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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피드백 선생

브랜드 전문지에서 에디터로 일할 때였다. 그때의 일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았다. 우선 편집장과의 미팅을 통해 큰 주제를 잡았다. 브랜드 런칭, 스마트 브랜드, 온라인 브랜딩, 휴먼 브랜드... 매거진의 성격상 주인공은 언제나 브랜드였다. 이렇게 주제가 정해지면 각자 그에 맡는 소재들을 찾아 나섰다. 이때의 소재 역시 브랜드였다. 주제에 걸맞는 기업과 브랜드를 혈안이 되어 찾았다. 신문 기사와 책은 기본이고 소문과 지인 찬스, 해외 언론에 직접 발품을 파는 과정을 통해 다양한 꼭지들을 미친 듯이 찾아 다녔다. 그런 후에 다시 편집장 미팅이 있었다. 이때 에디터는 왜 자신의 소재가 매력적인지를 편집장과 다른 에디터들을 향해 설득해야 했다. 믿었던 꼭지들이 잘려나갈 때의 아픔은 상상 외로 컸다. 자신의 소재에 대한 미련과 새로운 브랜드를 찾아야 한다는 부담감이 교차해 이 미팅 역시 치열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소재가 정해지고 집필에 들어가는 순간 글쓰기의 긴장감은 극에 달했다. 어느 대형 교회의 수련원에 들어가 일주일 씩 문을 걸어잠그고 글만 썼다. 그렇게 나온 글은 다시 에디터들 사이에서 치열한 평가를 받았다. 편집장이 오케이한 글도 잘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지금은 가장 친한 에디터를 그때 만났다. 하지만 나는 처음으로 내 글을 평가받던 그 순간을 결코 잊지 못한다.



믿었던 글이 판판히 깨어져 나갔다. 가장 큰 평가는 논리의 비약이 심하다는 평가였다. 살벌했다. 내 영혼 전체가 탈탈 털리는 허탈한 기분이었다. 그런 상실감 뒤에는 분노가 찾아왔다. '네가 뭔데 감히...'라는 울분이 느닷없이 찾아온 나는 소리없이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원고 뭉치를 회사 건물 계단 위로 내다 꽂았다. '팡'하는 소리와 함께 원고 뭉치가 길다란 계단 위로 미끌어져 내렸다. 그 와중에도 나는 원고들이 눈발처럼 날리기를 내심 바랐다. 엄청나게 큰 소리가 나길 바랬다. 다른 에디터들이 그 소리를 듣고 망연자실한 눈으로 흩날리는 원고들을 바라보기를 원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스태플러로 묶인 원고는 바닥 위에서 무심한 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화는 한동안 사그러들지 않았다. 내 존재 전체가 부정당한 그 느낌은 오래도록 계속되었다. 잔인한 피드백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내 입을 틀어막았다. 그런 경험이 있은 후 나 역시 냉정한 비평가가 되었다. 우리는 그런 경험들이 글과 매거진의 수준을 높여줄 거라 믿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그로부터 약 5년 여가 지난 지난 어느 주말이었다. 6주간의 오랜 글쓰기 모임이 비로소 끝이 났다. 우리는 평소처럼 근처 식당에서 마지막 식사를 했다. 똠얌꿍과 팟타이와 쌀국수를 먹었다. 모임의 이름은 '쓰닮쓰담', 쓰고 닮아가며 쓰고 담아간다는 멋진 의미를 담고 있었다. 하지만 중의적인 이 이름의 원래 취지는 서로를 쓰다듬자는 생각에서 나온 이름이었다. 치유와 위로의 글쓰기가 되길 바랬다. 이건 바람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모임 중간중간 울음이 터지는 사람들이 나왔다. 자신의 내면을 찾아나서는 이 여정이 그럴 수밖에 없는 결과로 우리를 몰고 갔다. 아프고 힘든 과거들을 어쩔 수 없이 끄집어 내야 했다. 나에 대하여, 음식, 여행, 콤플렉스, 열정의 순간... 즉흥에서 나온 주제들은 하나로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누구이고 어떻게 살아왔는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그런 주제들로 쓰여진 글에는 따뜻한 평가와 위로와 지지들이 따랐다. 간간히 비평이 따르긴 했으나 그러기엔 시간이 짧았다. 두 시간을 훌쩍 넘겨 모임이 이어졌지만 언제나 시간은 부족했다. 칭찬과 위로만으로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그런데 그런 격려와 지지가 사람들의 글을 성장시켰다. 내 글을 진심으로 들어주고 이해해주는 사람들을 만나자 나날이 탄성이 이어졌다. 15년의 글쓰기 경력이 무색해지는 순간도 적지 않았다. 그런 경험들이 내게도 자극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우리는 함께 성장하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글을 쓰기 어려워하는 가장 큰 이유가 있다. 그것은 평가에 대한 두려움이다. 피드백이라는 이름으로, 합평이라는 이름으로, 글쓰기 뒤에는 어쩔 수 없는 평가가 따르기 마련이다. 우리는 경험상 그것을 두려운 존재로만 알고 있다. 점수로, 칭찬으로, 비난으로, 꾸지람으로 다가오는 그 후폭풍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하지만 글은 공개를 전제로 하는 작업이다. 혼자만의 자위로 끝나는 글은 진정한 글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렇기에 글쓰기는 언제나 암묵적인 두려움을 함께 데려오기 마련이다. 그 지점에서 많은 이들이 글쓰기를 포기한다. 주저한다. 그런 면에서 쓰닮쓰담과 같은 글쓰기 모임은 큰 도움이 된다. 용기를 준다. 자존감을 높여준다. 그 칭찬들이 과장만이 아님은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다. 그러나 여기서 머물러선 더 큰 성장이 불가능하다. 언제고 한 번은 그 냉혹한 피드백의 세계로 들어가야만 한다. 그래서 나는 브런치를 권한다. 페이스북을 권한다. 블로그를 권한다. 하다못해 한 줄 쓰기를 위한 인스타그램도 권한다. 우리의 글은 공개되어야 한다. 불특정 다수에게. 그들에 의한 칭찬과 격려, 비평과 평가에 익숙해져야만 한다. 그 피드백은 바로 '나다운' 글쓰기의 나침반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나는 글쓰기에 관한 글을 브런치에 연재 중이다. 채 한 달이 되지 않은 시점에 열 편이 넘는 글을 올렸다. 출간을 염두에 둔 작업이긴 하나 꼭 그 목적을 위해서만 글을 쓰지 않았다. 가장 큰 목적은 독자들의 평가였다. 브런치의 경우 가장 중요한 평가는 공유수라고 생각한다. 그 글을 좋아하는 것과 공유하는 것은 또 다른 의미가 있다. 글을 공유하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이런 글이 있네? 내 생각과 닮았어. 그런데 네 생각은 어떠니? 바로 이런 과정을 통해 글은 공유된다. 공유는 공감을 뜻한다. 좋은 글은 이런 공감을 많이 얻는 글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이런 평가는 필요를 의미하기도 한다. 내가 애써 쓰는 이 글은 사람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줄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의 필요와 욕망에 부합하는 글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글이라면 굳이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쓸 이유가 없다. 존재 가치가 없다. 그런 면에서 브런치 독자들의 소리 없는 평가는 그 어떤 평가보다도 소중한 피드백이다. 지금까지 십여 편, 조금씩 공유의 숫자가 늘고 있는 요즘이다. 내가 이 글을 써야만 하는 이유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 과정은 공개적인 피백과 냉정한 평가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에겐 따뜻한 유쾌한 피드백 선생이 필요하다. 헤밍웨이도 피츠제럴드도 냉정한 비평으로 자신의 인생이 무너지는 허망한 결과를 스스로 지켜보아야 했다. 하물며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그러한 평가가 유익할 수만은 없다. 소설가 김영하는 새로운 소설이 나오면 가장 믿을 수 있는 친구에게 자신의 글을 전화로 읽어주었다고 했다. 왜 전화였을까. 왜 직접 찾아가 읽어주거나 원고를 보내는 약간의 수고를 마다했던 것일까. 어쩌면 그 과정이 두려워서는 아니었을까. 그러니 우리에게는 단 한 사람이라도 유쾌한 피드백 선생이 필요하다. 내가 믿을 수 있고, 나를 이해해주는, 어떤 글이라도 믿고 말길 수 있는그 한 사람이 필요하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 앞이라야 부끄러움 없는 알몸으로 그 앞에 설 수 있다. 글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글쓰기에 필요한 것은 바로 그 한 사람이다. 가능하면 밝고 긍정적인 사람이면 더욱 좋겠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그 유쾌한 피드백 선생들을 찾아다닌다. 그리고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자 애쓰고 있다.


p.s. 참고로 내가 일한 브랜드 전문지는 업계 최고의 인정을 받았다. 다만 많은 에디터들이 그 생활을 견뎌내지 못했다. 지금 그 매거진은 더 이상 발행되지 않는다. 함께 일했던 에디터들 중 계속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은 뜻밖에 내가 유일하다.





* '쓰닮쓰담', 평범한 사람들이 작가로 다시 태어나는 글쓰기 오프 모임입니다 :)

(참여코드: wr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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