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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 엔딩, 퀸마마 마켓

브랜드 연작 소설 #01.

그곳에서 여자는 거절을 당했다. 흐리고 바람이 불던 날이었다. 그래도 온실 속 천정 같은 퀸마마 마켓 4층의 풍경은 기억에서 가시지 않았다. 간간히 비치는 햇살이 가끔씩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그 남자처럼 넓은 어깨를 지닌 공간이었다. 양 옆으로는 숲이 보였다. 그 남자는 숲이 아니라 공원이라고 정정해주었다. 채광이 좋은 그곳은 확실히 그 남자를 닮은 공간이었다. 노출이 많은 콘크리트와 강인해보이는 강철의 골격 때문만은 아니었다. 양 옆으로 트인 그린의 공간처럼 남자의 마음은 시원하게 트인 데가 있었다. 무슨 말을 해도 받아줄 것 같은 넉넉함이 좋았다. 여자는 그런 공간 속에서 그런 남자를 만난 건 운명이 아닐까 잠시 생각했었다. 여자는 장난처럼 남자에게 말했다.


"이런 곳이라면, 질리지 않겠네요."


남자가 말했다.


"그런 곳은 없어요. 어디에도요."


여자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남자의 이상한 단호함에 마음에 걸렸다. 여자는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단언하죠?"


남자가 답했다. 스스로도 놀란 표정이었다. 당황한 표정이 그의 얼굴을 스쳐 지나간다.


"...적어도 저는 그렇다는 말이에요."


여자는 직감했다. 부드러운 거절의 뉘앙스를. 여자는 공간을 묻지 않았다. 남자도 공간을 답하지 않았다. 가볍게 식은 커피가 혀끝에서 한결 차가워졌다. 그래도 여자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이런 남자를 소개한 친구를 벌하기 위해 서둘러 엔딩의 멘트를 준비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남자 앞에서는 이상하게 마음이 한결 여유로워졌다. 거절의 메시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이유를 알고 싶었다. 마음 한 켠엔 희망도 있었다.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둘은 함께 3층의 서점으로 말없이 내려왔다. 기왕 이곳까지 왔으니 걸어서 내려가고 싶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이번엔 공원의 뷰가 좀 더 노골적으로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이 공간은 부부가 함께 만들었다고 했다. 이곳을 기획한 사람은 '바쁜 도시 생활 속에서 우리 몸에 필요한 자연 친화적 그린 라이프를 제안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흔한 수사적 표현만은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남자는 여기서 만나자고 했다. 어반, 그린, 라이프스타일... 여자는 어느 잡지에선가 보았던 이 곳의 컨셉을 떠올리며 설계자의 안목에 감탄하고 있었다. 그것은 곧 남자에 대한 감탄이기도 했다.


"이곳엔 평범한 책이 하나도 없을 것 같네요."


여자는 남자를 올려다보며 스치듯 말했다. 가벼운 뿔테의 안경 속 남자가 최대한 친절하게, 그러나 조금은 무심하게 이렇게 답했다.


"혼자 오면 더 좋죠."


여자는 혼자라는 말이 지닌 쓸쓸함을 떠올렸다.


"혼자 있는 걸 좋아하시나봐요."


여자는 목적 없이 손 끝에 걸린 책 한 권을 들어올렸다. 자신의 말이 가볍게 떨렸다는 사실을 남자가 알아차릴까 두려운 마음이 일었다.


"책을 읽고 있으면 혼자라는 생각이 조금 덜 들지 않나요?"


그는 여자가 들어올린 책 제목을 먼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도 왜 이 자리에 나오신 거죠?"


여자는 갑자기 저도 모를 용기를 내어 이 한 마디를 뱉었다. 조금 이르다 싶은 후회를 참지 못한 스스로를 자책하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남자의 짧은 침묵이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여자는 최대한 쿨한 표정으로 남자를 노려보았다. 남자의 넓은 어깨가 이상한 안도감을 주었다. 어떤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그 어깨에서 이런 기분을 느끼고 지나쳤을까?


"저기 잠깐 앉을까요?"


3층 서점의 테라스엔 의자가 몇 개 놓여 있었다. 기분 좋게 흐린 날씨였다. 바람이 흔들어놓은 나뭇잎들은 사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경쾌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남자는 의자 위에 자신의 손수건을 깔아 주었다. 약간은 과한 친절을 여자는 누리기로 했다. 남자의 솔직한 속내를 기다리는 의식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담배라도 꺼내들면 어쩌나 싶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친구와 약속을 했어요. 1년이 지나면 친구의 바람대로 다른 사람을 만나보기로. 사람의 호의가 가진 무게란게 있잖아요. 하지만 꼭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에요. 저 스스로를 시험해보고 싶었어요. 누군가를 다시 사랑할 준비가 되었는지를. 아까 카페에서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는 솔직히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었어요. 하지만 이상하죠? 당신이랑 말이 통하면 통할수록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거에요. 그 친구에게. 그러니까 여기에서 그 친구란..."


"사랑하는 사람인가요?"


여자는 말을 끊었다. 남자를 돕고 싶었다.


"사랑했'던' 여자라고 말하는게 더 맞겠네요. 3년을 만나다 헤어졌어요. 나는 아니다 싶었거든요."


"그런데요?"


여자는 저도 모르게 다그쳐 물었다.


"그런데 그 여자는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에요."


바람 소리가 대화를 덮었다.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남자는 말했고 여자는 들었다. 그러나 둘의 시선은 오랫동안 교차하지 않았다. 일방적인 대화였지만 또 그렇지 않기도 했다. 남자는 입으로 말했고 여자는 마음으로 들었다. 어느 시점엔가 여자는 눈물을 흘렸다. 남자는 그녀의 그 시간을 말없이 기다려 주었다. 남자는 미안해했고 여자는 마음을 정리할 수 있었다. 둘은 또 한 번의 긴 침묵을 끝낸 후에야 비로소 테라스를 걸어나올 수 있었다. 둘은 3층 서점의 테라스를 나와 2층의 매장으로 내려왔다. 다시 한 번 기왕 온 것이니 맘껏 둘러보고 가자는 여자의 제안 때문이었다. '오 보이!'라는 매거진이 만든 편집샵이 입점해 있었다. 여자는 자신이 일하는 잡지의 에디터로 편집장을 인터뷰한 일이 있었다. 하지만 인터뷰 내용은 언뜻 떠오르지 않았다. 섬세한 사람이었다는 기억만 인상에 남아 있었다. 직접 키우는 반려견이 사무실을 지나다니고 있었다. 그가 그린 그림 중에는 장애를 가진 바련견의 그림도 있었다. 세심하지만 과하지 않은, 실용적이면서도 모던한 느낌의 제품들 사이로 제주도의 유기견을 돕는 프로젝트 상품이 진열되어 있었다. 몇 가지 의문이 그제서야 풀리는 듯 했다. 취향이란, 관심이란 이렇게 제품과 공간을 통해서도 전해지는구나 싶었다. 하지만 뜬금없이 여자의 눈길을 끈 제품은 따로 있었다. 바로 흐르지 않는 참기름 병이었다.


"이거 하나 사갈까봐요."


여자는 남자에게 허락을 받듯이 물었다. 남자는 다소 놀란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흐르지 않는다네요. 저는 의도치 않게 과한 건 뭐든지 싫어하거든요."


남자는 말없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복층의 공간을 지나 퀸마마 마켓의 1층으로 말없이 내려왔다. 여자는 남자가 한 말을 곰곰히 생각하고 있었다. 뭔가 해피엔딩의 느낌을 주고 싶다고 생각한 건 타고난 여자의 강점이었다. 여자는 요모양 저모양의 식물들이 놓인 1층의 공간에서 또 다른 의미의 희망을 찾고 있었다. 시작이자 끝인 공간, 생명으로 가득한 공간, 녹색이 지배하는 공간, 그 공간의 주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살다보면 실제의 필요보다는 마음의 사치를 누리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다. 쓸 일이 없는 모종삽을 바라본 것도, 몇 만원이나 하는 수저 받침대를 지나치지 못한 것도, 거절의 뜻을 분명히 밝힌 남자와 이렇게 한 공간에 머물러 있는 것도 스스로를 위해 허락한 작은 사치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이만 하면 됐다 싶은 마음으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남자도 이 시간들을 행복했던 한 순간으로 기억해줄 수 있을까?


"아까 들은 얘기는 못 들은 것으로 할께요."


여자는 얇은 코트에 두 손을 꽂으며 한 껏 씩씩하게 말했다. 남자는 어깨를 으쓱하며 할 말을 찾고 있었다. 그 모습이 안쓰럽다는 생각을 한 건 아주 잠깐이었다.


"하지만 이 말은 꼭 하고 싶네요. 그 여자분이 그런 선택을 한 건 당신 때문은 아니었을 거에요."


남자는 답을 하지 않았다.


"그 사람이 바라는 것도 이런 당신은 아니었을 거구요."


그제서야 남자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새로운 사랑을 위해서라도, 언젠가 보낼 사람은 보내야겠지요?"


남자는 다시 말이 없었다.


"사랑은 책임감이 아니니까요. 어쩌면 당신이 이러고 있는 것, 누군가에겐 작은 오만함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거, 아세요?"


다시 남자가 여자를 바라보았다. 위로에서 질책으로 넘어가는 작은 뉘앙스의 변화를 읽은 듯 했다.


"그래도 당신은 좋은 사람이네요. 그렇게 친구에게도 말해줄께요. 하지만 서점에서 들은 얘기는 없었던 걸로. 저는 아무 것도 듣지 못했던 걸로."


남자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고... 제 스타일이 아니었다고 친구에게 말해도 되죠?"


그제야 남자가 웃었다. 여자도 웃었다. 그 날의 일기에 쓸거리가 생겼다고 기뻐해야 할 지 알 수 없는 시간이었다. 좋은 공간에서 좋은 남자를 만났다. 그러나 그 남자는 내가 아직 사랑할 수가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쓸쓸한 하루였다. 그러나 그렇게 일기에 쓰고 싶진 않았다. 해피엔딩으로 기록하고 싶었다. 남자가 여자의 앞에서 조금씩 멀어졌다. 그가 자유로워지기를 바랐다. 그 모진 책임감에서 벗어나길 바랐다. 그러나 이제 그건 여자의 몫이 아니게 되었다. 좋은 공간이었다. 괜찮은 시간이었다. 여자는 그렇게 총총히 퀸마마 마켓을 떠났다. 다음 언젠가의 주말엔 혼자 오리라 다짐하면서. 그리고 아까운 삶을 너무도 급하게 마무리한 아름다운 어느 여자의 명복을 빌었다. 한적한 거리엔 어느새 소리 없이 비가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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