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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초보를 위한 5가지 제언

글쓰기 교실을 열었다. '쓰닮쓰담'이란 이름이다. 쓰면서 닮아가고 쓰면서 담아간다는 뜻이다. 글쓰기를 통해 자신과 타인을 쓰다듬기 바라는 마음도 함께 담았다. 6주 간의 1기 모임을 마치고 2기를 모집했다. 유료 과정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1기 졸업생들이 2기에도 지원했다. 신청자가 몰려 주말반 외에도 평일반을 신설했다. 신청자만큼이 대기자가 줄을 섰다.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었다. 왜 우리는 이토록 글을 쓰고 싶어하는가. 힘든 일인줄 알면서, 돈이 안되는 일인줄 알면서 왜 우리는 글을 쓰고 책을 내고 싶어하는가. 나는 그 의문을 풀기 위해서라도 이 교실을 지속하려고 한다. 그리고 함께 성장하려고 한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부쩍 늘어난 1기생들의 글솜씨는 엄청난 자극이 된다. 함께 쓰고 합평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 성장을 눈으로 지켜본다. 그리고 이유를 살핀다. 그들의 글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첫째, 그들은 짧게 쓴다.


말과 글은 동전의 양면처럼 닮아 있다. 가장 듣기 싫은 말은 두서 없이 긴 말이다. 술을 좋아하셨던 아버지는 취기만 있으면 말이 길어지곤 했다. 어느 날은 밤새 같은 얘기를 반복하기도 하셨다. 그래서 일부러 꺼진 불을 확인하고서야 집에 들어가곤 했다. 구구절절 긴 사연은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도 들어주기 힘들다. 말도 그럴진대 하물며 취사 선택의 권한이 내게 있는 글은 더더욱 말할 것도 없다. 짧지만 분명한 문장이 좋다. 길면서 분명한 글을 쓰긴 힘들기 때문이다. 글의 세계에도 고수는 존재한다. 글의 길고 짧음이 좋은 글의 유일무이한 기준은 아니다. 하지만 초보는 짧게 써야 한다. 실수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글의 호흡이 살아나기 때문이다. 명확한 의사 전달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철인 삼종 경기를 뛰는 지인 중 한 명이 해주었던 달리기에 관한 조언이 있었다. 처음엔 500미터만 뛰세요. 그리고 300미터를 걸으세요. 다시 500미터를 뛰고 300미터를 걸으세요. 그렇게 뛰다 보면 1킬로미터를 뛰고 10킬로미터를 뛸 수 있게 됩니다. 나는 글쓰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둘째, 그들은 구체적으로 쓴다.


그들의 글은 한 편의 그림 같다. 모호한 표현을 쓰지 않는다. '어느 날'이라고 쓰지 않는다. '2019년 5월'의 일이라고 쓴다. '즐겁고 행복했다'고 뭉뚱그려 쓰지 않는다. '호주 브리즈번의 거리에서 케잌 가게를 보았다'고 쓴다. '그 사람을 사랑했다'고 쓰지 않는다. '백화점에서 그녀를 위해 가장 비싼 반지를 샀다'고 쓴다. 우리는 흐릿한 글씨를 보면 초점을 맞추기 위해 미간을 찌푸린다. 안경을 고쳐 쓴다. 좋은 글은 선명한 글이다. 영화같이 그 장면이 떠오르는 글이다. 처음부터 추상화를 그리는 화가는 많지 않다. 피카소 역시 초기에는 실사를 방불케 하는 정교한 그림을 그렸다. 글쓰기 초보도 마찬가지다. 복잡한 드라이빙 기술을 애써 익힐 필요가 없다. 정해진 4차선 도로를 정주행할 수만 있어도 충분하다. 단순하지만 선명하고 구체적으로 쓴 글이 좋은 글이다. 그 글을 읽고도 어떤 장면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그 글은 일단 잘못 쓴 글이다.



셋째, 그들은 솔직하게 쓴다.


글쓰기 과정 두 번을 하면 반드시 한 번은 우는 사람이 나오곤 했다. 이게 다 솔직한 그들 때문이다. 그들은 말로 하지 못한 아픈 기억을 글을 통해 털어 놓았다. 삶의 위기와 어려운 순간들, 감추고 싶은 컴플렉스들을 가감 없이 글로 썼다. 그런 글들은 마음의 빗장을 연다. 타인의 마음을 움직인다. 용기를 부추긴다. 그렇게 우리는 치유를 경험했다. 좋은 글이란 진솔한 글이다. 가식이나 허세가 없는 글이다. 적당히 가릴 것 가리면서 좋은 글을 쓰기는 어렵다. 좋은 글은 스킬이 뛰어난 문장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글쓰기 초보다. 조금의 용기를 내면 글은 좋아지게 마련이다. 실연의 아픔이, 사별의 고통이, 실패의 상처가 글로 옮겨지면 매력적인 이야기로 탈바꿈한다.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글쓰기가 힘든 이유는 솔직해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일기장에 홀로 쓴 글은 진정한 위로를 주기 어렵다. 자기 연민에 빠지기 쉽다. 하지만 함께 쓸 때 우리는 용기를 얻는다. 마음을 움직이는 힘 있는 글이 나온다. 그런 글은 좋아질 수 밖에 없다.



넷째, 그들은 오감을 활용해 글을 쓴다.


그들은 눈으로 본 것을 쓴다. 실제로 들은 것을 이야기한다. 피부에 와닿을 만큼 생생한 표현을 쓸 줄 안다. 대신 보지 않은 것은 말하지 않는다. 듣지 않은 것은 쓰지 않는다. 실제로 경험하지 않은 것을 아는 척 하고 쓰지 않는다. 소설가들은 누구나 첫 작품에 자신의 이야기를 쓴다. 경험하지 않은 무엇을 힘 있게 쓰기 힘들기 때문이다. 누구나 '광안리 해수욕장'에 갔다고 쓸 때, 맨 발의 바닥에 닿았던 모래알의 촉감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 코 끝을 스치는 바닷 내음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밀려드는 바닷물이 종아리의 세포 하나하나를 깨울 때의 경험을 글로 옮기는 사람들이 있다. 좋은 글은 소름을 돋게 한다. 오감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그러러면 실제로 가 본 곳을 쓸 수 밖에 없다. 만난 사람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모르는 것을 쓸 수 없다. 아는 것만 쓸 수 있다. 그때서야 비로소 좋은 글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말은 에둘러 표현하는 것이 때때로 가능하다. 그러나 활자화된 글은 그 모호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사람이다. 말 잘하는 사람은 많아도 글 잘 쓰는 사람이 많지 않은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다섯째, 그들은 자기답게 쓴다.


몇 주가 지나면 같은 소재를 두고도 다양한 글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대화체의 소설이 등장한다. 사투리가 등장한다. 친구, 지인, 가족들의 생생한 에피소드들이 등장한다. 전혀 다른 소재들을 연결한 글이 등장하고, 특정한 직업적 경험이 글의 소재로 쓰이기 시작한다.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쓰라고 하면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에 대한 글이 나온다. 여행을 쓰라고 하면 인생 여정을 글로 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모스크바의 어느 거리를 묘사한 디테일한 여행기를 쓰는 사람도 있다. 그제서야 우리는 깨닫게 된다. 우리 모두가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각각의 개성을 지닌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사실을. 진정한 글쓰기의 배움은 이렇게 서로의 다른 점을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런 깨달음은 이상하게도 용기를 준다. 다른 누군가와의 비교와 경쟁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시작한다. 나만의 스타일로 쓰는 것이 가장 나다운 글임을, 가장 나다운 글이 가장 좋은 글이란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글쓰기 과정을 통해 우리가 배우기 원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모두 다르다는 것, 각자의 인생을 살아온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사실이다. 그제서야 우리는 우리의 글을 쓸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좋은 글을 쓰는데 원칙 같은 것이 있을리 만무하다. 부처를 만나려면 부처를 죽이고 가라 했던가. 진정한 고수는 한 가지를 배우면 그것을 잊는 것으로 새로운 무술의 경지로 나아가곤 한다. 하지만 우리는 글쓰기의 경지에 이르고자 펜을 든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가 글을 쓰고 싶어하는 이유는 나를 표현하기 위해서다. 나답게 살고 싶기 때문이다. 내 인생이 의미있어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런 우리에게 글쓰기의 본질은 탁월하게 뛰어나는 문장 쓰기가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로 타인에게 닿기 위한 간절한 몸부림이다. 그러니 우선 짧고 솔직하게 쓰자. 솔직하게 오감을 활용해 쓰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나만의 글을 쓰자. 결국엔 글쓰기의 프로가 된 수많은 작가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 함께 쓰는 글쓰기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싶다면...

(참여코드: wr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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