 단돈? 5,500원이었다. 게다가 손님까지 별로 없어 (주말이니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임을 위한 장소로는 최적이었다. 하지만 우연은 없다. 이 장소를 찾기 위해 해당 모임의 주최자는 10여 군데에 이르는 인근 카페를 모두 돌아보았다고 했다. 심지어 화장실 위치까지 체크한 모양이었다. 이 모임, 잘 안될 수가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퍼뜩 스치고 지나갔다. 어떤 모임이냐고? 주로 3,40대인 어른?들이 모여 영어 원서를 읽는 모임이다. 자신이 고른 책을 가지고 와서 1시간 동안 몰입해서 원서를 읽는다. 그 뿐이다. 그런데도 이 날 13명의 사람들이 모여 ‘그것’을 해냈다. 이 모임의 주최자는 ‘성봉영어’의 이성봉강사다.
이 모임이 만들어진 이유는 간단하면서도 자연스러웠다. 지난 6개월 간 성봉영어는 유튜브에 5분짜리 영어 문장을 매일 다섯 개씩 업로드했다. 이 동영상은 스몰 스텝의 주요한 프로그램 중 하나가 됐다. 매일 스무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이 영상을 읽거나 듣고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인증’했다. 자연스럽게 넥스트 스텝에 대한 필요와 고민들이 오고 갔다. 그래서 나온 아이디어가 바로 이 ‘원서 읽기’ 모임이었다. 혼자서는 힘든 일이지만 함께 하면 쉽지 않을까. 현직 영어 강사의 가이드가 따른다면 더 유익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들이 오고가다 현실이 됐다. 지난 토요일은 바로 그런 기대와 필요가 만나 현실화된 모임의 첫 날이었다.
전날 뮤지컬 공연 관람으로 지각은 했지만, 어쨌든 나도 이 모임에 참여할 수 있었다. 한 시간 동안 오롯이 영어 책 읽기에 몰입했다. 취향 저격의 낯선 카페에서의 책 읽기는 그 자체로도 흥미로웠다. 함께 하는 사람들이 둘러 앉으니 혼자 읽을 때보다 몰입이 훨씬 쉬웠다. 영어 읽기가 왜 그렇게 중요한지에 대한 간단한 가이드를 받은 후 내가 고른 책 ‘Who was’ 시리즈의 첫 페이지를 펴들었다. 평소 좋아하던 작가 ‘마크 트웨인’에 관한 전기였다. 쉬운 책은 아니었으나 나는 곧 빠져들었다. 그의 불우한 어린 시절부터, 증기선을 운전하던 그의 젊은 시절, 골드 러쉬 시절의 신문 기자로 일하던 시절의 에피소드들이 빠르게 눈 앞을 지나갔다. 그 옛날 즐겨 보았던 만화영화 ‘허클베리 핀’의 주제곡엔 이런 가사가 있었다. ‘저 멀리 증기선이 부웅 붕~ 아름다운 평화로운 우리의 고장~’ 마치 그때의 그 시절 만화 속으로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순식간에 5개의 챕터를 읽었다. 세어보니 총 67페이지나 있었다. 정확히 한 시간 만에 책의 3분의 2를 읽은 셈이었다. 남모를 뿌듯함이 물 밀듯이 밀려왔다.
내가 영어를 공부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나이 든 후 이태원에 가서 전 세계의 젊은이들을 만나기 위해서다. 궁금한 점은 한결같다. 각각 다른 나라에서 온 그들은 어떤 이유로 이유로 이 곳에 왔는가. 어떤 다른 점을 보았는가. 무엇보다 그들은 어떻게 ‘자기답게 살고 있는가’를 물어보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엮어 한 권, 혹은 여러 권의 책을 내는 것이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이렇게 놀랍고 흥미진진한데, 전 세계에서 한국을 찾은 그들의 이야기는 또 얼마나 재미있을까. 뜻이 통한다면 모임도 만들 것이다. 재밌는 단체 하나가 만들어질지도 모른다. 외국에 내 책을 소개할 기회가 오지 말라는 법도 없다. 그래서 나는 지난 3년 간 하루 다섯 개의 단어를 외워 왔다. 영어로 시작해 일본어, 중국어를 공부하는 중이다. 하지만 하루 다섯 개의 단어를 넘지 않았다 지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영어는 이제 넥스트 스텝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이성봉 강사는 함께 읽을 책의 기준을 이렇게 말해주었다. 읽기에 부담되지 않을 정도의 난이도일 것. 한 페이지에 모르는 단어가 많지 않을 것, 하지만 조금 어려워도 흥미로운 주제라면 괜찮다고 했다. 어떠한 평가나 지적도 없을 것이라했다. 우리가 모인 이유는 영어공부 자체를 즐기는 것이라고했다. 그렇다면 나는 그날 성공한 셈이다. 한 권의 책이 만만해졌고 그 읽는 과정이 즐거웠기때문이었다. 내가 그 날 읽은 책에서 마크 트웨인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My works are like water.
The works of the great masters are like wine.
But everybody drinks water.”
그렇다. 우리가 한 일은 와인이 아닌 물 한 잔의 노력에가까웠다. 그동안 와인 한 잔 정도는 마셔줘야지 하는 욕심에 걸려 매번 넘어지곤했었다. 하지만 이 위대한 작가의 글은 오히려 어렵게 쓰여지지 않아 사랑받았다. 모두가 불후의 명작을 남기고 싶어할 때 그는 자신이 쓸 수 있는 글을 쓰는데 열중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자 돈과 명예가 그를 따랐다. 사람들이 원하는 글은 어렵고 현학적인 글이 아니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평범한 사람들의 생생한 이야기들이었다. 우리가 그 날 모인 이유도 그와 크게 다르지않았다. 영어 공부라는 호려한 포장과 가면을 벗고, 우리가 읽고 싶은 이야기를 읽는 과정, 그 자체를 즐기려 함께 애썼다. 다행히 약 2시간의 모임을 마친 우리의 표정은 밝았다. 보통의 사람들이 누리는 토요일 아침의 만족과는 많이 달랐다. 나는 그 날, 나의 소박한 꿈의 실현에 반 발자국 정도는 다가서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