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나라의 프리 에이전트

약 1년 간 끌어왔던 백서 작업을 비로소 끝냈다. 어느 대기업의 30년 해외 사업을 정리하는 책이었다. 올해 3,4월이면 끝내야 했던 일을 지금까지 끌어왔다. 하지만 자주 있는 일이다. 통장에 입금되기 전까지는 끝나도 끝나지 않는 것이 1인 기업, 프리랜서 혹은 프리 에이전트의 일상이다. 오전에는 4번 째 책의 계약을 끝냈다. 부담은 1도 없었다. 내가 가장 잘하고 좋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말을 쉽게 내뱉기까지 15년의 시간이 걸렸다. 어릴 때부터 글쓰기에 재능 있다는 말은 숱하게 들어왔다. 학교 시절 상이란 상은 쓸어담았었다. 고등학교 시절 국어 선생님으로부터 '학생이 쓸 시가 아니다'라는 극찬을 받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먹고 사는 일의 최전선에 뛰어들면서 한없이 작아지고 또 작아지던 나였다. 긴 길을 돌아와 다시 이곳에 섰다 싶었다. 적어도 지금은 말할 수 있다. 글을 쓸 때 나는 가장 나답다는 사실을. 그렇게 4번 째의 계약서를 마무리하고 카페를 나섰다.


오후에는 어느 스타트업을 만나 강연 동영상을 찍기로 했다. 나의 첫 책인 '스몰 스텝'을 동영상으로 제작해 팔고 싶다고 했다. 지난 3년 간 1시간 반 정도의 강연을 수십 번 반복해온 터였다. PPT도 없이 즉석 강연을 한 적도 있었다. 어려울 것 같지 않았다. 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한동안은 강연장만 나가면 두렵고 떨린다는 거짓말을 한 적이 있었다. 죄송하다.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았다. 버튼을 누르면 물이 나오는 정수기처럼 요즘은 강연하는 일이 즐거워졌다. 늘 청중의 반응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그래도 부담은 없다. 이번 달에도 두 개의 강연이 예정되어 있지만 딱히 준비가 필요할까 싶을 정도다. 교만해졌다. 그래도 두렵지는 않다. 어느 정도의 자신은 있다. 그런 강연을 영상으로 녹화하고 판매까지 대행해준다고 한다. 전용 프로그램과 스튜디오까지 통째로 빌려준다니 감사할 따름이다.


thumb-1920-274164.jpg 동화로 다 읽지 않았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뒤늦게 영화로 보았다.


기업과 학원의 의뢰를 받은 두 권의 책은 여전히 작업 중이다. 모두 마무리만 남았다. 요리는 끝났고 데코와 플레이팅만 남은 셈이다. 멋지게 마무리하고 싶다. 부끄럽지 않은 책을 만들고 싶다. 어떻게든 시간을 확보해 완성도를 높이려고 한다. 내 이름으로 나가는 책은 아니지만 무슨 상관인가. 내 영혼을 담고 싶다는 욕심이 강렬해진다. 시키지 않아도 원고를 고친다. 또 고친다.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일로 완성하고 싶어서다. 그러면서 추석 후 시작할 새로운 일을 떠올려 본다. 예비 모임에서 만났던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가슴에 불을 지핀다. 세상에는 작지만 강한 기업들이 생각보다 많다. 이 회사 역시 국내 유일의 신발 제조사로 4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창업주와 그의 두 자녀분, 그리고 회사의 이야기를 하나의 스토리로 옮겨보려고 한다. 재미있을 것 같다. 한 기업을 수십 년간 끌어온 분들의 삶은 형언할 수 없는 자극을 준다. 빨리 만나 이야기를 듣고 싶다. 그리고 세상에서 하나 뿐인 유일한, 멋진 원고를 만들어보려고 한다. 알 수 없는 자신감이 가슴 속 저 깊은 곳에서 뿜어져 나온다.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 재미있을 것 같다. 언제나처럼 그렇게 쉽게 끝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isanghan-narayi-aelriseu-2010.jpeg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면 일상의 싸움도 힘든 법이다.


저녁에는 뜬금없이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를 보았다. 고전을 실사화한 디즈니의 역사를 다룬 어느 유튜버의 영상을 본 직후였다. 그러고보니 수학의 정석처럼 앞부분만 보았던 이야기 아닌가. 이 책에 대한 이야기는 시계를 들고 도망 치는 토끼가 구멍 속으로 사라지는데서 끝나곤 했다. 그 뒷 이야기가 불현듯 궁금해졌다. 차마 재미있다거나 감동적이라는 거짓말은 못할 정도의 시간이었다. 다만 주제는 선명했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진짜 자신'을 찾아가는 이야기였다. 세상은 기대와 다르고 이 엘리스는 그 엘리스가 아니라고 함부로 말한다. 몸이 한 없이 커지는가 하면 작아지기도 한다. 거대한 용과의 일전을 승리로 이끌어야 하지만 자신이 없다. 사실 이건 우리의 이야기다. 세상 속에서 인정받으려고 발버둥치는 우리들, 그러나 그런 인정을 받는데까지 나아가는 건 생각보다 어렵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는 이야기한다. 그 누구의 기대도 아닌 자신의 모습으로 살아가라고. 이 이야기가 청혼으로 시작해 파혼으로 끝나는 건 그런 면에서 꽤나 상징적이다. 우리는 엘리스다. 이상한 나라를 살아가는 엘리스다. 진짜 내가 아닌 누군가의 기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묵직한 일침이다. 문득 크록스의 메인 카피가 떠오른 것도 그래서였다. 'come as you are'. 의역하자면 '네 모습 대로 살아' 정도가 아닐까.


queen_of_hearts-Alice_in_Wonderland_Movie_HD_Wallpaper_01_1366x768.jpg 영화 보는 내내 안쓰러웠던 퀸 오브 하트, 머리만 큰 그녀는 우리의 모습은 아닐까?


프리 에이전트의 삶은 고달프다. 수입은 불규칙하다. 미래는 불확실하다. 모든 것이 나의 역량으로 결정되는 냉혹한 현실을 뚫어야 한다. 그래서 우울할 새가 없다. 다음 달 카드를 막아야 하고 몇 달씩 밀리는 일과 수입을 묵묵히 감당해야 한다. 그래도 후회하냐고 물으면 단연코 말할 수 있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회사 생활은 십 수년으로 할만큼 했다고 믿는다. 그때의 나는 필요 이상으로 작았었다. 필요 이상으로 크기도 했었다. 늘 시간에 쫓기는 토끼들을 수없이 만났다. 머리만 큰 여왕도 만났고, 식솔을 거느리느라 원치 않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견공?도 만났다. 나도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나다운 삶'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지금 그런 삶을 살고 있다고 믿는다. 여전히 불안하고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나는 이 새로운 길을 앞으로도 묵묵히 걸어보려고 한다.


이상한 나라의 동굴을 빠져나온 엘리스는 귀족의 청혼을 거부한다. 대신 아버지가 걸었던 개척의 삶을 위해 배에 오른다. 제국주의에 대한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듯한 마지막 장면이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나는 나의 돛을 새로이 올리면 된다. 매일의 첫 작업은 이렇게 새벽의 글쓰기를 계속하는 일이다. 나는 이렇게 조금씩 나다워진다. 누구의 것도 아닌 나의 항해를 시작한다. 닻을 올린다. 돛을 활짝 편채 바다를 가르며 나아간다. 오늘은 누구를 만나 어떤 새로운 일을 벌여볼까. 가장 나다운 하루를 이렇게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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