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옛날 즐겨 보았던 서부 영화들에는 공통된 패턴이 있었다. 정의의 사도는 보안관이었다. 악의 화신은 인디언들이었다. 불쌍한? 서부 개척자들은 마차를 타고 황무지 위를 달렸다. 그러다 인디언들이 나타나면 마차로 원을 그리고 방어벽을 세웠다. 그 주위를 인디언들이 달려들며 커다란 원을 그렸다. 개척자들은 총을 쏘고 인디언들은 활을 쏘았다. 그 원이 좁혀지면 개척자들이 죽었다. 인디언들이 패배하면 그 원은 사라질 터였다. 나는 이 장면에서 글쓰기를 떠올렸다. 작가는 주제라는 개척자들을 향해 불나방처럼 달려든다. 글쓰기를 방해하는 온갖 장애물들이 미친 듯이 총을 쏘아댄다. 뭘 쓸지 몰라 허둥대면 몰입의 원은 흩어졌다. 방어선을 뚫고 마차를 넘어가면 한 편의 글이 끝나는 셈이었다. 핵심은 몰입이었다. 거대한 원이 줄어드는 것은 성공적인 몰입을 뜻했다. 먼지를 일으키며 미친듯이 달려들던 인디언들이 죽어나가는 것은 몰입의 실패를 의미했다. 작가는 언제나 이렇게 치열한 전투를 펼친다. 결국 글쓰기는 선명한 주제를 향한, 몰입을 향한, 치열한 한 편의 서부영화인 셈이었다. 그러니 이 전투의 승리를 위해 준비할 것들이 있었다. 다음은 그 동안 내가 터득한 7가지 비법들이다.
첫째, 새벽에 싸움을 걸어라.
나는 요즘 새벽 4시가 되면 어김없이 일어나 글을 쓴다. 일찍 일어나 따뜻한 물 한 잔을 마시는 것 외에 어떤 것도 하지 않는다. 오직 읽거나 쓰는 일만 한다. 오후에 글을 쓰는 일은 몇 배의 에너지가 들었다. 아무리 커피를 마시고 카페를 찾아도 글쓰기를 방해할 요소들이 너무 너무 많이 찾아왔다. 택배, 세탁 소리, 고양이들, 골목을 울리는 과일 장수의 스피커 소리, 9회말을 향해 내닫는 메이저리그의 야구 경기까지... 하지만 새벽은 이런 방해들이 없다. 오직 나와 모니터만이 황야의 무법자처럼 대면하기 마련이다. 적은 오직 하나다. 내가 먼저 모니터의 빈 화면을 채워야만 한다. 깜빡이는 커서와의 싸움에서만 지지 않으면 된다. 하얀 모니터 화면을 까맣게 채우는 희열이 있다. 어떤 방해도 없는 새벽 시간이 글쓰기의 최전선이다. 나는 매일 아침 이 싸움을 즐긴다. 오후의 글쓰기 싸움엔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 마중물을 퍼붓는다.
거저 나오는 글은 세상에 없다. 읽은 만큼, 느낀 만큼, 경험한 것만큼만 쓸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나의 시간과 노력은 제한되어 있다. 모든 걸 경험할 순 없다. 그러나 우리에겐 읽을 책이 있지 않은가. 글쓰기가 어려울 땐 글쓰기에 관한 책을 읽는다. 좋아하는 작가의 글을 읽는다. 일종의 마중물인 셈이다. 그래서 새벽엔 읽을거리를 준비한다. 영화를 볼 때면 팝콘과 콜라를 손에 쥐는 것처럼. 이 새벽의 의식에 어울리는 여러가지 읽을거리야 말로 최고의 마중물이다. 대한민국의 글 잘쓰는 칼럼니스트들을 모으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들의 짧은 글을 읽으며 내 글을 정조준한다. 모방하고 카피하자는 말이 아니다. 지적 자극을 허락하자는 의미이다. 마음이 동해야 글이 써지는 법이다. 저 글만큼 쓰고 싶다. 저 글만큼은 쓸 수 있겠다. 그런 생각이 들 때까지 좋은 글을 읽는다. 좋은 책을 읽는다. 이윽고 발끈하여 키보드 위로 내 손을 얹을 때까지.
셋째. 음악을 듣는다.
음악만큼 사람의 마음을 쉽게 흔드는 존재가 다시 있을 수 있을까. 나는 글이 써지지 않을 때면 좋아하는 음악을 듣는다. 패신저란 가수를 좋아한다. 아델의 노래도 좋다. 요란하지 않은 곡, 기타 하나면 충분한 어쿠스틱 노래를 즐긴다. 새벽의 감성을 흔들어 깨우는 노래면 더욱 좋다. 그렇다고 감성이 지나치면 글이 물러진다. 굳은 사막에 한 줄기 비처럼 꼭 필요한 만큼만 허락하곤 한다. 물론 글의 종류에 따라 더 많은 음악이 필요할 때도 있다. 설득하는 글이 아닌 감동과 여운을 주는 글이라면 더 많은 노래를 들어야 한다. 하지만 근거와 주장이 필요한 글일 때는 마음을 움직이는 정도로 충분하다. 글에 어울리는 선곡까지 할 수 있다면 더욱 좋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재즈 카페를 운영하면서 데뷔작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을 썼다. 훌륭한 작가들은 대부분 자신의 작업 공간을 채우는 음악이나 앨범 하나 정도를 가지고 있다고 들었다. 나 역시 그렇다. 그러나 준비가 되면 나는 여지없이 음악을 끊는다. 글 자체에 더욱 더 몰입하고 집중하기 위해서다.
넷째, 산책을 하고 달리기를 한다.
이도 저도 안되면 현관문을 박차고 뛰어나가야 할 때다. 나는 새벽 4시에 일어나 매일 3시간을 글쓰기에 매달린다. 그러다 7시가 되면 산책을 하고 탄천을 달린다. 머리를 깨우지 못하면 몸부터 깨워야 한다. 그렇게 한 시간을 달리고 걷다 보면 온 몸이 땀으로 적당히 흥건해진다. 그리고 하는 샤워는 인생의 축복이다. 굳은 감성을 깨운다. 막힌 아이디어를 뚫는다. 산책시에 듣는 음악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처방이다. 나는 글이란 발로 쓴다고 믿는다. 생각만으로 쓰는 글은 힘이 없다. 아는 것보다는 경험한 것이 강력하다. 몸은 그 경험이 주는 전율을 안다. 새벽의 산책과 조깅은 그 경험의 감흥을 일깨우는 방법이다. 글의 호흡은 달리기의 호흡을 닮았다. 산책의 여유로운 호흡과 달리기의 다급한 호흡, 이 두 호흡이 교차하는 글쓰기는 읽는 이에게도 전달이 된다. 살아있는 글을 쓰고 싶다고? 달려보며 호흡을 학습하라. 머리가 아닌 몸으로 쓰는 법을 익히라.
다섯째, 실시간으로 글을 쓴다.
나는 초고를 브런치에 쓰곤 한다. 쓰는 순간 바로 발행할 수 있는 그 긴박감을 즐긴다. 오타가 나오고 맞춤법이 틀려도 개의치 않는다. 초고를 쓴 후 바로 찾아오는 피드백을 즐긴다. 글쓰기의 실전인 셈이다. 모든 글을 그렇게 쓸 수는 없지만, 지금과 같은 짧은 글을 쓸 때면 그 긴박감을 즐긴다. 정제되지 않은 날 것 같은 글의 생동감. 쓰는 이가 느끼는 그 감흥을 그대로 전하고 싶을 때면 브런치에 실시간으로 글을 써 올리곤 한다. 언제고 퇴고할 수 있다는 안정감이 글쓰기를 머뭇거리게 한다. 내 마음에 들어야 남에게 보이겠다는 가당찮은 생각을 버린다. 그렇게 완성된 글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내 눈 앞에 독자가 있다고 생각하고 글을 쓴다. 말을 하듯 글을 쓴다. 지금 저 사람이 내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평생 할 수 없을 것 같은 고백으로 글을 쓴다. 모든 글을 그렇게 쓴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짧은 글은 자주 그렇게 쓴다. 이렇게 올린 글은 언제든 고칠 수 있지 않은가. 실패가 허락되는 글을 쓴다. 그것이 더 나은, 완성에 가까운 글로 인도하는 가장 좋은 훈련이라고 믿는다.
여섯째, 과감히 모니터를 떠난다.
이도 저도 안되면 모니터를 떠나 침대 위에 몸을 누인다. 내가 쓰고 싶은 글들을 허공 속에 그려 본다. 한 번에 그림이 그려질 때까지 내가 쓸 글들을 떠올린다. 머릿 속 퍼즐처럼, 테트리스처럼 글감들을 옮겨 본다. 스스로 납득되지 않는 글은, 스스로를 감동시키지 못하는 들은 그 누구에게도 다가가지 못한다. 독자는 나만큼 글을 공들여 읽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몇 배로 치열해야 한다. 모니터를 보지 않고도 글의 내용을 웅변할 수 있을 정도로. 그런 글에는 선명함이 있다. 망설임이 없다. 군더더기가 없다. 명료함이 있다. 나는 그런 글이 좋다. 원고가 날아가버려도 즉석해서 연설할 수 있을 정도의 준비. 실제로 모니터가 뜨지 않아 PPT 없이 강연을 한 적이 있었다. 3년 간의 반복된 훈련이 없었다면 그 날의 성공적인 강연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모니터를 떠나도 글을 떠올릴 수 있어야 한다. 그 안에서 자유롭게 글의 조합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수 많은 운동 선수들이 그렇게 훈련한다. 자리에 누워서도 공을 차고 방망이를 휘두른다. 글은 더욱 그래야 한다. 모니터만이, 종이 위만이 전쟁터가 아니다.
마지막으로 읽고, 읽고, 또 다시 읽는다.
좋은 글은 풀무질과 같다. 다듬으면 다듬을 수록 좋은 글이 나온다. 글을 실수로 날려먹었다고 우울해할 필요는 없다. 당신이 썼던 글이라면 다시 쓸 수 있을 것이다.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쓴 글도 고칠 수록 더 좋은 글이 된다. 한 번 쓴 글은 지겹도록 다시 읽는다. 입말에 걸리는 글은 잘못된 글이다. 필요한 것이 빠졌거나 불필요한 무엇이 더해진 글이다. 글의 중간쯤이 지겨워지는 글은 논리가 빈약한 글이다. 재미가 없는 글이다. 필요하지 않은 글이다. 좋은 글은 끝까지 펄떡인다. 읽다보면 힘이 난다. 궁금해서 몰입하게 된다. 재미 있어서 흥분하게 된다. 다 읽고 나서 전율이 느껴지는 글이다. 그러나 쓰는 사람이 그런 경험을 하지 않고서는, 그런 감흥을 전할 방법이 도저히 없다. 나는 게으른 글이 싫다. 생생한 글이 좋다. 전쟁터 한 가운데로 몰아넣는 글이 좋다. 팽팽히 당겨진 고무줄처럼 긴장된 글이 좋다. 그러려면 풀무질을 해야 한다. 읽고 또 읽고, 쓰고 또 써야 한다. 압축하고 두드려야 한다. 가능하다면 그렇게 쓰고 싶다. 벌겋게 달아오는 쇳덩이 같은 글을 써보고 싶다. 그러기 위해 고쳐 쓴다. 내 마음이 움직이는 바로 그 순간까지.
* '쓰닮쓰담', 평범한 사람들이 작가로 다시 태어나는 글쓰기 오프 모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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