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를 부탁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강아지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휴양지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관광지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금요일 밤의 미드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에버랜드의 놀이기구를 더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물론 이런 분류에 근거 따윈 없다. 그래도 조금 더 우겨보자면 세상에는 내향적인 사람과 외향적인 사람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휴양지를 선호하고, 금요일 밤의 미드를 좋아한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고양이를 좋아한다. 나는 내향적인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 집에는 세 마리의 고양이가 산다. 루이(또는 봉구)와 까망이, 별이가 그들?이다.



이 고양이 가족의 시작은 루이와 라라로부터 시작된다. '나만고양이없어병'이라는 중병을 앓던 와이프가 광명역 인근에서 발견된 고양이 두 마리를 입양한 것이 약 2년 전이다. 까만 줄무늬의 코리안 숏헤어 두 마리는 제법 자란 상태에서 우리 집으로 왔다. 이들의 정착 생활은 처음부터 만만치 않았다. 두 마리가 서너 번 이상 가출을 했다. 아예 눈 앞에서 사라지면 마음이나 편할 텐데, 꼭 집을 나가면 새벽마다 집 근처에서 울어대곤 했다. 착하디 착한 심성(보다는 시끄러운 걸 못 참는)의 나는 그때마다 집 주위를 헤매며 그들과 숨바꼭질을 했다. 새벽 서너 시에 동네 주변을 헤매다보면 새벽 이슬을 머금은 풀숲 때문에 옷이 축축해지곤 했다. 수컷인 루이는 그나마 쉬운 편이었다. 먹을 것만 보이면 목덜미를 쥘 때까지 정신을 못 차렸으니까. 반면에 똑똑한? 라라는 난이도가 높았다. 나중에야 문을 열어두면 저절로 들어온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이미 데려오기 전부터 성체라서 그랬는지, 하지만 집을 나가서 눈이 맞았는지, 라라가 임신을 한 후 여섯 마리의 새끼를 낳았다. 초보 엄마와 서툰 집사를 만나 겨우 두 마리만 살려낼 수 있었다. 아빠를 닮은 줄무늬와 지금의 까망이가 그들이었다. 예쁘게 생긴 줄무늬는 젖도 떼기 전에 입양을 갔다. 허락없이 줄무늬가 사라진 걸 안 나는 와이프와 이혼 직전까지 갈 뻔 했다. 까망이는 아무도 데려가지 않아서 우리가 키웠다. 그런데 이 놈이 클수록 인물이 났다. 머리도 좋았다. 공을 던져주면 강아지처럼 물어왔다. 놀고 싶으면 공을 톡톡 쳐서 토스를 하곤 했다. 먹고 자빠져 자는데 능했던 루이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재주였다. 그러던 어느 날 라라가 세상을 떠났다. 코로나 바이러스라고 했다. 손 쓸 새도 없없다. 와이프와 딸은 세상 슬프게 울었는데 정작 이상을 가장 먼저 발견한 쪽은 바로 나였다. 하긴 새로운 일도 아니었다. 애들이 데려온 물고기도, 햄스터도, 심지어는 달팽이조차도 끝까지 키운 쪽은 바로 나였으니 말이다.



루이는 착하다. 그래서 봉구가 되었다. 고양이는 가슴에 안아보면 안다. 잘 안기는 쪽이 무던한 쪽이다. 예민한 라라는 결코 곁을 내주지 않았었다. 까망이는 똑똑하다. 샛노란 눈을 반짝이면 한 마리의 작은 표범을 보는 듯 하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제 아빠(라고 추정되는)를 닮아간다. 수컷들은 암컷들에 비해 비만이빨리 왔다. 루이의 뱃살은 바닥에 닿을 정도다. 목덜미를 쥐고 들기보다 쌀포대처럼 안는 쪽이 훨씬 편하다. 먹고 자는 인생이다. 고양이 대학의 하숙생이다. 이 둘을 보면 확실히 남자와 여자가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생각 없는 남중생을 닮았다. 그런데 이 수컷들의 세계에 작은 변화가 찾아왔다. 와이프의 병이 또 다시 도진 것이다. 그 날은 폭풍우가 찾아오기 바로 전날이었다. 와이프와 딸이 치즈색 털을 가진 새끼 고양이 한 마리를 데려왔다. 나는 사료비와 중성화치료비부터 걱정했다. 일단 데려오기 전까지 나는 매우 인색한 편이다. 콰르릉 쿵쿵하는 천둥 소리에 마음이 흔들렸다. 그렇게 노란색 미묘 '별이'가 새로운 식구가 되었다.



별이는 예쁘다. 큰 귀에 노란색 털은 한 마리 여우를 연상시킨다. 하는 짓도 여우다. 입양 첫날부터 와이프 품에 안겨 잠든 모습을 보고 기겁을 했다. 애교도 많다. 집으로 돌아와 '별아'라고 부르면 '냐옹'하고 답을 하며 뛰쳐 나온다. 어딘가에서 처자고 있을 루이, 아니 봉구나 까망이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누워 있으면 배 위로 올라와 얼굴을 핥아댄다. 꾹꾹이 비슷한 것을 할 때도 있다. 문제는 아무한테나 그런다는 것이다. 놀러온 딸의 친구에게도 똑같이 한다. 이렇게 쉬운 고양이를 보았나. 그래도 배 위로 올라오면 차마 내치지를 못한다. 뱃살을 빼야 할 이유가 또 하나 늘었다. 그런데 요즘은 루이와 연애까지 한다. 중성화 수술을 받은 루이의 어디가 좋아서 눈이 맞았을까? 반면 선택을 받지 못한 까망이는 항상 따로 논다. 마음이 간다. 사람이나 고양이나 솔로는... 뭐 그렇다는 것이다.



고양이도 다르다. 생김새도 습관도 성격도 다르다. 하물며 사람일까 싶다. 그래서 다짐을 하게 된다.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를 뿐이라고. 휴양지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관광지를 선호하는 사람이 있다. 금요일 밤의 미드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호주 바다에서 서핑을 즐기는 사람이 있다. 고양이에게 선택받는 사람이 있고, 강아지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다. 다름에 대한 이해는 성숙도의 차이와 정비례한다. 다름을 이해하는 사람이 가장 '자기답게' 사는 사람들이다. 심지어 고양이도 저렇게 다를진대 하물며 사람이이야 얼마나 또 다를까. 그 다름은 결국 자기다움의 또 다른 말이다. 그리고 사람은 누구다 자기답게 살 필요와 의무가 있다. 그것이 우리에게 이 소중한 삶을 선물한 누군가를 위한 최고의 예우가 아닐지. 내일은 입냄새가 심한 까망이를 데리고 병원엔 가봐야겠다. 그렇다고 별이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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