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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보드를 탐하다

나는 키보드가 좋다. 그래서 사 모은 키보드만 족히 스무 개는 될 것이다. 물론 모든 키보드가 마음에 들었던 것은 아니다. 어떤 키보드는 한 번 만 쓰고 고개를 저은 적도 있었다. 그럴 때면 선심 쓰는 척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곤 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써보지 않고는, 적어도 며칠은 써보지 않고는 내게 맞는지 아닌지 구분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고가의 키보드일 수록 더욱 난감하다. 10만 원짜리 기계식 키보드를 사기 위해서 용산의 매장까지 찾아간 적이 있었다. 수십 만원 짜리 키보드가 즐비했다. 나는 행복했다. 그러나 직접 구매한 키보드는 10만원 대의 작은 텐키리스 키보드였다. 숫자키가 달려있지 않아 콤팩트한 사이즈였다. 그런데 지금 그 키보드는 아들의 책상 위로 유배를 가 있는 상황이다. 무선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버림 받은 것이다. 맥북을 쓰게 되면서, 그와 동시에 쓸 수 있는 USB 포트를 제한받게 되면서, 무엇보다 책상 위를 어지럽히는 긹고 굵은 선이 마음에 들지 않아 아들에게 '주어버렸다'. 아마도 아들은 이 비싼 키보드를 게임이나 하라고 던져준 아버지를 고마워할지도 모르겠다. 아들아 괜찮다. 무엇보다 유선이라서 게임에 최적화된 키보드야. 쑥쑥 눌리는 키감이 아주 마음에 들거야. 그러니 열심히 게임이나... 아니다. 그래도 가끔은 옛 추억이 생각나 이 녀석을 찾는다. 기계식 키보드의 타이핑 소리는 묘한 중독성이 있다. 마치 막힌 글을 쓸 수 있을 법한 용기를 줄 것만 같아서다.


기계식 키보드의 손맛은 맛보기 전엔 모른다


최근에는 블루투스 키보드에 꽃혀 시간과 노력과 비용을 낭비했었다. 노트북의 무게를 조금이라도 줄여보고자 태블릿을 샀다. 태블릿을 되팔고 아이패드를 샀다. 애플 펜슬을 샀다. 이제 하나 남은 건 무선으로 연결 가능한 블루투스 키보드였다. 그런데 여기엔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다. 작고 얇은 키보드를 골라야 하지만 키감을 양보해야만 한다. 그렇게 고른 첫 번째 키보드는 '트리플 엑스 폴딩'이라는 멋진 이름을 가진 접이식 키보드였다. 삼단으로 접히는 이 키보드는 모두 다 펼쳐보아야 아이패드 길이 정도다. 작은 주제에 키감도 나쁘지 않다. 가격대도 3만원 대니 감사할 따름이다. 하지만 녀석에게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다. 바로 오른쪽 쉬프트 키의 위치와 크기 때문이었다. 타이핑 시 쌍으로 된 자음을 칠 때면 반드시 쉬프트 키를 눌러야만 한다. 그런데 오른쪽 쉬프트키가 너무 작은게 문제였다. 쌍씨옷을 치려면 방향키를 눌러 버렸다. 조금만 신경을 쓰면 못 쓸 것도 아니지만, 매번 키에 신경을 쓰다보니 글쓰기에 집중이 어려웠다. 무게도 딱이고 크기도 딱인데 도저히 쓸 수가 없었다. 내가 왜 얘한테 적응해야 하나 억울한 마음이 들 때쯤, 결코 가지 말아야 할 곳에 가고야 말았다. 바로 가로수길에 위치한 애플 스토어가 그곳이다.


아이노트의 블루투스 키보드 '트리플 엑스 폴딩'


매직 키패드의 AS를 위해 찾은 이곳에서 멋진 키보드 하나를 만났다. '키즈 투 고'라는 이름의 이 키보드는 놀라울 정도로 얇았다. 덕분에 무게는 200g이 채 되지 않았다. 노트북을 대신한 용도로는 최고의 선택임에 분명했다. 로지텍 키보드 치고는 디자인까지 심플했다. 나는 곧 이 녀석에게 빠져들고 말았다. 문제는 역시 키감이었다. 아이패드에 딱 맞는 크기이면서도 키 위치는 정직?했다. 널직한 쉬프트 키를 누르며 이미 마음은 기울어져 있었다. 그러나 키감은 망할 수준이었다. 경쾌한 키감을 좋아하는 내게는 지나치게 묵직했다. 그래도 이미 빠져든 이후였다. 아주 가끔이라도 쓸 요량으로 기어이 녀석을 사고 말았다. 이쁜 쓰레기였다. 그래도 키보드는 이쁘고 봐야 한다. 아이패드랑 깔맞춤을 한 듯 너무나 어울리는 한 쌍의 디자인을 나는 결국 외면하지 못했다. 그 와중에도 나는 이런 상상을 했다. 마치 긴 칼과 짧은 칼을 동시에 들고 다니는 사무라이의 모습을. 그래서 나는 지금도 이 키보드를 들고 다닌다. 아주 짧은 글을 써야 할 때를 대비하여, 간단한 톡에 답장하거나, 일정을 입력할 정도로는 문제가 없다. 무엇보다 간지가 난다. 그러다 긴 글을 써야 할 때가 오면 애플 키보드를 꺼내면 된다. 한 몸이 된 듯 글을 쓸 수 있는 애플 매직 키보드 두 번째 버전. 내겐 이 비장의 키보드가 있다. 그래서 결코 두려울 게 없다.


로지텍이 만든 블루투스 키보드 '키즈 투 고'


애플 매직 키보드는 2세대로 나뉜다. 노트북에 달린 키보드가 같은 듯 또 다르다. 이전 버전의 키보드는 묵직한 눌림이 좋았다. 그러나 버터 플라이 방식의 매직 키보드가 새롭게 등장했다. 처음엔 A4 용지 위에서 타이핑을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인간의 적응력은 얼마나 놀라운가. 나는 곧 이 키보드에 적응하고 말았고, 이제는 거의 모든 긴 글을 이 키보드를 통해 완성하곤 한다. 작고 심플하고 가볍고 멋지다. 경쾌한 키감 때문에 자꾸만 글을 쓰고 싶어진다. 약간의 힘만 주어도 되므로 어깨가 아프지 않다. 매직 마우스를 누르는 손 끝의 불쾌감 때문에 키패드로 바꿔버린 나다. 한 손락 끝에 힘을 주어야 하는 마우스와 달리 매직 키보드는 거의 모든 동작이 쓰다듬듯 이뤄진다. 넓고 광활한 매직 키패드는 마지 얼음판을 내달리는 김연아를 떠올리게 한다. 묘한 울림을 주는 터치패드의 클릭감은 가볍고 경쾌하다. 손끝에서 짧고 분명하게 끝나는 이 키감을 나는 매우 사랑한다. 그 시간에 글이나 한 자 더 쓸 것이지. 이런 도구에 대한 집착을 이해 못하는 건 와이프만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어쩌랴. 내게는 그런 경험들이 너무나 중요한 것을.


애플 매직 키보드 1세대
나의 최애 키보드 애플 매직 키보드 2세대


글쓰기는 물리적인 노동이다. 긴 시간 의자에 앉아 손끝의 감촉을 글을 써야만 한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운동을 할 수는 없다. 춤을 출 수 없다. 각각의 동작에 맞는 옷이 반드시 따로 필요한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키보드에 대한, 마우스에 대한, 노트북에 대한, 모니터에 대한, 펜에 대한, 노트에 대한 집착은 타당한 것이라 믿는다. 좋은 키보드를 만나면 글을 쓰고 싶어진다. 넓고 선명한 모니터를 만나면 이유 없이 행복해진다. 키패드 위를 질주하다보면 새로운 생각들이 마구 떠오를것(만) 같다. 까끌한 노트 위를 지나는 만년필의 사각거림. 어쩌면 나탈리 골드버그가 말한 쓰기의 쾌감도 이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새로 구입한 애플 펜슬에 입힐 실리콘 그립이 필요해진다. 아이패드를 적당한 각도로 세울 스탠드가 필요해지고, 그러면서도 또 틈틈히 새로운 키보드를 찾아 써핑의 여정을 떠난다. 그리고 이 모든 물욕의 중심에는 좋은 글에 대한 탐욕이 있다. 글쓰기의 고단함을 덜어보려는 처절한 노력이 있다. 그런 면에서 연장 탓을 하는, 그래서 늘 도구를 탐하는, 나의 키보드 강박에는 이유가 있다. 모두가 그 이유를 납득하지 못한다 해도. 나는 여전히 더 좋은 도구를 갈망한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다. 적어도 그런 핑계라도 대야만 하겠다. 나는 키보드가 좋다. 그리고 그렇게 써내는 글들이 좋다. 좋은 도구는 좋은 글을 부른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는다. 믿고 싶어한다. 궤변이라도 꾸짖어도 좋다. 새롭고 좋은 키보드를 만나면 또 흔들릴 것이다. 이런 나의 작은 탐욕은, 적어도 나의 글쓰기 안에서는 무죄다.





* '쓰닮쓰담', 평범한 사람들이 작가로 다시 태어나는 글쓰기 오프 모임입니다 :)

(참여코드: wr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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