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는 영도대교라는 다리가 있다. 현지인들이 영도다리라고 부르는 곳이다. 친구 하나가 이곳 난간을 따라 걸은 적이 있었다. 친구는 심한 바닷바람에 인도 쪽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바다쪽으로 몸을 기울여 걷는다. 그런데 어느 순간 바람이 뚝 끊기고 말았다. 친구는 그대로 바다에 떨어졌다. 하지만 유유히 바다를 헤엄쳐 뭍으로 나오는 친구... 나는 녀석을 생각할 때마다 이 장면이 떠오른다. 그가 남긴 무용담 중에는 도룡뇽을 삼키다가 죽을 뻔 한 이야기도 있다. 그 불쌍한 동물이 살기 위해 네 다리로 끈질기게 버틴 탓이었다. 어린 시절 이야기긴 하지만 참으로 별난 놈이다. 이 친구의 이름은 박유철, 내 이름과 모음 하나만 다르다. 뒤늦게 교회에서 만나 30년 이상을 알고 지냈다. 성인 4명과 맞짱을 뜰만큼 기골이 장대한 친구다. 녀석은 적지 않은 나이를 먹고도 여전히 툭하면 사고를 친다.
최근에는 직장 상사와의 다툼으로 1,000만원을 물어 주었다. 작지 않은 사고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그럴 사정이 있을거라 믿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후 뉴스에 친구의 회사가 나왔다. 오랜 직장 괴롭힘을 고발하는 뉴스였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는 직장 환경이었다. 나는 역시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벌금은 의사인 친구가 대신 물어 주었다. 그런 친구가 집을 구하겠다며 서울로 올라왔다. 친구 부부가 묵을 호텔을 학원 원장인 친구가 대신 예약해주었다. 기어이? 우리 동네까지 찾아온 부부와 저녁을 먹고 차를 마셨다. 오랜만의 부부 모임이었다. 친구는 결국 수지에 아파트를 계약하고 왔다고 했다. 큰 일이다. 이곳까지 와서 또 어떤 사고를 칠까 걱정이다. 그 옆에는 분명 내가 있을 가능성이 높은데... 당장 운동하냐고 묻더니 자전거를 주겠다고 한다. 자기 집에는 9대가 있다고 한다. 꼼짝없이 다이어트 하게 생겼다. 큰 일이다. 정말로 큰 일이다.
서울로 올라오기 전, 교회 친구였던 친구 집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그의 집은, 그러니까 더 정확히 그의 방은 항상 열려 있었다. 누구라도 언제든지 찾을 수 있는 장소였다. 주인이 없어도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그 방에서 놀고 먹었다. 불편한 점이 없지 않았을텐데 그는 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즐거운 듯 보였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친구 관계가 끊어질 때도 이 친구만 통하면 누구의 소식이라도 들을 수 있었다. 결혼을 하고 서울 생활이 길어질 수록 연락할 일은 더더욱 줄어만 갔다. 하지만 친구는 나의 무심함과 상관없이 끊임없이 자신과 친구들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렇다고 돈 많은 집 부유한 아들도 아니었다. 형편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그 위험한 타워 크레인을 탄 적도 있었다. 공장에서 위험천만한 일을 꽤 오래 했다. 한 때는 쓰리잡을 뛴 적도 있었다. 지금까지도 부모의 빚을 갚느라 여전히 고생 중이다. 그래도 그의 삶은 심플하고 명쾌하다. 그에게 돈보다 중요한 것은 '관계'이다. 수십 년 지기 친구들은 모두가 그 사실을 안다. 그래서 그의 주위엔 언제나 사람이 있다.
나는 그런 그가 부럽다. 하지만 흉내 낼 생각은 전혀 없다. 그 관계를 지키기 위해 치러야 했을 댓가들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호의가 언제나 호의로 돌아오지 않는다. 개인의 삶을 희생해야 하기도 한다. 너무 잘 나가서 멀어지는 친구도 있고, 너무 힘들어서 멀리하고 싶은 친구도 있으련만, 그의 사람에 대한 애정은 마를 줄 모른다. 1년에 한 번을 보아도 어제 본 것 같이 대한다. 내 친구들에 대해 인색한 와이프마저도 이 친구라면 쌍수를 들고 반긴다. 그래서 나는 그가 '성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믿는다. 의사인 친구보다, 돈 많이 번 친구보다, 대기업에 다니는 친구보다 더 성공한 삶이다. 아마 적지 않은 친구들이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런 말을 듣기 위해 지금까지 치룬 댓가들을 옆에서 묵묵히 보아왔기 때문이다.
이 친구에게 우리가 베푸는 작은 호의들은 기꺼운 것이다. 언젠가 나는 녀석에게 집에서 쓰던 컴퓨터를 가져다준 적도 있다. 무슨 이유인가로 필요 없어진 컴퓨터를 정말로 기쁘게 전해주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1,000만원의 벌금을 대신 물어준 친구도, 서울에 올 때마다 호텔 룸을 잡아주는 친구도 마찬가지 마음일 것이다. 녀석이 우리에게 준 것은 다름아닌 '신뢰'다. 어떤 상황에서도 내 편이 되어줄 것이란 변함없는 '믿음'이다. 아무 때고 만나도 느낄 수 있는 '친밀함'이다. 녀석에겐 그게 삶의 철학이고 바꿀 수 없는 가치이다. 톨스토이는 책으로 물었다. 사람은 도대체 무엇으로 사는가 하고... 그러면 나는 그 대답으로 이 친구의 이름을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다. 어떤 사람은 신뢰와 믿음과 친밀함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그렇다면 이 친구는 과연 나를 어떤 대답으로 기억해줄까. 부산으로 내려가던 친구가 답을 보내왔다. 함께 식사한 그날이 결혼기념일이었다고. 모처럼 친구와 함께 한 멋진 저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