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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지만 슬프지 않게, 기쁘지만 기쁘지 않게

9회말 2사, 투수 쿠니미 히로는 루상에 단 한 명의 주자도 보내지 않았다. 이제 퍼펙트 게임까지 아웃 카운트 하나가 남았다. 마지막 와인드업을 마치고 공을 던지는 순간, 그의 팔은 유리처럼 산산히 부서진다. 그리고 히로는 꿈에서 깬다. 이어지는 다음 장면. 히로는 자신의 글러브를 집 앞 마당에서 태우고 있다. 엄마가 무심히 묻는다.


"얘, 히로야. 너 뭘 태우고 있는 거니?!"


글러브가 타닥 타닥 소리를 내며 검은 연기와 함께 타오르고 있다.


"내 청춘이에요."


다시 엄마가 딴전을 피우며 말한다.


"그런 것보다 네 침대 밑에 있는 야한 책이나 태웠으면 싶은데, 엄마는."


그러자 히로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렇게 말한다.


"그건... 내 목숨이고."



청춘 야구 만화 'H2'의 첫 장면이다. 가장 사랑하는 만화다. 그렇다고 다른 일본 만화에 특별히 관심을 가진 적은 거의 없다. 누구나 한 번쯤 읽었을 '슬램 덩크'나 '원피스'도 앞 부분만 읽다가 그만 두곤 했다. 내가 이 만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한 가지다. 인물과 사건을 묘사하는 방식 때문이다. 작가는 '심각한' 주제를 '심각하게' 다루지 않는다. 어마어마한 슬픔을 무심하게 툭 하고 던져놓듯 묘사한다. 히로는 중학 시절의 3년을 야구에 걸었다. 친구 히데오와 함께 야구 천재로 불리며 온갖 명성을 다 가진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앞서 있었던 대회의 팔 부상으로 3개월 진단을 받는다. 계속 야구를 했다간 3개월 안에 팔이 완전히 망가진다는 경고였다. 아무리 만화라지만 가볍게 다룰 수 없는 시나리오 아닌가. 하지만 작가 아다치 미츠루는 이 상황을 '가볍게' 묘사한다. 34권에 걸친 장대한 스토리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슬픔에 빠져 어깨를 들썩이며 소리 내어 울었다'


슬픈 장면을 슬프게 묘사하는 사람은 아마추어다. 작가가 먼저 슬픔에 빠져버리면 독자가 끼어들 틈이 없다. 대신 그 어마어마한 슬픔을 유추할 수 있는 묘사가 따라야 한다. 그것은 대화일 수도 있고 동작일 수도 있다. 노련한 작가들은 이러한 장면의 해법을 아는 사람이다. 시나리오가 쓰기 어려운 이유 역시 바로 이 때문이다. 슬픈 것을 슬프다고 표현하지 않고 대사와 지문으로 표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글을 쓰기 위해 우리는 어떤 준비를 할 수 있을까? 타고난 재능 없이는 불가능한 일일까?


'힌두인인 그는 꼬챙이처럼 마른 몸에 머리는 삭발을 했고 눈빛은 흐릿하게 젖어 있었다. 그는 숱 많고 두툼한 콧수염을 길렀는데, 몸집에 비해 터무니없이 커서 마치 영화에 나오는 코미디 배우의 수염 같았다... 그들은 그의 곁에 바싹 붙어 있었고, 줄곧 그가 정말 곁에 있는지 확인이라도 하듯 조심스레 손을 얹고 있었다. 마치 아직 살아 있어 물로 뛰어들지도 모를 물고기를 다루는 사람들 같았다. 하지만 그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거의 모르기라도 하듯 오랏줄에 맥없이 팔을 맡긴 채 아무 저항도 없어 서 있었다.'



조지 오웰이 1931년 8월 <뉴 아델피>지에 '교수형'이란 제목으로 게재한 에세이 중 일부이다. 추적 추적 비가 내리는 버마에서의 하루를 묘사한 그는 한 때 식민지 버마의 경찰 간부로 일하고 있었다. 명문 사립학교 이튼을 졸업한 그는 주변의 기대를 저버리고 식민지 경찰에 자원하여 버마로 떠났다. 하지만 그는 식민 통치의 앞잡이 노릇을 한다는 자괴감으로 괴로워했다. 그리고 어느 날 경찰 생활을 접고 사죄하는 마음으로 5년 간의 노숙 생활을 시작한다. 비밀은 여기에 있었다. 경험의 크기와 진폭이 그 글의 생명력을 가늠한다고 믿는다. 인간은 경험하지 않은 것을 진정성 있게 말할 수 없다. 우리의 글쓰기가 골방에서의 작업이 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는 감히 장담할 수 있다. 'H2'의 저자 아다치 미츠루에게 적지 않은 실연의 경험이 있었을 것이라고. 나중에 확인한 바로는 이미 할아버지 작가가 되어 있었지만 말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글감을 찾아 다닌다. 무슨 일을 하든, 누구를 만나든, 글 속에서 어떻게 기록하고 묘사할지를 항상 고민한다. 글감이 없으면 일부러 만들기도 한다. 사람을 만나러 나간다. 하다 못해 동네 앞 수퍼라도 다녀오려고 한다. 책을 읽고 영화를 본다. 글을 쓰고 피드백을 살핀다. 슬프되 슬프지 않은 글을 쓰기 위해서, 기쁘되 기쁘지 않은 표현을 하기 위해서라도. 하물며 청춘만화도 아는 사실을 나만 몰라서야 되겠는가 하면서 말이다. 인간은 똑같은 자극에 모두 다르게 반응하는 존재이다. 그것이 어쩌면 '인간다움'이 아닐지. 나라면 히로의 심정을 어떻게 글로 표현했을까? 그러한 상상이 내 글의 근육을 팽팽히 긴장시킨다. 아마도 나라면 이렇게 쓰지 않았을까?


'엄마는 아무 일 없는 듯 가볍게 문을 닫았다. 매캐한 연기 때문인지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엄마는 손등으로 무심히 눈물을 닦아내며 방금 전  보았던 아들의 어깨를 떠올렸다.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히로의 엄마는 소리없는 아들의 흐느낌을 폭포수 소리처럼 크게 들을 수있었다.'





* '쓰닮쓰담', 평범한 사람들이 작가로 다시 태어나는 글쓰기 오프 모임입니다 :)

(참여코드: wr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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