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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줍은 미쿡 사람, '이안'을 위하여

난감할 따름이었다. 미쿡 사람 이안이 내 앞에 앉아 있었다. 한국인 여자친구 에리카는 화장실에 가고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눈 앞이 캄캄해졌다. 게다가 이안은 내가 흔히 알던 자신감 넘치는 외국인의 스타일은 아니었다.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미시간에서 왔다고 했다. 캐나다 근처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야구를 좋아하냐고 물었다. 자신은 그닥 좋아하지 않는데 여자친구가 두산 팬이라고 했다. 그가 부산에서 일한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롯데 경기에 한 번 가봤다고 했다. 한화와 나란히 꼴지라는 표현을 하다가 Lowest라는 마도 안되는 말을 해버렸다. 그런데 뭐 어떤가? 그도 한국말 못하기는 매 한 가지 아닌가. 그렇게 말도 안되는 대화가 한 시간을 넘게 이어졌다. 대화하는 내내 속으로 다짐했다. 한국어를 못하기는 그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뭐라도 말을 붙이려고 보면 식상한 표현들만 이어졌다. 어디서 왔나? 한국 음식은 어떤가? 온 지 얼마나 되었나? 나라도 지루할 질문들을 제외하고 나니 할 말이 없어졌다. 그때 그가 어렵게 네이버 번역을 해가며 되물어 왔다. 꼬막 비빔밥에 딸려 나온 미역국을 보고 누구 생일이냐고 했다. 그의 서툰 한국말이 오히려 귀엽게 다가왔다.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이 날은 토요일 아침이었다. 토요원서미식획, 즉 토미를 만나러 가는 날이다. 이른 주말 아침의 여의도 역 인근은 한산한 편이다. 전 날 비라도 온 것인지 공기는 습하고 나뭇잎은 싱싱했다. 상쾌한 기운을 가득 안고 토미가 열리는 마호가니 카페로 향했다. 그리고 한 시간 가량 원서를 읽었다. 오늘 읽은 책은 Who was 시리즈의 월트 디즈니 편이었다. 이 책은 디즈니의 어린 시절을 묘사하는 강렬한 한 장면으로 시작한다. 디즈니는 생쥐 한 마리를 잡아 끈으로 묶은 후 교실 안을 돌아다녔다고 했다. 아이들이 소리를 질렀고 그는 선생님으로부터 벌을 받았지만 개의치 않았다고 했다. 그 쥐가 나중에 미키 마우스가 되었다고 했다. 그래. 좋은 글을 이렇게 시작하기 마련이지. 재미와 놀라움과 강렬한 한 방이 있는 첫 문장, 혹은 첫 단락의 힘을 함께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내가 알아들을만한 문장으로도 이렇게 자세한 전기 한 편을 쓸 수 있구나 하는 깨달음. 그리고 이어진 점심 시간에 이안을 만났던 것이다. 부산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이안과의 식사는 바로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월트 디즈니의 전기처럼 강력한 한 방이 있던 토요일이었다.



지난 3년? 혹은 4년 이상 영어를 공부해왔다. 아니, 다섯 개의 영어 단어를 매일 '보아왔다'. 그러다보니 함께 제공하는 생활 영어는 번역을 보지 않고도 90퍼센트 정도는 이해하는 수준까지 왔다. 미드나 영화를 볼 때면 영어와 한글이 섞여서 들려와 혼란스러웠다. 몇 몇 TED는 자막을 보지 않고도 대략의 내용을 이해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영어를 제대로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은 엉뚱한 곳에서 찾아왔다. 다름 아닌 사람에 대한 관심이다. 스몰 스텝을 통해서 참으로 다양한 사람을 만나면서, 그리고 평범한 그들 안의 비범함을 만나면서 우리와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그들의 이야기는 또 얼마나 재미있을까 하는 기대가 스물스물 올라왔던 것이다. 그들의 일상은 어떨까? 그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들과 우리의 행동이나 습관은 무엇이 어떻게 다른 것일까? 왜 그들은 우리보다 더 '자기답게'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일까?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 같은 프로그램은 한계가 명확하다. 초대받은 나라에 대해 나쁘게 말할 외국인이 누가 있겠는가. 가는 곳, 먹는 것들이 빤해지면서 재미도 없어졌다. 그들의 속마음이 더 궁금해졌다. 그러던 차에 이안을 만난 것이다. 까칠한 이안, 수줍은 이안, 시골 사람 이안... 나는 그런 이안의 낯가림과 불친절함이 오히려 더 흥미롭게 다가왔다. 이안의 이야기를 듣고 글로 쓸 수 있다면 또 얼마나 재미있을까.




여자친구 에리카의 도움으로 그런 속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손을 잡고 다니면 언제나 따라오는 나이 드신 분들의 따가운 시선, 좀처럼 곁으로 다가오지 않는 한국 사람들, 외롭지 않냐고 이안에게 물었더니 그건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다름과 같음이 공존하는 이안의 사생활에 나도 모르게 빠져들기 시작했다. 에리카는 이런 얘기도 했다. 부모님 앞에서 과한 애정 표현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했다. 미국에서는 그런 표현을 하지 않으면 뭔가 문제가 있는 커플로 본다는 말이었다. 우리가 장모님이 차려주신 음식은 무조건 두 그릇 이상을 먹어야 하는 것과 비슷했다. 이안은 여전히 까칠했지만 간간히 웃음을 보였다. 도널드 트럼프를 좋아하냐고 했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강력한 민주당 후보가 없어서 그가 분명히 재선될 거라 했다. 샌더스는 약하다고 했다. 내가 말했다. 트럼프를 좋아하지 않지만 지금 상황이 우리나라에게도 나쁘지 않다고. 그도 그 점에는 동의하는 것 같았다. 남북 간의 대화가 이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짧은 단어들의 배열이었지만 의사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식사가 마칠 때쯤, 외국인을 향한 두려움은 절반 이상 사라져 있었다. 에리카에가 말한 언어 교환 카페를 꼭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 간절해졌다.



영어를 잘 하는 것은 두 번째다. 더 중요한 것은 배워야 하는 이유다. 나는 나이가 들면 공원 보다는 이태원을 찾아가고 싶다. 거기서 젊고 활발한 다양한 나라와 인종의 외국인들과 대화하며 시간을 보내고 싶다. 그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싶다. 그리고 돌아와 그들의 이야기를 브런치나 페이스북에 사진과 함께 올리고 싶다. 그런 글이 쌓이면 책으로 내고 싶다. 그들의 한국 생활에 대한 깊은 속이야기를, 우리와 같거나 다른 다양한 문화에 대하여, 무엇보다 그들이 어떻게 '자기답게'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더 깊은 이야기를 물어보고 싶다. 흥미롭지 않은가. 우리와 같은 시간과 장소를 살아가는 이야기도 이렇게나 다양한데, 그들의 이야기는 또 얼마나 재미있고 흥미진진할 것인가. 그런데 어쩌면 이 꿈을 생각보다 빨리 이룰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을 이안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까칠한 이안과도 한 시간을 이야기했는데, 조금만 친절한 외국인이라면 더 길게도 더 깊이도 가능하지 않을까? 부산에 가면 만나고 싶다는 나의 제안에 이안의 표정은 말과는 다른, 내키지 않는 표정이 완연했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대신 영어를 더 깊이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은 간절해졌다. 뻔한 질문 말고, 더 깊은 얘기를 끌어낼 수 있을 정도의 영어 실력을 쌓고 싶은 생각이 강렬해졌다. 토요원서미식회, 토미를 만나던 날의 토요일 아침이었다.




하루 다섯 문장, 영어는 성봉영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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