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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버리는 어떻게 다시 일어섰는가

1990년대 말, 전통의 명품 브랜드 버버리는 시련의 시기를 맞고 있었다. 영국의 홀리건들은 버버리를 자신들의 상징적 아이템으로 사용했고, 고유의 패턴은 싸구려 셔츠와 야구모자에 사용되고 있었다. 코카인에 중독된 어느 여배우는 버버리의 제품으로 자신의 몸을 감싸고 다녔다. 의회 민주주의, 스카치 위스키와 함께 영국의 상징으로 군림하던 버버리의 몰락은 참담했다. 지나친 대중화로 제품의 명성이 땅에 떨어지고 무리한 사업 다각화로 인해 브랜드 이미지가 추락한 결과였다. 2006년, 이윽고 버버리는 브랜드의 부활을 위해 CEO를 교체한다. 미국 의류 브랜드인 리즈 클레이본의 부사장 안젤라 아렌츠를 영입한 것이다.


버버리, 화려한 부활의 숨겨진 비밀을 찾아서


2006년 7월, 안젤라 아렌츠는 첫 임원 회의를 주최했다. 코트가 어울리는 습하고 으슬으슬한 날씨임에도 트렌치 코트를 입고 나타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뭔가 대단히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임원들마저도 외면하는 버버리의 트렌치코트를 어떻게 고객들에게 팔수 있단 말인가. 당시만 해도 명품 시장은 전 세계적으로 매장을 확대하며 빠른 성장세를 기록하고 있었다. 그러나 버버리는 해마다 겨우 평균 2%의 성장에 그치고 있었다. 그녀는 우선 트렌치 코트를 중심으로 영국다움(Britishness)를 보여주는데 총력을 쏟기로 했다. 그리고 럭셔리 업계의 그 누구도 메인 타겟으로 삼지 않았던 새로운 소비층인 ‘밀레니얼 세대(Millennials)’에 눈을 돌렸다. 당장은 소비 여력이 떨어지지만 자신의 개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제품에는 열광적인 반응을 보이는 이들을 새로운 메인 타겟으로 삼은 것이다.


안젤라 아렌츠는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버버리를 차별화하는 가장 확실한 지름길이라 판단했다. 이를 위해 버버리는 스스로를 데모크라틱 럭셔리(Democratic Luxury)로 새롭게 정의했다. 디지털 혁신을 통해 언제 어디서든 누구라도 쉽게 접근하고 소유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전체 마케팅 비용 중 60%를 디지털 미디어에 투자했다. 45개국에서 쇼핑이 가능하도록 6개 언어를 지원하는 웹사이트를 새롭게 개설했다. 이곳에선 24시간 내내 전화와 채팅을 통해 제품의 문의와 주문이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무려 120만 개의 개인 맞춤형 서비스가 가능한 '비스포크' 서비스를 통해 원하는 스타일의 트렌치 코트를 디자인하고 주문할 수 있게 했다. 페이스북, 유튜브, 인스타그램은 물론 중국의 위챗과 유큐까지 개설했다. '아트 오브 트렌치(Art of the Trench)'라는 소셜 미디어를 개설해 전 세계 사람들이 자사의 제품을 입은 사진과 이야기를 실시간으로 공유할 수 있게 했다.


trench.png 아트 오브 트렌치(Art of the Trench)


올드함의 상징에서 디지털 미디어 컴퍼니로


성과는 눈부셨다. 2009년에 이르러 버버리의 영업이익이 드디어 흑자로 돌아섰다. 주가는 165%나 상승했다. 2006년 7억 4천만 파운드에 불과했던 매출이 2015년 들어 2,300만 파운드로 증가했다. 2012년 인터브랜드 지수는 럭셔리 브랜드 중 가장 빠르게 성장한 브랜드로 버버리를 선정했다. 2015년 디지털 리포트에 탑 브랜드로 선정되기도 했다. 세상에서 가장 올드한 버버리 브랜드가 밀레니얼 시대의 마음을 사로잡는 최고의 디지털 럭셔리 브랜드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광고의 시대가 있었다. TV와 라디오, 신문 잡지에 광고를 내는 것 만으로 모든 마케팅 활동이 끝나는 시대였다. 잘 만들어진 CF 한 편이 융단 폭격처럼 소비자들의 마음에 내리 꽂히면 별다른 노력 없이도 제품이 팔려나갔다. 그러나 시대는 변했다. 모든 제품의 수준은 상향 평준화되었고 기존의 TV 라디오 광고 시장은 쇠락의 길을 달리고 있다. 다양한 온라인 광고 채널과 소셜 미디어가 디지털 마케팅이라는 이름으로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영리한 버버리는 이러한 변화를 미리 감지하고 있었다. 새로운 시대의 소비계층은 기존의 고객과 달랐다. 그들은 무엇보다 '자기다움'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데 능숙한 세대였다. 다른 방식으로 정보를 입수하고 제품을 소비하는 세대였다. 버버리는 이들과의 소통을 위해 회사 자체를 '디지털 미디어 컴퍼니'로 바꾸는 데 총력을 쏟은 것이다.


burberry-bespoke.jpg 개인 맞춤형 서비스가 가능한 '비스포크' 서비스


버버리는 생산과 판매를 위한 시스템 및 프로세스를 디지털 방식으로 통합했다. 그 과정에서 취합된 고객 데이터를 통합 분석하여 고객 마케팅에 활용했다. 실시간 애널리틱스 소프트웨어를 활용하여 고객의 구매기록과 소셜 미디어 사용, 패션 트렌드 탐색 및 매장 방문 기록 등 다양한 데이터를 분석했다. 그 결과 개인화된 맞춤 서비스는 물론 매장 내 고객 지원에 매우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었다. 고객이 어디서 어떤 종류의 제품을 구매했는지를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2016년에는 리테일 엑셀런트 프로그램을 통해 매장 운영 프로그램 및 디지털 세일즈툴을 향상시키고 고객 로열티 및 제품 타겟팅에 활용했다. 이를 위해 버버리는 2017년에만 약 10억 파운드를 디지털 분야에 투자한다. 버버리의 화려한 부활은 시대의 변화를 읽은 혜안과 치밀한 계획, 과감한 투자가 맞물려 만들어낸 놀라운 성공의 기록이었다.


숫자 뒤에 숨은 욕망을 읽을 수 있는가


변화란 어려운 것이다. 멈춰선 책상을 움직이려면 처음엔 엄청난 힘을 주어야만 한다. 하지만 한 번 움직인 책상은 아주 작은 힘으로도 밀 수 있다. 멈춰선 책상을 고정하는 ‘정지 마찰력’을 깨기 위해선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필요하다. 수많은 브랜드들이 디지털 브랜딩의 도입을 놓고 겪는 어려움과 고민은 바로 여기서부터다. 명품 브랜드인 버버리의 고민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신들과 달리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던 다른 럭셔리 브랜드와의 차별화가 그 무엇보다도 시급했다. 이를 위해 안젤라 아렌츠는 가장 먼저 브랜드의 핵심가치(Core Value)를 발견하는 일에 온 힘을 쏟았다. 그 결과 가장 영국적인 것이 가장 버버리답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그 결과 아렌츠는 모든 전략을 영국을 상징하는 트렌치코트를 중심으로 짜기로 했다. 트렌치코트 안에 버버리의 모든 핵심 요소가 담겨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Burberry.jpg 가장 버버리다운 것, 가장 영국스러운 것


많은 이들이 디지털 브랜딩을 '방법론'으로만 이해한다. 어떤 소셜 채널을 개설할지, 어떤 분석 도구를 활용할지에만 매달린다. 남들이 하니까 따라 한다는 지극히 수동적인 자세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버버리가 디지털 미디어 컴퍼니로 화려하게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자사 브랜드의 핵심 가치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것을 ‘영국다움’으로 이해했고, 그 다음으로 이 핵심가치를 소비해줄 새로운 소비자들을 찾아나섰다. 우리가 익히 알다시피 그들은 밀레니얼 세대였다. 버버리는 이들과 소통할 방법이 필요했다. 바로 그 소통의 방법이 다름아닌 ‘디지털’이었다. 그들에게 디지털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었다. 버버리의 차별화를 위한 ‘도구’이자 새로운 타겟과 소통하기 위한 ‘방법론’일 뿐이었다. 데이터는 숫자일 뿐이다. 이 데이터를 해석하는 것은 사람의 영역이다. 밀레니얼 세대는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 어떤 방식으로 제품과 서비스의 정보를 입수하고 구매하는가. 폭발적인 바이럴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진정한 디지털 마케팅에 정말로 필요한 것은 바로 그 숫자 뒤에 숨은 인간의 욕망을 읽어내는 것이다. 버버리가 성공한 이유는 바로 그 비밀을 이해하고 생산과 판매, 마케팅의 전 과정에 적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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