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를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을 지금도 기억한다. 네 번째 스몰 스텝 정기모임에서였다. 모임에서 첫 인사를 한 후 뒷자리에서 그녀를 다시 만났다. 마치 처음 본 것처럼. 그새 머리를 말아올린 변화를 알아채지 못한 때문이었다. 머쓱한 마음으로 다시 합석을 했다. 대기업에서 재정 관련 업무를 담당한다고 했다. 아쉬울 것 없는, 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사는 그런 사람인줄만 알았다. 이런 저런 얕은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질 때만 해도 다시 만날 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스몰 스텝 모임을 빠지지 않고 나왔다. 사람책 모임에도 나왔다. 토요원서미식회에서도 만났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난 어느 평일의 오후, 함께 점심을 했다. 그제서야 알았다. 우울과 공황으로 인해 약 2년 간 병원 생활을 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절망의 늪을 빠져나오는데 스몰 스텝의 모임과 사람들이 큰 힘이 되어준 사실도 함께 알았다. 그녀는 그렇게 매달 찾아오는 정기모임을 손꼽아 기다린다고 했다. 모임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 열기와 에너지를 다시 느끼기 위해. 그것이 자신을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되어준다고 했다. 이제 그녀는 다니던 회사를 떠나 새로운 도전을 앞두고 있었다. 확실히 그녀는 달라져 있었다. 알 수 없는 기대와 생기가 듣고 있던 이야기를 의심케 했다.
15년 이상 직장 생활을 했다. 그 오랜 기간 우울과 공황은 오랜 친구였다. 직장생활 1년 만에 지하철에서 공황발작을 만났다. 그게 정확히 뭔지도 모르고 회사를 다녔다. 오랫동안 마트를 가지 못했다. 스트레스를 만나면 머리가 하얘지곤 했다. 조금만 무리해도 어지러웠다. 우연한 기회에 검색을 통해 병명을 알아챌 수 있었다. 호전과 재발 사이를 왔다갔다 했다. 지금도 처방 없이는 발작을 경험한다. 영화관에서, 강연을 할 때, 또한 전혀 예상치 못했던 장소와 상황에서 공황을 만난다. 가슴이 답답해지고 손발이 저릿해오기 시작한다. 급체를 한 듯한 복부의 팽창과 숨 막히는 호흡 곤란이 뒤이어 찾아온다. 그때가 되면 나는 살기 위해 손바닥을 손톱으로 꼬집기 시작한다. 어느 날은 손바닥 전체가 벌겋에 멍들어 있기도 했다. 그런데 이 증상의 최악인 점은 아무도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내 눈 앞의 대화 상대는, 청중은, 가족은, 친구는 나의 상태를 알지 못한 채 이야기를 이어간다. 어느 전문가는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큰 두려움 중 하나라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나는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고립된 존재가 된다. 그 고통은 오직 경험한 사람만 알 수 있을 터였다.
그러던 어느 날 스몰스텝을 만났다. 사람들을 만났다. 비슷한 고민과 색깔을 가진 사람들이 운영진이 되었다. 그들로부터 폭포수 같은 칭찬을 받았다. 과분한 대우임에 틀림 없었다. 나는 고작 내 경험을 담은 책 한 권을 썼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쉴 새 없이 나를 헹가레쳤다. 물론 의심이 많은 나는 그 칭찬과 격려들 속에서도 냉정을 잃지 않았다. 지나가는 바람 같은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생각일 뿐이었다. 몸이 반응했다. 몸 안의 세포가 하나 하나 깨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언제나 우울한 채 살아가던 내 삶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칭찬은 코끼리로 춤추게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내 마음이 춤추기 시작했다. 공황으로부터 자유하게 된 시점도 바로 그 즈음이었다. 우울할 새가 없었다. 만나는 사람이 점점 많아졌다. 강연의 기회가 이어졌다. 내 삶을 간증할 기회가 더욱 많아졌다. 정기 모임을 위시한 번개는 왜 그렇게도 많아진 것인지. 이제는 주말도 없이 사람을 만나고 모임 속에 빠져든다. 영어 원서를 읽고, 북카페를 탐방하고, 언젠가는 낭독방에서 낭독극을 위한 연습에 참가한 적도 있었다. 그렇게 1년 반의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를 만난 것이다. 그녀의 고백?이 이어진 후 내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의외로 많을 수 있겠다 싶었다. 우리와 같은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곳곳에 숨어 있을 것 같았다. 그 중에는 남모르게 그 고통을 견뎌온 나의 가족도 있었다.
Y는 소설을 즐겨 읽는다고 했다. 인권에 관심이 있다고 했다. 중년 이후에 절망적인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우리나라에 아동 인권 도시가 있다는 사실을 아냐고 물어오기도 했다. 직접 그 도시를 찾아가 보았지만 허울 뿐인 도시라 했다. 글을 써보고 싶다고 했다. 여러 언어에 능통한 그녀는 지금도 방송대를 다닌다. 영어 영문학을 전공하는 그녀는 국제 정치에 관한 공부도 하고 싶다고 했다. 내가 늘 주장하듯 글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글감에서 승부가 나곤 한다. 그녀의 경험이 얼마나 큰 자산인지를 나는 역설했다. 그녀는 얼마전 어느 점집을 찾았다고 했다. 글을 써야 할 사람이 왜 숫자를 만지고 있냐는 핀잔을 들었다고 했다. 정말로 맞는 말인지 확인해보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눈은 빛나고 있었다. 매 주 한 편의 글을 써보기로 했다. 틈틈히 첨삭을 도와주겠다고도 약속했다. 평일 오후의 1시간 반이 훌쩍 지나갔다. 내가 만나는 스몰 스텝의 에너지는 이렇게 사람의 모습을 하고 내게로 다가오곤 했다. 동지를 만나고 동무를 만난다. 뜻이 합한 사람들이 만나면 그 에너지는 원자로 머물지 않는다. 격렬하게 부딪힌다. 우리는 그것을 원자 폭탄이라고 부른다. 실제의 폭탄과 다른 삶의 폭탄은 사람을 바꾼다. 나를 바꾸고 함께 하는 이들을 바꾼다. 나는 그러한 변화를 적지 않게 목격해왔다.
공황은 물리적 질병이다. 위험을 감지하는 몸의 회로에 과부하가 걸린 상태를 말한다. 의지 박약의 문제가 아니다. 많은 경우 유전의 영향도 받는다. 언젠가 의사 선생님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다리가 부러졌는데 의지로 이겨내실 건가요?' 그 때부터 나는 이 마음의 병으로부터 자유로와졌다. 떳떳할 수 있었다. 내 잘못이 아님을 알았다. 대신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하루 세 줄의 일기를 썼다. 영어 단어 다섯 개를 외웠다. 매일 낯선 한 사람에게 인사를 했다. 그렇게 쌓은 일상의 성취들이 몸과 마음의 병을 치유하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공황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생각이 많은 사람들이다. 대개는 똑똑한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이 모든 고통의 원인을 스스로에게 돌리는 경우가 많다. 더 많은 책임을 지우거나, 스스로를 비난하곤 한다. 하지만 안된다. 그러면 안된다. 그 고통은 우리의 무능과 의지 박약 때문이 아니다. 당신은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 의사와 약의 도움을 기꺼이 받아도 된다. 그 어려움과 고통이 삶을 변화시키는 에너지의 원천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달라질 수 있다. 나와 Y처럼. 삶을 바꾸는 경험으로 흥분되는 매일을 살아갈 수도 있다. 나는 힘들 때마다 영화 '굿 윌 헌팅'에 나오는 다음의 대사를 기억한다.
"It's not your fault."
이 말을 Y에게도,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꼭 해주고 싶었다. 영화 속 상처입은 윌을 치유해주었던 바로 그 한 마디였다. 결코 당신 잘못이 아니다. 그리고 당신도 우리처럼 함께 달라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