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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마중물, 환경 설정

새벽 5시다. 지각이다. 부쩍 추워진 날씨 때문이다. 두꺼운 이불을 꺼내 덮었더니 금새 게을러졌다. 일어나자마자 커피포트에 물을 올린다. 거칠고 투박하게 새벽을 채우는 이 소리가 나는 좋다. 마치 나의 정신이 깨어나는 소리 같아서다. 뜨거운 물에 적당히 찬물을 섞어 책상 위에 가져다둔다. 모니터를 깨운다. 커서가 깜빡이는 브런치 화면을 띄운다. 매일 쓰는 글의 경우는 초고도 워드 프로그램을 쓰지 않는다. 긴장감을 즐기기 위해서다. 쓰자마자 '발행'을 클릭한다. 마치 배수진을 치듯이 새벽잠에 취한 나를 글쓰기로 몰아세운다. 따로 퇴고도 하지 않는다. 전쟁터 한 가운데 선 병사가 된 기분으로 글을 쓴다. 어떤 변명도 하지 않기 위해서다.


수없이 많은 키보드 끝에 애플의 매직 키보드 2가 간택을 받았다. 글쓰기는 손끝에서 시작된다. 너무 깊지 않지만, 그렇다고 무르지도 않은 이 키보드만의 타건감을 즐긴다. 숫자키가 없는 텐키리스를 고집하는 이유는 휴대성 때문이다. 한 번 손에 익은 키보드는 언제나 들고 다닌다. 사무라이가 작고 긴 칼을 항상 차고 다니듯이. 하지만 항상 더 좋은 키보드를 찾아다닌다. 기계식 키보드의 경쾌한 타격감과 언제든 들고다닐 수 있는 가벼운 무게의 키보드를 찾는다. 그래서 망한 적도 많다. 매장에서는 괜찮았으나 하루 정도 써보면서 고개를 저은 키보드가 한 두개가 아니다. 최근에 구매한 79,000원짜리 '키즈 투 고' 키보드가 그랬다. 휴대성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 블루투스 키보드. 하지만 나는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 좋은 키보드를 손에 쥐면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아서다.


늘 가는 몇 군데의 카페가 있다. 건물주가 카페 주인인 '찰스 커피'는 분위기와 커피 맛에서 일단 합격점이다. 5,000원으로 가격은 비싼 편이지만 리필이 된다. 섬세한 주인의 감각이 살아있는 바 형태의 인테리어도 마음에 든다. 가사 없는 음악의 선곡도 화이트 노이즈로서는 최고의 선택이다. 문제는 직원이다. 너무 자주 바뀌는 데다 무례한 사람도 종종 만난다. 얼마 전 부산에 살던 친구를 데려갔더니 시끄럽다는 듯 음악의 볼륨을 끝까지 올리는 경우도 당했다. 이제는 손절이다. 바로 옆에 '커피콘'은 저렴한 가격으로 자주 들르곤 한다. 노천 카페처럼 골목을 향해 나와 있는 바깥쪽 자리를 선호한다. 하지만 커피는 꽝이다. 아주 급한 경우에만 이곳에 들른다. 도저히 글이 써지지 않을 때의 극단적인 선택이다.


그래도 글이 써지지 않을 때는 무라카미 하루키나 스티븐 킹의 글을 읽는다. 딱히 글쓰기에 관한 특별한 노하우를 배울 수 있어서가 아니다. 분위기 전환용이다. 이 두 사람의 글은 자기만의 색깔이 있다. 스타일이 있다. 분위기가 있다. 하루키는 맥주처럼 첫 두 모금이 좋은 글을 쓴다. 도입부를 사랑한다. 하지만 속절없이 판타지로 흐르는 뒷부분은 (적어도 나는)사양이다. 그래서 늘 그가 쓴 소설의 앞부분만 읽는다. 에세이를 읽기도 한다. 스티븐 킹도 마찬가지다. 그의 글을 읽다 보면 전혀 다른 세상의 한 복판에 선 기분이 들곤 한다. 묘하게 끌어올려지는 긴장감을 즐긴다. 이들의 글은 에피타이저 같다. 뭔가 글을 쓰고 싶다는 필욕을 불러 일으킨다.


글쓰기는 고된 작업이다. 그럴수록 선물이 필요하다. 그것은 시간일 수도 있고 공간일 수도 있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쫀득하고 경쾌한 키보드의 타건감일 수도 있고, 가기만 해도 마음이 편해지는 카페일 수도 있다. 그도 아니면 누군가가 쓴 매력적인 스타일의 문장일 수도 있다. 이런 환경 설정은 일부러 계획되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뭔가 한 가지에 홀릭한 사람들은 그들만의 리추얼이 있다. 야구 선수의 루틴처럼, 골프 선수의 마인드 콘트롤처럼, 가장 나다운 글을 쓰기 위한 일종의 마중물이다. 어느 새 6시가 되었다. 이 새벽의 마법이 풀리기 전에 글을 마무리지어야겠다. 12시의 종이 울려 마차가 호박으로 바뀌기 전에, 어서 오늘의 브런치 글을 발행해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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